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은황공행장1)
황씨의 관은 평해(平海)니 신라로부터 났으며 근학사 락(洛)이 그 시조이다.
본조(조선조)에 휘 희석(希碩)은 개국공신으로 부원군에 봉을 받고
시호는 양무(襄武)이시다. 이로부터 벼슬을 서로 이어왔다.
중세 휘는 덕필(德弼) 호는 영이(詠而)며, 처음으로 청부(청송)에 살았고,
아들의 휘는 원조(元兆)며 호는 수암(羞菴)이며 공의 5세 이상이라.
고조는 채문이며 증사정이며, 증조는 창대며 증참찬이며,
조는 희종이며 증호판이며, 아버지는 재곤이며 수승(壽陞) 중추(中樞)이며, 어머니는 은진송씨 병섭의 따님이다.
철종 임술(壬戌)2)
3월 모갑에 공이 청운리재3)서 났으니,
휘는 응석(應錫)4)이요, 자는 효약(孝若)이며,
형과 동생 둘이었다. 기품이 순박하고 재성이 관후하고 어려서
만은(萬隱) 백공(큰아버지)에 글을 배워서 일찍이 의방(義方)을 알았다.
부모에게 효도를 돈독히 하고 부모의 곁을 떠나지 않으며
오직 부모의 뜻을 즐겁게 하였으며 하루 할 일을 매일 하루 같이
고하는 것을 조금도 게을리하지 아니하고, 부드러운 빛으로 순하고
황홀한 모습을 하고 부드러운 목소리로 조용하게 말씀을 올리니
하늘이 내린 군자라 아니하지 못하리라.
과농(課農)을 하고 여가가 있으면 부모에게 드릴 음식을 준비하고
하늘의 이치를 따라 땅으로 인한 이 일의 비결을 성취하여 좌우에게
저축은 있으되 낭비는 없음을 가르쳤다.
잠깐 강(江)에 가서 고기를 잡아 찬장에 반찬을 갖추어 놓고,
잠깐 산에 가서 땔나무를 하여서 방이 따스하도록 불을 지피고,
날로 모으고 달로 저축하여 해마다 모았고,
새벽과 밤의 받듬과 조석으로 갖춤(음식)을 몸소 모든 것을 살펴
조금도 실수가 없었다. 비록 방을 따로 거처하나 밥은 능히 먼저
입에 넣지 아니하며, 새 옷은 몸에 먼저 입지 아니하며,
집에 베틀을 놓아 베를 짜고, 들에서 나오는 물건과 솥에서
만드는 음식(떡)을 한 번도 감히 미리 맛보지를 아니하고
이웃에서 들어온 음식과 친척들이 보내온 예물과 시장에 나는
진귀한 음식은 반드시 부모에게 드리고, 남은 것은 두었다가
대접을 하며 스스로 사람들에게 믿음을 보이고,
그 형제 간에 서로 한 곳에 살며, 한 농장을 지어도 원망이 없고
거짓말을 하는 일이 없어, 반드시 의론을 물어 뜻을 이루고,
같은 반찬을 같이 먹고 시종 한 번도 효도하고 공경함을 어긴 바가 없었다.
그 옛적이나 지금이나 어진 자와 효자제와 가언과 선행을 들은즉
기록함은 지나온 자취를 잊지 않으려고 하는 것인데 말로 지음이 있음이라.
효제(孝悌)가 아니면 입으로 행하지 말 것이며, 효제가 아니면
추서(덤비는 것)를 아니 하는 것이 그 본연일 것이다.
하늘은 그 양지(良知)를 알 것이니 그 양능(良能)을 행하고
만물을 평승(平繩)케하고 사물의 근본을 바로 잡는다면 삼백 고을의
수 천명의 어른과 아이들이 모두 말하기를 효자라 칭할 것이로다.
공의 나이 겨우 수 십세 때 임진년(壬辰年)5)에
모부인(어머니) 상을 당하여 달이 넘도록 산지(장지)를 구하였으나
모실 자리를 정하지 못하였다. 지사(地師 : 풍수)에 청해 가로되
길지는 적선한 사람이 얻는 바라 나와 같은 상주는
다만 어머니의 체백(體魄)이 편한 곳이면 쓰겠노라 하였다.
그 때에 그 자리에 같이 있던 지사가 그 말에 감격하고
그 정성에 격렬하여 마음대로 못하고 뜻을 결정하여
산을 밟은 오랫동안에 정성을 다하여 부지런히 찾고 있었는데,
해가 정오 때에 까마귀가 그 상주를 조문하듯이 아아 울면서
길조를 고하는 것 같았다. 지사가 그 까마귀가 괴이하게 생각되어
그 날아내린 곳을 가서 보니 가히 지비(地秘)의 혈당(穴瞠)이라.
그러나 날마다 내가 많은 곳을 점혈을 하여 왔는데 비로소
이에 자리가 있었음을 보는구나. 하늘이 반드시 이 사람의 몸이 병중에
있는 중에 그 정성을 살피고 신(神)으로 하여금 이곳에 이르도록 한 것이
그 밝게 증험을 보인 것이로다. 그 양례일 산역을 하는 사람들과
조상 빙우들이 열복(기뻐함) 아니 하는 이가 없었고 그 정실을 표할려고
할 때에 대인공(아버지)이 그 위치에 있다가 말려 가로되
대개 까마귀는 울면서 즐기는 것인데 효(孝)라함은 떳떳하지 못하도다.
