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이전 판입니다!
욱양단소이건기(郁陽壇所移建記)
욱양단소 이건기(郁陽壇所移建記)
금(今) 욱양단소(郁陽壇所)는 옛 욱양서원(郁陽書院)으로 처음에는
풍기읍(豊基邑) 욱금리(郁錦里)에 있었는데 이는 현종(顯宗) 3년(三年) 서기(西紀)
1663년(一六六三年) 임인(壬寅)에 창건(創建)하여 퇴계(退溪) 이황(李滉) 선생(先生)을 봉안(奉安) 제향(祭享)하여 왔는데 숙종(肅宗) 16년(十六年) 서기(西紀) 1690년(一六九○年)
경오(庚午)에 퇴계(退溪) 문중(門中)에서도 그 고매(高邁)한 학덕(學德)으로 사군(師君)의 배향(配享)을 해옴을 가상(嘉尚)하게 여겨 우리 금계(錦溪) 선조(先祖)도 함께 배향(配享)하여 인재(人材)를 양성(養成)해오던 전당(殿堂)이 되었다.
그 후(後) 대원군(大院君) 집정(執政) 무렵인 고종(高宗) 5년(五年) 서기(西紀) 1868녅(一八六八年) 무진(戊辰)에 국령(國令)으로 철폐(撤廢)되어 욱양단소(郁陽壇所)로
명칭(名稱)을 바꾸어 다시 종전(從前)대로 제향(祭享)을 받들어 왔는데 또 화재(火災)로 묘우(廟宇)가 소실(燒失)되고 강당(講堂)과
재실(齋室)만 남아 십수년간(十數年間) 향사(享祀)를 치르지 못한 바 모든 백성(百姓)의 사표(師表)가 되는 이 두분 선생(先生)의 향례(享禮)는 폐향(廢享)할 수 없다는 사림(士林)들의 건의(建議)로 강당(講堂) 윗편에 제단(祭壇)을 설립(設立)하고 향사(享祀)를 다시 치러
왔으나 서기(西紀) 1950년(一九五○年) 경인(庚寅)에 625동란(六二五動亂)으로 전략상(戰略上) 욱금(郁錦)마을이 소개(疏開)되어 그 이듬해 천신만고(千辛萬若) 끝에 복구(復舊)는 되었으나 서기(西紀) 1983년(一九八三年) 계해(癸亥)에 또다시 저수지(貯水池) 축조(築造)로 욱금(郁錦)마을이 수난(受難)을
당(當)해 우리 황씨문중(黃氏門中)의 3백여년(三百餘年)의 세거(世居) 터전이 물 속에 잠기게 되어 부득이)不得已) 단소(壇所)를 이건(移建)하게 되었다.
이 사안(事案)으로 여러 차례의 문회(門會)와 유림회의(儒林會議)를 거쳐 서기(西紀) 1990년(一九九○年) 경오(庚午) 5월(五月) 15일(十五日) 종중(宗中)
및 유림(儒林) 연석회의(連席會議)를 하여 금양정사(錦陽精舍) 경내(境内)로 이건(移建)하기로 결의(決議)하여 추진(推進)은 하였으나 먼저 앞서는
문제(問題)가 재력(財力) 관계(關係)로서 백동(白洞)의 황윤규(黃潤圭)씨(氏)께서 우선(于先) 정부(政府)의 보조금(補助金)을 요구(要求)하자는 안(案)을 제의(提議)하자
황필상(黃弼相), 서정학(徐庭學)씨(氏)가 찬동(贊同)하여 이에 활약(活躍) 중(中) 그때 마침 종인(宗人) 황해윤(黃海潤)이 영풍(榮豐) 부군수(副郡守)로 재임(在任) 중(中)에 있어 같이 합세(合勢)하여 거금(巨金) 2천만(二千萬)원을 받았으며 이어 문회(門會)를 열어 병욱(柄旭), 원섭(元燮), 영봉(永鳳), 천섭(天燮) 등(等)이 적극(積極) 노력(努力)하여 뜻 있는 많은 분들의 후의(厚意)의 성금(誠金)이 1억2천만(一億二千萬)원이 마련되므로 서둘러 정사(精舍)옆에 단소(壇所) 기공(起工) 역사(役事)를 서기(西紀) 1991년(一九九一年) 신미(辛未)에 착공(着工)하여 퇴계(退溪) 선생(先生)과 금계(錦溪) 선생(先祖) 양위(兩位)의
제단비(祭壇碑)를 세우고 정문(正門)과 원장(垣墻)을 쌓아 만(滿) 2년(二年)만인 서기(西紀) 1993년(一九九三年) 계유(癸酉)에 준공(竣工)되었다.
이 뜻깊은 사업(事業)에 물심양면(物心兩面)으로 협조(協助)해 주시고 한결같은 성원(聲援)을 보내주신 모든 분들에게
충심(衷心)으로 감사(感謝)와 경의(敬意)를 표(表)해 마지 않는 바이다.
