완문(完文)
오른쪽의 완문(完文)을 발급(發給)한 것은 본군(本郡) 유학(幼學)1)
황순구(黃錞九), 황재연(黃在淵), 황정(黃瀞) 등(等)이 연명(聯名)으로 올린 것인데 장계내용(狀啓內容)에 보면 선조(先祖)인 한(漢)나라 학사공(學士公)은 광무황제(光武皇帝) 건무4년(建武4年)(=서기 28년)에 구대림(丘大林) 장군(將軍)과 같이 동국(東國)으로 와서 본군(本郡) 평해(平海) 월송리(月松里)에 살았으니 조선팔도(朝鮮八道)2)
황씨(黃氏)의 시조(始祖)이시다.
누차 난리를 겪어서 묘소(墓所)를 실전(失傳)했으므로 유허지(遺墟地)에다가 설단(設壇)을 해서 비석(碑石)을 세워놓고 해마다 시월중정일(十月中丁日)에 향(香)을 피우고 제사(祭祀)를 지낸 것이 이미 몇 백년이 되었고 또 다행히 모래사장 해안(海岸)에 소나무가 울창해서 설단(設壇)한 정각(亭閣)과 원장(垣墻)이 풍우(風雨)를 막아서 여러 해 동안 무너지는 근심이 없었는데 근년(近年)에 와서 점차 나무꾼들의 침범(侵犯)으로 다 베어가고 설단(設壇)만 남았는데, 설단(設壇)을 보호(保護)하는 방법(方法)은 오직 소나무가 울창하게 있어야하나 지금은 그 형태(形態)를 어쩔 수 없도다. 그러나 유허지(遺墟地) 전후좌우(前後左右)로 경계(境界)를 정해서 송추(松楸)를 보호(保護)하고 풍우(風雨) 피해(被害)의 근심을 막고 또 완문(完文)을 작성(作成)해주니 누대(累代)를 내려온 후손(後孫)들로 하여금 옛날의 유지(遺址)를 회복(回復)해서 선단(先壇)을 보호(保護)하도록 정(定)할 것이고 지금 구지(舊地)를 회복(回復)하고 선단(先壇)을 보전(保全)하도록 한 의리(義理)가 심히 가상하므로 별도로 향리(鄕吏)를 보내어 경계(境界)를 정(定)해 주도록 한다.
네곳의 표시(表示)는 동(東)쪽으로 논 끝 모래언덕까지이고, 남(南)쪽으로는 달효(達孝)3)
소나무 까지가 경계境界이고, 서(西)쪽으로는 대로변까지이고, 북(北)쪽으로는 굴미봉(窟尾峯)까지이니 여기가 과연 학사공(學士公) 유허지(遺墟地)인 것이 감동이 되어 별다른 방책(方策)이 없으므로 송추(松楸) 가까이 사는 백성(百姓)들을 엄중히 경계(境界)할 것이고, 지금 영(令)을 전(傳)한 후(後)에도 또 이러한 일이 있으면 완문(完文)을 발급해 줄 것이니 자손(子孫) 중에 근실(勤實)한 자 몇 사람을 정(定)해서 밤낮으로 수호(守護)하도록 해서 베어가는 폐단(弊端)이 없도록 할 것이고 만약 비밀리에 베어가는 자(者)는 관가(官家)에 고발(告發)해서 특별히 엄중(嚴重)하게 다스리고 계속해서 유허지(遺墟地)를 보존(保存)하도록 하고 혹시라도 수호(守護)를 게을리 함이 없도록 하며 단직(壇直)이나 송직(松直) 이 두 사람은 세금(稅金)이나 부역(負役)을 일체(一切) 감면(減免)해 줌이 마땅하다.
갑신(甲申)(=1884년) 윤(閏)5월 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