어찌 이 자식의 소이라 가르치리요. 성론(盛論)은 곧 나를 위함이며
또한 나의 아이들에게도 옳지 않은 일이라. 진실로 또한 가정의 예법을
반드시 옛과 같이 이어 가리라 하였다.
듣건데 세칭 황처사는 만취(晩翠) 황학(黃㶅)선생6)이
방선(方先)이라. 탄식하도다 저 청중유황(푸른 가운데 누른 빛이 있다)이라 하더니
어찌 이 옹(翁)의 덕의 비롯함이 아니랴.
상을 면한 후 3년 후 그 대인공(아버지)의 상을 당하여
더욱 슬픔을 참지 못하여 죽음에 이르게 되어도 쉬지 아니하였다.
입으로 세 번 묻는 삼문의 절차가 있으니 가로되 편안한 즉
기쁨을 얼굴에 나타내고 그렇지 아니하면 근심을 몸으로 번민하여
밤에는 하늘에 빌고 낮에는 산에 빌어 내몸이 아픔을 대신하여
달라고 청하고 대소변을 치우는데 정성을 다했으며 반드시
그 평상시와 같이 깨끗이 하는데 정성을 다하는 것이 사람의 자식의
당연한 도리이나 세덕이 날로 퇴폐해서 많은 사람 중에 이같은 사람은
흔하지 않은 지가 오래 되었도다. 그 능히 힘쓰고 애쓰는 것이 거룩하지 아니하랴.
그 후 6년 정유(丁酉)7)에
아버지의 상을 당하였다. 그 전일 어버이의 병의 차도가 조금
좋아지는 것 같아서 공이 쌀을 씻으러 동문 밖에 이르렀을 때
집의 개가 갑자기 짖으면서 흉보를 전하였고 하늘이 이 사람으로 하여금
이미 평이지간(平易之間)에 있지 못하시니 어찌 그 정력이 다한 처지라
그 민극(閔極)함을 보리요. 대렴을 마친 후 부형들과 모든 친척들이
성복을 이룬 후 방향으로 관아에 올릴 의론을 하므로 공이 흔연히 돌아보고
하는 말이 전상(前喪)의 때는 나의 대인의 말씀을 귀담아 들었는데
이제 또 대인의 상에 또 이 의론을 발설함은 나를 위함이며
나의 어버이도 기뻐하지 않으려니 옛 법도를 또한 이어 받으리라.
가장(家狀)을 지은 자 만은(萬隱)공은 공의 백강(큰아버지)이다.
아아 슬프도다. 이에 형이 있고 이에 아우가 있으니
어찌 공의 집의 법도의 창작이 아니리요. 그후 예성(禮成)을
유감없이 마치고 공 자신이 농사에 힘을 다하고 운산(雲山)의
속에 자취를 감춘 고로 가은(稼隱)이라 호를 하였다.
경술(庚戌)8)
3월에 병으로 세상에 삶을 마치니 향년이 49세라.
남아촌 세곡 임향원에 장사지내니 배 파평윤씨 통정대부(通政大夫)
광종의 따님과 합봉을 했다.
아들은 덕윤(悳潤)과 도윤(道潤)이며, 딸은 임영락, 임재현에 출가시켰다.
덕윤에 4남 1녀가 있으니 관모, 복모, 간모, 항모, 딸은 어리다.
도윤에 3남이 있으니 동모, 서모, 남모이며, 다음은 어려서 기록하지 않는다.
오호라 공은 너그럽고 순박한 모습으로 양지로 훌륭함을 스스로 이루었음이라.
백행의 근원으로 유시유종(처음부터 끝까지) 효성이 한결같아서 하늘이 감동하여
사물을 격동시킨 소이에 이르렀다. 일용의 일을 부모에게 물어서
행하는 것을 볼진대 효가 없이 어찌 유가의 모범이 될 수 있으며
또한 어찌 근본이 없이 능히 이와 같이 되리요.
공이 세상을 떠난 후 30여 년이 되어 가장과 포창(褒彰)9),
계첩서문, 묘갈명(墓碣銘) 등의 문서를 수년간 편성하여 이에 이르렀음이라.
충후한 덕을 마을에 펴고 인과 효를 가정에 베풀어 위로 수제와 서추(西樞)를 두고
은혜와 영화는 천양(저승)에 가득 차서 아래로 경사가 후곤(後昆)에 흘러서
자손이 뜰에 가득 찼으니 하늘이 내린 선인(善人)이 아니겠는가.
공의 장자 덕윤군이 감모(感慕)의 정성을 여러 번 나에게 청하는지라
서차의 일을 사양하였으니 얻지 못하고 이에 유사를 안을 하여
위와 같이 기록하여 효자의 청에 답하노라.
갑술(甲戌)10)
수요절(秀葽節)
완산(完山) 류동기(柳東夔)11)
근서
전(前) 청송문화원 원장 심명택(沈明澤) 번역
가은공 5세 주손(胄孫), 한국기술혁신학회 회장 황병상(黃昞相) 교정, 각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