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헌대부삼도관찰사잠재공묘갈명(資憲大夫三道觀察使潛齋公墓碣銘)

자헌대부삼도관찰사잠재공묘갈명(資憲大夫三道觀察使潛齋公墓碣銘)
 안동부(安東府) 서쪽 40(四十)리 풍산(豊山) 시우동(時雨洞) 화전산등(花田山嶝)에 고(故) 관찰사(觀察使) 황공(黃公)의 분묘가 있으나 묘갈이 매몰되어 사적을 고증할 수 없어 후손 제씨가 민망하게 생각하던 중 다시 비문을 써서 표석을 세우고자 논의한 후 환덕(煥德) 병기(昞琪)를 내게 보내어 비문을 지어주기를 청하거늘 돌아보건대 내가 늙고 병들어 감내하기 어렵고 또 공의 세대가 이미 5백(五百)여년이 지나 고징할 문헌이 없으니 어찌 추상(推想)과 억측으로 망령되게 스스로 허물을 부르리요. 그러나 굳이 사퇴할 수 없어 삼가 그 보첩에 기재된 것에 의거하여 짓노라.
 살피건대 공의 휘는 천계(天繼)요 자는 성극(聖極)이며 잠재(潛齋)는 호라. 황씨(黃氏)의 선대에 학사(學士) 휘(諱) 낙(洛)이라는 어른이 중국으로부터 동국에 오셔서 평해(平海)에 사셨으므로 관향을 평해로 삼고 시조가 되셨다.
 그 후 고려조에 와서 태자검교(太子檢校) 휘(諱) 온인(溫仁), 군기소윤(軍器少尹) 휘(諱) 우정(佑精), 문하시중(門下侍中) 휘(諱) 유중(裕中)의 3대를 지나서 삼중대광보국(三重大匡輔國) 시(諡) 충경(忠敬) 휘(諱) 용(𤨭)이라는 분이 바로 공의 증조이시다.
 조의 휘는 태백(太白)이니 형조전서(刑曹典書)요 이조(李朝)에서 증(贈) 우의정(右議政)이요, 고의 휘는 우(祐)이니 병조전서(兵曹典書)요 이조에서 증(贈) 좌의정(左議政)이라. 비위(妣位)는 실전되었으며 처음에 좌상공(左相公)이 사현자(四賢子)를 두셨는데 장(長)은 휘(諱) 천록(天祿)이니 판도판서(版圖判書)요 이조에서 증(贈) 영의정(領議政)이요 차(次)는 휘(諱) 천상(天祥)이니 문하시중(門下侍中)이요 3(三)자는 휘(諱) 천복(天福)이니 밀직부사(密直副使)이요. 공이 그 4(四)자로 공민왕조(恭愍王朝)에 등과하였으나 려조에 국운이 다함으로 이태조(李太祖)를 도와 창업에 협찬한 공신으로 경기(京畿) 전라 (全羅) 경상(慶尙) 3(三)도 관찰사(觀察使)의 중직(重職)에 등용(登用)되었으나 만년에 벼슬을 버리고 경기(京畿) 포천(抱川)에서 남쪽으로 내려와 안동(安東) 풍산현(豊山縣)에 거지(居地)를 정하였다.
 장하시도다. 때는 이조(李朝) 초창기(草創期)라 성조(聖朝)의 기세는 흡사 용이 하늘로 날아올라 가는듯 하였고 국내의 많은 일대영현(一代英賢)들은 가진 재조(才操)를 역량껏 뽐낼 무렵인데 공이 그 틈에 참여하였음은 그 문무재덕(文武才德)이 겸비하였음을 가히 우러러 생각할만 하도다. 당시 조정(朝廷)에서는 덕화(德化)로 국내민심을 수습하고 백성을 안돈시킴에 시급한 때이므로 특히 관찰사(觀察使)같은 요직(要職)은 문무겸전하고 또 인격과 덕망이 높은 분이라야 하였을 터인데 공이 3(三)차나 발탁되어 세번 방백(方伯)의 인수(印綬)를 차게 했으니 은위(恩威)가 병행되어 족히 써 민심을 수습하였음을 넉넉히 우러러 짐작할 수 있다.
 그러나 후세에 홀로 한스러운 병화의 피해를 몹시 치뤄 사적(史蹟)이 없어지고 유전한 것이 없으니 관직의 품계와 조정에 익찬(翼贊)한 공적이 고징할 길이 없음을 유감스러운 일이라 하지 않을 수 없었다. 연이나 태산의 높음을 우러러보고 가히 작은 언덕의 높이를 헤아릴 수 있으며 또 창해의 큰 것을 보고 작은 시내 물의 흐르는 도수를 가히 짐작할 수 있다. 이와 같이 공의 큰 덕의 저명한 것으로 소덕을 가히 추측할만하다.
 배(配)는 정부인(貞夫人) 연안이씨(延安李氏) 찬성사(贊成事) 식(湜)의 여(女)요 묘는 공의 분영(墳塋)과 같은 곳에 쌍분이다. 1(一)남을 두었으니 희량(希亮)이며 공조판서(工曹判書)요 2(二)녀는 한성부윤(漢城判尹) 조익(趙翊)에게 출가하였다. 판서(判書)의 자 후로(厚老)는 녹사(錄事)요 증현손 이하는 번연하여 다 기록하지 못하고 8(八)세손 귀성(貴成)이 임진란(壬辰亂)에 호성공신(扈聖功臣)으로 정략장군(定略將軍)에 승관(陞官)하고 그 제(弟) 한성(漢成)은 경학과 문장으로 일(ㅡ)세에 저명하였다. 명 왈(曰)

功存翊戴(공존익대) 왕업을 도운 공이 크다
化治藩臬(화치번얼) 치화(治化)는 삼도지방에 흡족하였네.
於乎丕顯(어호비현) 장하도다 큰 덕업이여
世臣偉烈(세신위열) 대대로 공훈이 위대하고 열열하였다.
爰最其大(원최기대) 이에 대략을 간추려서
恭銘于碣(공명우갈) 삼가 명하여 비에 새기노라.

  영가(永嘉) 후인(後人) 권상규(權相圭) 근찬(謹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