그리하여 그해 9월(九月)에 설단(設壇) 고일(告由)를 거행(擧行)함에 있어 도내(道内) 3백여(三百餘) 유림(儒林)이 참석(叅席)하여 성황리(盛況裡)에
마치었다. 이 단소(壇所)의 위치(位置)를 살펴보면 학식(學識)과 덕망(德望)이 높으신 금계(錦溪) 선조(先祖)의 수도지(修道地)로서 이 유서(由緒) 깊은 금양정사(錦陽精舍)의 옆으로서 뒤로는 농암산(籠岩山)자락이 아담하게 휘돌아 감아 양명(陽明)하기를 이를데
없으며 앞은 금계(錦溪) 선조(先祖)의 빛나는 업적(業蹟)을 말해주듯 수백년(數百年) 묵은 송림(松林)이 울창(鬱蒼)하고 기암괴석(奇岩怪石)이
즐비하여 사시(四時)에 옥(玉)이 굴러가는 듯한 계곡의 물소리가 들려오는 절경(絶景) 금선정(錦仙亭)을 굽어보는
참으로 아름다운 명승(名勝) 중(中)의 명승지(名勝地)이다.
이러한 이 금양정사(錦陽精舍)는 금계(錦溪) 선조(先祖)께서 은퇴(隱退) 후(後) 평소(平素) 소장(所藏)하고 계시던 서적(書籍)을 비치(備置)하고 후생(後生)을
강도(講道)하는 곳으로 마련된 곳이다.
그럼에도 불구(不拘)하고 초창기(草創期) 한때 정사(精舍)의 수호(守護)가 어려움에 처(處)한 것을 퇴계(退溪) 선생(先生)께서 알고
이 고을 수령(守令)에게 통문(通文)을 보내 일절(一切) 잡역(雜役)을 면제(免除)하도록 당부하여 그 당시(當時) 조완벽(趙完璧) 군수(郡守)가
이 말씀을 잘 이행(履行)했다.
이것을 보더라도 錦금계(溪先) 선생(生께)서는 재임(在任) 당시(當時) 오로지 백성(百姓)을 위(爲)한 정치(政治)를 했을 뿐 사리사욕(私利私慾)에 치우치지 않았음을 잘 알게 되도다.
그리고 선조(宣祖) 28년(二八年) 서기(西紀) 1595년(一五九五年) 임진(壬辰)에
유운룡(柳雲龍)1) 군수(郡守)가 부임(赴任)하여 금양정사(錦陽精舍)를 돌아보고
이 정사(精舍)가 부실함이 있게되면 이는 관민(官民) 모두가 부끄러운 일이라 하며 향사당(鄕射堂)2) 벽상(壁上)에 기문(記文)을
새겨 붙인 바도 있으며 또 인조(仁祖)조(朝) 서기(西紀) 1636년(一六三六年) 병자(丙子) 난리로 소실(燒失)되었고 숙종(肅宗) 27년(二七年) 서기(西紀) 1701년(一七○一年) 신사(辛巳)에 홍경렴(洪景濂) 군수(郡守)에게 금계(錦溪) 선조(先祖)의 6대(六代) 사손(嗣孫)인 성(垶)이 정사(精舍) 복원(復元)을 간절(懇切)하게 원(願)함을
가상(嘉尚)하게 생각하여 힘을 도와 중건(重建)을 하니 재액(災厄)을 당(當)한지 60년(六十年)만이었다.
이렇듯 금양정사(錦陽精舍)야 말로 대대(代代)로 우여곡절(迂餘曲折)의 연속(連續)이었다.
이렇듯 맥(脈)을 이어온 정사(精舍)가 이제 만대불변(萬代不變)할 자리에 또 석각(石刻)을 하여 세워 놓으니 산천(山川)도
빛을 더하고 연하(烟霞)도 오색(五色)의 빛을 더하는 듯 하며 연작(燕雀)도 하례(賀禮)하도다. 이렇듯이 정사(精舍)야 말로
우리 황씨(黃氏)는 물론(勿論) 전국(全國) 유림(儒林)들까지도 숭배(崇拜)하리라 믿어 의심치 않는 바이다.
이러한 금양정사(錦陽精舍)의 내력(來歷)을 금반(今般) 발간(發刊)되는 보첩(譜牒)의 서두(序頭) 한 편(篇)에 등재(登載)하여 이 어른의 훌륭한 「얼」을 이어받아 앞으로 우리 문중(門中)의 후예(後裔)들이 끊임없이 훌륭한 자손(子孫)이 태생(胎生)하기를 기원(祈願)하는 바 크므로 두서(頭序)없이 우(右)와 같이 기술(記述)하는 바이다.
단군기원(檀君紀元) 4333년(四千三百三十三年)(서기(西紀) 2천년(二千年)) 경진년(庚辰年) 월(月)
후예손(後裔孫) 영종(永宗) 근서(謹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