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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종인족보서(同宗人族譜序)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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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同宗人族譜序
古者族必有譜譜者譜其族之源派也譜必有序序者序其 譜之顚末也吾東方表表巨姓莫不有譜有序譜序之於吾 東亦古也吾黃氏出於平海舊爲國著姓而獨於譜與序閥 焉爲子孫者僅不失宗系世次而至於旁枝遠派則無所考 而識焉自吾始祖檢校公仁溫以後連五代皆有官職而位 望顯於世又其下四代亦皆擢文科登顯仕而明公鉅卿前 後相望爾時未經無一家相傳之譜而中年屢經亂離舊家 靑氊蕩失於兵燹流𥦻之中其序譜之亡失而無傳無足怪 也吾宗人之所痛恨其有亡乎吾再從兄黃燖晦叔甫慨然 於斯志欲修緝族系以幸其終不至於珉珉也乃轉借他譜 之連派者而傳寫之尋問古老之流傳者而附錄之至於往 尋籍卿遍訪姓族聞其所未聞見其所未見於是自源而究 其派由根而達乎枝分䟽代系合爲一卷自吾九代祖判書 公有定以上世代荒邈文籍無徵故只錄其世次職名而事 跡之載國乘者文章之膾人口者隨聞見剳爲別錄以弁于 卷首自八代祖詮以下則其內外根派特記之詳焉卷秩雖 不多而旁近六七邑表表名族盖莫非吾祖先之苗裔而散 處他道遠邑亦多噫吾祖先積德毓慶之流及於無窮者亦 可想見於此矣去年秋晦叔兄袖此一部來示余且曰吾之 於此譜留念非不久致力非不勤矣而耳目不廣緝錄甚尠 誠可恨也然若使吾宗人及爲吾子孫者不替其事繼而修 之則或可由此而成完譜矣此豈非吾與子之所共勉也子 其爲一語以序之余辭不獲謹頷之退則鄭重而不敢下筆 已十有餘朔矣兄之懇至再至三而不已則亦不敢終以不 文辭於是乎謹序其成譜之顛末書之卷尾以歸之遂膽寫 一本莊于家且念先世累代墳塋未能皆有表誌深恐久遠 之後子孫有不識其某祖某位塋故謹列其墓山之名號地 面及坐向蓐次錄于後以備吾子孫之取覽云
  丙申閏五月既望族末成均典籍黃中衍謹序


같은 종인의 족보 서문(同宗人族譜序)
 옛날에는 씨족에는 반드시 족보가 있었으니, 족보란 그 씨족의 근원과 갈래를 기록한 것이다. 족보에는 반드시 서문이 있었으니, 서문이란 그 족보가 이루어진 전말을 서술한 것이다. 우리 동방의 이름난 큰 성씨들은 족보와 서문이 없는 경우가 없었으니, 족보와 서문의 전통이 우리나라에서도 오래되었다.
 우리 황씨는 평해에서 나와 예로부터 나라의 저명한 성씨였으나, 유독 족보와 서문만은 빠져 있었다. 자손 된 자들이 겨우 종계(宗系)의 세차(世次)만 잃지 않았을 뿐, 방계와 먼 갈래에 이르러서는 상고하여 알 길이 없었다.
 우리 시조 검교공(檢校公) 인온(仁溫)1) 이후로 연이어 5대가 모두 관직에 있어 지위와 명망이 세상에 뛰어났고, 또 그 아래 4대도 모두 문과에 급제하여 현달한 벼슬에 올라 명공(明公)과 거경(鉅卿)이 앞뒤로 이어졌다. 그러나 그때까지 한 집안에 전해 오는 족보가 마련되지 못했고, 그 와중에 여러 차례 난리를 겪으면서 옛집의 청전(靑氈, 대대로 전해 오던 가보)이 병화 속에 흩어져 사라졌다. 유리(流離)하는 가운데 그 서문과 족보가 없어져 전하지 못한 것은 이상할 것이 없으나, 우리 종인(宗人)들이 통한스럽게 여기지 않을 수 있겠는가.
