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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해황공휘지장묘비문(平海黃公諱之璋墓碑文)
평해황공 휘 지장 묘비문
선생(先生)의 휘(諱)는 지장(之璋)이시니 초명(初名)은 천수(天守)요 호(號)는 봉란(鳳卵)이시다. 우리 황씨(黃氏)는 평해(平海)로 관향(貫鄉)을
삼으니 시조(始祖)는 유신(儒臣) 휘(諱) 낙(洛)이요 여러 대(代)를 전(傳)하여 휘(諱) 온인(溫仁)은 금오장군(金吾將軍)이시니 공(公)에게 13대조(十三代祖)가
되시고 3대(三代)를 전(傳)하여 휘(諱) 진(璡)은 검교군기감(檢校軍器監)이요 3대(三代)를 전(傳)하여 휘(諱) 근(瑾)은 예문관(藝文館) 직제학(直提學)이요 이분이
휘(諱) 유정(有定)을 낳으시니 공조판서(工曹判書)요 이분이 휘(諱) 연(鋋)을 낳으시니 순흥(順興) 훈도(訓導)요 영주(榮州)에서 처음으로
풍기(豊基)에 거주(居住)하시니 곧 선생(先生)의 5대조(五代祖)이시다. 고조(高祖)는 휘(諱) 말손(末孫)이시니 사온서(司醞署) 주부(主簿)요 증조(曾祖)는
휘(諱) 효동(孝仝)이시니 순릉(順陵) 참봉(參奉)이요 조(祖)는 휘(諱) 치(觶)이시니 의릉(義陵) 참봉(參奉)이요 고(考)는 휘(諱) 준량(俊良)이요 호(號)는 금계(錦溪)이시니
퇴계(退溪) 선생(先生)의 문하(門下)에서 수업(受業)하시어 학행(學行)으로 나타나시었고 관직(官職)은 성주목사(星州牧使)에 그치셨으며
조졸(早卒)하시니 퇴계 선생(先生)께서 심(甚)히 애석(哀惜)히 여기시어 손수 관(棺) 상(上)에 쓰시기를 '오호망우금계황선생(嗚呼亡友錦溪黃先生)'
이라 하시고 이어서 묘갈(墓碣)의 전면(前面)을 쓰시고 유고(遺稿)를 간행(刊行)하시고 행장(行狀)을 찬(撰)하시었으며 후일(後日)에 가선대부(嘉善大夫) 이조참판(吏曹參判)에 추증(追贈)되시었다. 어머니는 증(贈) 정부인(貞夫人) 영천이씨(永川李氏)이시니 찰방(祭訪) 문량(文樑)의 여(女)요
농암(聾巖) 선생(先生) 휘(諱) 현보(賢輔)의 손녀(孫女)이시다. 선생(先生)은 명종(明宗) 19년(十九年)(1564(一五六四)) 갑자(甲子)로 풍기읍(豊基邑) 욱금리(郁錦里)에서
살으시었다. 그런데 선고(先考) 공(公)께서 기세(棄世)하실 때에는 슬하(膝下)에 무육(无育)이셨으므로 서둘러 계씨(季氏) 수량(秀良)의
장자(長子) 지환(之瑍)을 취(取)하여 후사(後嗣)로 삼았었다. 그런데 그후 9개월(九個月)만에 유복자(遺腹子)로 선생(先生)이 출생(出生)하시었다.
초명(初名)을 천수(天守)라 한 것은 외조부(外祖父) 찰방(察訪) 공(公)께서 지으신 것이니 하늘에 힘입어 지킴이 있게
되었다는 뜻을 취한 것이라 한다. 기사년(己巳年)(1569(一五六九))에 六歲의 兒童으로 陶山汾川里의 外家宅을
찾아갔었는데 外祖父께서 데리고 矜九堂에 가서 退溪先生을 謁見케 하신대 先生이 한번
보시고 奇異하게 여겨 사랑하시었므로 드디어 禮物을 올리어 經傳과 史書를 배우고 兼하여
科舉工夫를 다스리시었다.그러나 時代를 잘못 만난지라 壬辰倭亂으로 인하여 拋棄하고
다스리지 않았고 門蔭으로 通德郞의 位階에 오르시었으며 그후에 醴泉邑 風洞으로 移居하시어
鳳洞系의 入鄉祖가 되시었다.얼마 후에 同宗인 海月公汝一先生과 中立公 두 분이 先後하여
잇달아 이 고을의 守令으로 來臨하게 되었다.그러므로 先生께서 盡心協贊하여 그의 治政에
功이 있으시었다.
先生께서는 恒常 讀書와 窮理로 學問하는 根本으로 삼으시고 不欺와 慎獨으로 行實을
制御하는 準則으로 삼으시어 庭訓을 따르기에 힘쓰셨으니 이에 一鄉의 師表가 되시었다.
仁祖五年(一六二七)丁卯 十二月二十七日에 別世하시니 享年 六十四이셨고 醴泉邑 淸福
二里 山六〇의 一番地 祢屹味 巽坐原에 葬禮를 모시었다。配는 恭人 安東權氏이시니 諱斗
文의 女이시다.
生年은 未詳이요 仁祖十年(一六三二〇三月七日에 別世하여 先生의 墓 同原에 樹葬하였다.
모두 三男을 두시니 長男은 崇이니 宣務郞으로 大丘判官에 壽職同知中樞요 다음은 岌이요
다음은 嶪이니 通訓大夫이다。同知는 安東權氏를 娶妻하였으니 貞夫人이었고 泰亨을 낳았으며,
岌은 仁同張氏 娶妻하여 澤亨을 낳았고 通訓은 坡平尹氏를 娶妻하여 觀亨을 낳았다.
曾玄以下는 記載하지 않는다. 그런데 二千餘 子孫들이 醴泉 및 各處에 分布되어 居住하고
있으니 이것은 어찌 先生께서 누리지 못한 報答이 後世에 나타남이 이니겠는가! 墓所에
옛날에는 顯刻이 없었다. 그러므로 여러 子孫들이 이를 걱정한 지 오래되었는데, 이번에 온
宗親들이 計謨를 合하고 財物을 모아 墓所를 修飾하여 드리기로 하였다.諸宗들이 不肖에게
碑陰에 記錄할 글월을 지어라 하시기로 義理上 敢히 사양할 수 없으므로 삼가 譜牒을 詳
考하고 傳해오는 文字를 參酌하여 簡略하게 叙述하기를 右와 같이 하는 바이다.
1879(一八七九)년 5(五)월 일
후손 후표(厚杓) 짖고
후손 중성(仲成) 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