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초황공(鶴樵黃公) 송성기적비문(頌誠紀績碑文)
맹자(孟子)가 말씀하시길, 「천시는 지리만 못하고 지리는 인화만 못하다」하였음은
대개 정중대소의 차이를 말한 것이다. 세상만사가 덕을 쌓지 않고서는 성가할 수가
없나니 쌓은 것이 착하면 복과 경사가 자손에게 미친다 함이라. 불영이 이제
학초공(鶴樵公)의 가장을 보고 공의 선대(先代)가 경영함이 흡족함과 행의의 독실함이
이와 같았음을 알겠노라. 상고하건데 공의 휘는 병규(昞圭)요 자는 복여(復汝)니
자호(自號)를 학초(鶴樵)라 하였다.
오직 우리 황가(黃家)가 국내에 들어온 것은 중국(中國) 강하를 근원으로 한(漢)나라
건무(신라(新羅) 유리왕(儒理王) 5(五)년 서기 28(二十八)년) 때 유신 휘 낙(洛)이
교지에 사신(使臣)으로 가다가 풍랑을 만나 표류되어 신라시대 기성(箕城)(: 지금 평해)에
표착하여 비로소 동국에 들어왔는데 고려 때 태자 금오공(金吾公) 온인(溫仁)이 본관(本貫)을 얻은
할아버지시다. 4(四)대를 전하여 휘 용(𤨭)은 우리가 평해(平海)를 본관을 한 이후로
백(伯)중(仲)계(季) 3(三)파 중 계피(季派)의 파조(派祖)이니 벼슬이 삼중대광보극으로
시호(詩號)는 충경(忠敬)이요 3(三)대를 전하여 휘 천계(天繼)의 호는 잠재(潛齋)니
삼도관찰사(三道觀察使)다. 8(八)대를 전하여 휘 한성(漢成)의 호는 취적헌(取適軒)이니
경서와 사기를 널리 섭독하여 문학과 행검이 타인의 모범이 되셨다.
고조(高祖)의 휘는 태진(泰鎭)인데 호는 낙서(洛西)요 증조의 휘는 오원(五源)인데
호는 운파(雲破)며 통정(通政)이다. 조의 휘는 종철(宗哲)인데 호는 서산재(西山齋)요
참봉(參奉)이다. 고의 휘는 성구(成九)인데 종사랑(從仕郎)이고 비(妣)는 유인(儒人)
안동권씨(安東權氏) 사인 명진(明鎭)의 따님이다.
경자(庚子)(: 1900(一九○○))년 10(十)월 27(二十七)일에 공이 목현(木峴) 옛집에서 태어났으며
어릴 때부터 총명이 동류에 뛰어났으며 취학함에 문득 글자 뜻을 밝게 분별하고 사리를
잠자코 연구하였다. 이로부터 후일에 뜻을 가다듬고 성의를 다했기에 혜택이
후손에게 미쳤으니 이는 성현의 학문을 가르침에서 나온 것이니 진실로 일상생활이
착한 사람인데 선(善)을 행한 것을 알지 못한다는 것은 이상하지 않을까? 오직
취적헌공(取適軒公)의 착한 후손 학초공(鶴樵公)이 또한 그런 분이다. 더불어 고을
사림(士林) 총중에 태어나시어 법에 따르고 본받을 것이 선(善)으로 나아가고 사사로운
괴로움을 막으며 선세를 찬양하고 후손에게 알려주는 일에 거듭 감동되어 사모하는
것은 선조의 업에 성의를 다함이라.
그러나 대대로 전해오는 선조의 세업에 징빙할 곳 없고 문중에 의뢰할 곳도 없기에
맨손으로 헛되게 생각하기를 여러 해에 사모해 오던 빈터를 말로만 취적선조(取適先祖)의
정각이 절실하다 하면서 아직까지도 없음을 혼자서 한탄하나니 효제의
생각이 독실함은 천성인지라 삼종숙 윤구와 더불어 주의하고 서로 힘을 도와서 쇠잔한
문중을 개혁하려는 결정이니 우리 족인들이 목현(木峴)에 정거한지 이미 3백(三百)여년이란
오랜 세월이 지났으나 문중에 유집을 간행한 일이 없고 마을에 누대에 걸쳐
정각도 없으니 우리 족인들의 규범에 커다란 허물이 아닐 수 없다. 기운이 피곤하고
힘이 쇠잔하나 가장 먼저 해야 할 요결이라 하면서 경영한 일은 진실로 옛사람
완씨(阮氏) 숙질(: 완적(阮籍)과 조카 완함(阮咸))과 같은 훌륭함이 아니겠는가?
이에 풍수를 보여 정자로서 좋은 터를 택하고 문내(門內)의 수사 몽구(夢九)씨와
봉기(鳳起)씨가 성금을 많이 내어 춘궁기에도 불구하고 자금이 넉넉하였으며
수년만에 공사가 끝났으니 덩그렇고 경치가 아름다워서 목현(木峴)마을 촌양이
바뀌어진 것 같도다. 다음 유집을 간행하기 위하여 경향 각지 여러 대방가를 찾아다니며
문자를 얻어오자니 마음이 초조하고 고달픈 기상이 어떠하리요.
병일(昞泆) 제종은 거대한 축대를 쌓느라 손이 터지고 발을 다치는 고통을 무릅쓰고
완공함은 숭조이념이 남다름을 가히 짐작하고 남음이 있으랴. 그리하여 응기(應起)와
병운(昞雲) 등이 발의하여 학초공(鶴樵公)의 공을 후손에게 영세토록 남기기
위하여 돌을 다듬어 세우기로 합의하여 그 사유를 기록하려 하니 내가 어찌 용렬한
사람으로 말할 수 있으랴.
후일 문중이 번창하기를 기원하는 바이다.
1995(一九九五)년 기해(己亥) 3(三)월 청명절에
종후인 세섭 삼가 기록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