 나의 재종형(再從兄) 황심(黃燖) 회숙(晦叔)2) 어른께서 이를 개연히 여기시어, 족계(族系)를 수집(修緝)하여 마침내 민민(泯泯)히 사라지지 않도록 하겠다는 뜻을 두셨다. 이에 다른 문중의 족보 가운데 우리와 연결되는 갈래를 빌려 옮겨 적고, 옛 노인들에게 전해 오는 이야기를 물어 부록으로 실었다. 나아가 여러 문적을 찾아다니고 성족(姓族)을 두루 방문하여, 듣지 못했던 것을 듣고 보지 못했던 것을 보았다. 이에 근원으로부터 그 갈래를 궁구하고 뿌리로부터 가지에 이르기까지, 대(代)의 계통을 나누어 정리하여 한 권으로 합쳤다.
 우리 9대조 판서공(判書公) 유정(有定) 이상은 세대가 아득하고 문헌으로 증빙할 것이 없으므로, 다만 그 세차와 직명만을 기록하였다. 국사(國乘)에 실린 사적과 사람들 입에 회자되는 문장은 듣고 본 대로 차록(剳錄)하여 별록(別錄)으로 만들어 권두에 실었다. 8대조 전(詮) 이하로는 그 내외 근파(根派)를 특히 상세히 기록하였다. 권질(卷帙)은 비록 많지 않으나, 가까운 예닐곱 고을의 이름난 성족들이 대개 우리 조상의 후예 아님이 없고, 다른 도의 먼 고을에 흩어져 사는 이도 많으니, 아! 우리 조상께서 덕을 쌓고 경사를 기르신 여경(餘慶)이 무궁함에 미친 것을 또한 이에서 상상해 볼 수 있다.
 지난해 가을 회숙형께서 이 한 부를 소매에 넣고 오셔서 나에게 보이시며 말씀하시기를, “내가 이 족보에 마음을 둔 지 오래지 않은 것이 아니요, 힘을 쏟은 것이 부지런하지 않은 것이 아니로되, 견문이 넓지 못하여 수집하여 기록한 바가 매우 적으니 참으로 한스럽다. 그러나 만일 우리 종인들과 우리 자손 된 자들로 하여금 이 일을 폐하지 않고 이어서 닦게 한다면, 혹 이로 말미암아 완전한 족보를 이룰 수 있을 것이다. 이 어찌 나와 그대가 함께 힘쓸 바가 아니겠는가. 그대는 한마디 말을 지어 서문을 써 주게” 하셨다.
 내가 사양하지 못하고 삼가 응낙하였으나, 물러나서는 정중히 여겨 감히 붓을 대지 못한 지 이미 열 달 남짓이 되었다. 형의 간청이 두 번 세 번에 이르러 그치지 않으시니, 나 또한 끝내 문장이 부족하다는 이유로 사양하지 못하였다. 이에 삼가 이 족보가 이루어진 전말을 서술하여 권말에 적어 돌려드리고, 마침내 한 본을 등사하여 집에 소중히 보관하였다.
 또 생각건대 선대 여러 대의 분영(墳塋, 묘소)에 아직 모두 표지(表誌)를 세우지 못하여, 오랜 세월이 지난 뒤 자손들이 어느 조상 어느 묘인지 알지 못할까 깊이 염려되었다. 그러므로 삼가 그 묘산(墓山)의 명칭과 소재지 및 좌향(坐向)과 차례를 열거하여 뒤에 기록해서, 우리 자손들이 참고하여 열람하는 데에 대비하고자 한다.
  병신년(1611sus) 윤5월 기망(旣望, 16일) 족말(族末) 성균전적(成均典籍) 황중연 삼가 씀.
  (Claude 번역, Sonnet5, 2026/07/12)

1)
금오공 온인(溫仁)을 선조로 확립한 것은 경인보(1770년) 부터임
2)
17世, 父 선갑(善甲)의 2子, 字晦叔 丙午生 墓直長公墓右 艮坐 配順興安氏 墓雙封 父 璐
0-003.1783814786.txt.gz · 마지막으로 수정됨: 2026/07/12 09:06 저자 ssio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