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방의 유학은 학문과 도의의 근간이니 퇴계선생은 이 사상을 더욱 넓혀 이었고 이 높은 이상을 그대로 실천 수범한 진정한 목민관이 있었으니 그가 바로 금계 황준량이시다. 선생의 본관은 평해이며, 자(字)는 중거(仲擧)요 금계(金溪)는 그의 호(號)이다. 선생은 1517년 음력 7월 지금의 영주시 풍기읍 서부리에서 부친 치(觶)와 모친 창원 황씨 사이에서 맏이로 태어났다. 도시조는 신라 때 처음으로 평해 땅에 들어온 학사공 황낙(黃洛)이다.
고려때 시 벼슬을 한 유중(裕中)이 먼 조상이고 그의 아들 검교(檢校) 진이 선생의 파조고가 된다. 진의 증손 근(瑾)은 예문관직제학이었고 그의 아들 유정(有定)은 조선에서 공조판서를 지내고 영주에 기거하였고 그의 아들인 연(鋋)은 훈도(訓導)로 처음 풍기로 옮겨오니 선생의 고조가 된다.
선생은 농암 이현보(李賢輔)의 손서(孫壻)요 벽오(碧梧) 이문량(李文樑)의 사위다. 선생은 어려서부터 재주가 뛰어나 기동(奇童)으로 불렸고 문명이 자자했다. 1537년 21세 때 생원시에 합격하고 1540년 24세 때 문과에 급제하여 성균관 박사 공조좌랑 병조좌랑 사헌부 지평 등을 역임했다. 1551년 35세에 외직으로 출사하니 오로지 백성을 위해 소임을 다하여 민폐를 일소하고 교육을 통해 유학 이념을 크게 선양하였다. 신녕현감으로 재직 중에는 굶주린 백성을 진휼하고 그 이전에 쌓인 부채를 절약과 긴축으로 메웠으며 부채 문권을 태워버림으로써 백성들의 부담을 덜어주었다. 또 향교의 문묘를 수축하고 백학서원(白鶴書院)을 창건했다.
단양군수 때는 장문으로 된 유명한 단양진폐소(丹陽陳弊疏)를 올려 백성들로 하여금 10년 동안 20여 가지의 공물을 면제 받게 하였고 단양향교를 이건 중수하였다. 성주 목사 재임 시에는 목민관으로서만 아니라 퇴계학파의 맏형이자 중심학자로서 연구와 책자 편찬에 큰 공을 세웠다. 그 대표적인 것이 퇴계선생이 편찬하여 조선 중기 이후 성리서(性理學)의 기본서로 애독됐던 주자서절요(朱子書節要) 열책의 간행이었다. 또 영봉서원(迎峰書院)을 중수하고 향교의 문묘를 수리하였으며, 공곡서당(孔谷書堂)과 팔거현에 鹿峰精舍를 세워 지방교육에 심혈을 기우렸다 만년에 벼슬살이를 벗어나 고향인 소백산 아래 금수에 정사를 지어 심신을 수양하며 학문을 강론하고자 하였으나 그 뜻을 이루지 못하고 1563년 음 3월 병마로 47세에 별세하였다.
퇴계선생은 그의 명정에 선생(先生)이라고 쓸 정도로 예우하였으며 또한 먼저 떠난 제자의 죽음 앞에 망연자실하여 조금이나마 애통함을 덜고자 직접 행장(行狀)을 쓰고 두 차례의 제문을 지어 그의 일생이 예사롭지 않았음을 증언하고 망우(亡友)라 칭하며 위로했다. 그리고 그의 학문과 문학이 뛰어나고 소중하여 세상에 널리 알리고자 손수 시문을 교열하고 문집의 편차를 정하여 간행을 서둘렀다. 또한 제자가 만년에 못다 이룬 금양정사를 관리할 승려의 부역을 면제해주고 정사(精舍)를 안전하게 수호케 하였다. 참으로 아름다운 사제간의 사랑이요 곡진한 학문적 동지가 아닌가.
그는 문과에 급제한 이후 생의 반을 관직에 종사하면서 주로 지방관으로서 오로지 백성들을 위한 선정과 서원 창건 등 교육을 강화한 것은 유학의 이념을 실현하고 나아가 스승 퇴계의 가르침을 현실정치에 실천한 것이다. 그가 운명한 날 20여 년의 벼슬살이에도 시신을 염습할 수의조차 없었으니 진정한 선비의 청빈을 몸소 보여 주었다. 이제 금계선생 탄생 500주년을 맞아 후손들 이 비석을 세워 선생을 추모하고 후대에 기리고자 함에 선생의 학덕과 사적을 기술하고 짧은 송사를 지어 추모의 글을 올린다.
아 소백산 우뚝하고
금계수 도도히 흐르는 곳
그의 향기 이 비석과 함께
영원토록 우러러 뵈이리라
도산서원(陶山書院) 원장(院長) 김녕(金寧) 김병일(金炳日) 삼가 짓고
금계손생(錦溪先生) 16대손(十六代孫) 재국(在國) 삼가 쓰고
2017(二○一七)년 7(七)월
금계선생탄신500주년기념사업회(錦溪先生誕辰五○○周年記念事業會)
평해황씨검교공파금계종회(平海黃氏檢校公派錦溪宗會) 세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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