신해보서(辛亥譜序)

辛亥譜序
 우리 동방예의지국(東方禮儀之國)에 사는 사대부(士大夫) 집들로서 족보(族譜) 없는 집이 없으니, 그 족보(族譜)라는 것은 위로 조종(祖宗)의 근본(根本)을 연구(硏究)하여 밝히고 아래로 자손(子孫)의 소자출(所自出)을 밝히는 것이다. 따라서 족보(族譜)를 만들지 못하면 조상(祖上)을 추모(追慕)하는 성의(誠意)가 부족(不足)하고 종족(宗族) 간(間)에 돈목(敦睦)하는 의의(義意)가 없게 될 것임으로 인인군자(仁人君子)가 반드시 이것을 급선무(急先務)로 하여 족보(族譜)를 작성(作成)하고 있는 것이다. 생각컨대 우리 평해황씨(平海黃氏)는 처음 학사공(學士公)이 바다를 건너 동방(東方) 평해(平海)의 월송(月松)에 상륙(上陸)하신 후(後)로 1,800여년(一千八百餘年)의 세월(歲月)이 지났고 신라(新羅) 고려(高麗) 이래(以來) 명공거경(名公巨卿)과 문장덕업(文章德業)이 대대(代代)로 끊이지 않아 역사(歷史)에 항상 빛났다.
 그러나 세계(世系)와 족첩(族牒)이 전(傳)해 오지 못하고 문헌(文獻)의 빙거(憑據)가 없어서 금계(錦溪) 해월(海月) 양선생(兩先生)의 박학다문(博學多聞)한 지식(知識)으로도 오히려 상심(詳審)치 못하여 찾고 거두고 모아서 겨우 초보(草譜)만 찬성(撰成)하고 오직 후인(後人)에게 바라는 바 있더니, 지난 경인년(庚寅年)에 처음으로 판각(板刻)한 족보(族譜)를 풍기(豊基) 금양(錦陽)에서 편성(編成)하여 길이 전승(傳承)하게 하였음은 그 추원돈종지성(追遠敦宗之誠)을 가히 짐작하고도 남음이 있다. 그 후(後) 신묘년(辛卯年)에 춘천(春川)의 승지(承旨) 도(燾)씨가 자기의 누보(漏譜) 즉 경인보(庚寅譜)에 빠져 있음을 이유(理由)로 다시 완보(完譜)를 제작하였으나 혹 소루(疏漏)한 것과 근엄(謹嚴)한 체통(體統)을 실추(失墜)한 것이 있어 우리 황씨(黃氏)의 평해(平海)로 본관(本貫)을 삼는 자 이를 유한(遺恨)으로 여기는 이가 없지 않더니, 경술년(庚戌年) 가을에 다시 수보(修譜)할 것을 계획하였으나 3파(三派) 자손(子孫)이 합보(合譜)를 도모하기가 어려울 듯함으로, 이에 검교공(檢校公) 평리공(評理公) 양파(兩派)는 풍기(豊基)에 보소(譜所)를 설치(設置)하고, 대광공파(大匡公派)는 청안(淸安)에 보청(譜廳)을 설치(設置)하여 각조(各祖) 기조(其祖)하고 각파(各派) 기파(其派)하였으나, 오직 검교공(檢校公) 지파(支派)와 해월공(海月公) 지파(支派)의 자손(子孫)이 풍기(豊基) 보첩(譜牒)에 누락되었음으로 청안(淸安) 보첩(譜牒)에 입보(入譜)하기를 원(願)하여 왔었다.
 슬프다! 이를 조상(祖上)들이 보신다면 다 같은 자손(子孫)인데 어느 누구는 후히 보고 또 누구는 엷게 보겠는가. 항차 해월공(海月公) 종손(宗孫) 석오(錫五)씨가 신해보(辛亥譜)에 합보(合譜)할 뜻을 서찰(書札)로 간청(懇請)한 바 있고 보청(譜廳) 첨의(僉議)도 이를 한 가지로 합의(合議)하였으나 단지 그 명단(名單)이 늦게 도착(到着)하여 원보(原譜)에 합류(合流)하지 못하고 추편(追編)에 입록(入錄)하였으니 후인(後人)은 상고(詳考)해 보기 바란다.
 원고(原稿) 인쇄(印刷)에 붙이고져 윗사람에게 보고(報告)할 때 종인(宗人)들이 나에게 서문(序文)을 부탁함에, 내가 보소(譜所)에 오래 있어 대략 그 전말(顚末)을 아는 고로 이것을 권말(卷末)에 붙여두는 바이다.
  숭정(崇禎) 기원후(紀元後) 4(四) 신해(辛亥)(=1851) 중춘(仲春)(=2월) 하한(下澣) 후예손(後裔孫) 돈(墩) 근지(謹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