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용자 도구

사이트 도구


a-123

문서의 이전 판입니다!


書群正寢前補

고증(考證)

 한문 원문 보기

 한문 원문 보기

 考證
黃溫仁 高麗金吾將軍太子檢校墓失傳按諸家譜或書諱仁溫而國內萬姓譜皆書以諱溫
 仁草澗權承旨文海所著大同韻玉黃字下姓氏條列書諸黃源派有曰平海黃溫仁任于其
 後侍中裕中評理黃瑞典書黃太白分派雖非一皆是溫仁之後
黃原老 麗朝登第爲司錄參軍牧寧海府○謹按公嘗有詩曰鳩鳩分養七林枝各分
 南北往來稀云云則公之子似若七只弟而譜記兄著六昆季恐一人落書分明也或
 曰琄璥以鄕音語訛混稱不分仍以爲一人無乃琄璥各有其人耶然則七人皆在而
 但璥之子孫無見處有後無後亦未可據今姑闕疑亦恐厚老之詩泛言侁侁而叙其
 未易相見之情也耶皆未可知也
黃瑾 麗朝登第官至成均館司藝藝文館知製敎○謹按恭愍王朝公爲左獻納與正
 言金續命上疏論地震由於宮闈不嚴極言忤旨謫守沃川郡於漢江船上用華嚴信
 聰師韻曰欲知民水載君舟要盡忠誠逸遊諫院未能呈藥石長沙見謫不須愁徐四
 佳先生曰此詩得人臣之體有關於世敎云其他述作多有可觀
 補遺疏曰地者臣道也今賞罰不明故大少之臣怠弛曠官又因軍功白丁驟
 拜卿相皂隸濫處朝班臣道淆亂以致地震請自今信賞必罰重惜名器左右
 前後皆正人君誰與爲不善刑餘陰類而日與相押樂聞鄙俚無稽之言夜分不
 寢日中乃興陳遠大臣嘉謨讜議無自而入自今三殿宦者各留一人餘悉汰去
 正入端士常令侍側治國之道專在經史未聞以佛書致治者也殿下過信佛法
 群髡緣此于謁濟私自今願斷緇流出入禁闥復開經筵日訪治道常觀聖賢之
 書勿雜異端之說女謁爲政之大害也今針線娘子內僚之女亦有封翁主宅主
 者僭擬踰分殊失尊卑之軆如不得已宗室勳舊外勿許封爵已封爵者請奪之
 田里休戚在於守令今雖有臺省保擧之令皆循面情其所薦擧之有不識字者
 願自今臨軒引見劾其名實擧非其人擧主必罰云云疏上王召臺臣詰之臺臣
 面爭益切王怒甚柳淑進曰旣求直言而怒言者可乎王怒小霽〇史曰直言之
 有益於國家大矣黃瑾續命之所論皆切於時務而剴切忠藎云云詳見東史

黃有定 麗朝登第官至漢城判尹工曹典書 舊謹按公始自平海移居榮川又
 云黃原老移居榮川未知誰是公居郡南草谷里距郡五里許洪武二十三年庚午恭讓
 王二年令各道成戶口帳籍榮川官帳籍黃有定年四十八時爲草溪郡守子銓年二十
 八禮賓主簿子鉉年二十二生員子鋋年十一云判尹公恐是癸未生乃元至正三年忠
 惠王四年豐基譜云錦溪先生所攷公自少至老愛讀論語一部稱爲米囷爲詩文有唐人風調一日
 訪外孫金文節公淡有詩曰偶携藜杖出柴扉四月淸和燕燕飛乘興往尋金氏子薔薇
 一朵秀疎籬補遺公年十二赴安東都會製病暑詩有先秋後夏天/若問朝三??四吾草溪吏民至今稱誦淸德
爲人端正不虛時人目之米囷云○墓在榮川郡東二十里許至今人名爲黃墳土云必有誌
汝一泰任醴泉郡時年數適與相似有詩曰米囷公作草溪年我守襄陽只醉眠當日顯揚雖莫及一
家淸白倘能傳黃中衍詩曰米囷公作草溪年海 曾守醴泉鯫生宰眨似政績還差槐兩賢

黃鉉 洪武二十二年恭讓王元年己巳二月生員壯元登我 太祖二年癸酉式宋介臣榜同進士
 第十五人又登 太宗七年丁亥重試卞季良榜乙科第五人官至嘉善大夫行大司成仁
壽府尹以經明行修稱於世補遺高麗文士皆以詩騷爲業惟圃隱始倡性理之學至我 朝陽村梅軒兄弟明經學羽翼之功不少其後任函文者黃鉉尹祥金鈞金末金洋云云
 又經明行修爲世師儒歷官成均大司成右輿之勝覽平海人物條
黃季夏 世宗三十二年庚午權擥榜登第官至監察
黃震孫 世祖六年庚辰別試崔敬止榜丙科第二人官至繕工正
黃啓沃 字傳翁壬辰生員 成宗八年丁酉式辛季琚榜乙科第二人癸卯說經官至
 應敎居榮川有草谷集行於世奉使咸鏡道卒於居山館葬龍仁處仁之林川
黃玎 成宗五年甲午式崔灌榜丙科十四人丙午正言退而不仕淸白吏
黃俊良 仲擧登 中宗三十五年庚子式金胤鼎榜乙科第二人丹陽郡守星州牧使
 錦溪集行於世補遺書族譜尾詩曰祖先種德毓餘慶名動儒林世有人莫墜傳家詩禮敎篤生江夏踵芳塵


 고증
황온인(黃溫仁)
 고려(高麗) 때 금오장군(金吾將軍) 태자검교(太子檢校)를 지냄. 묘(墓)는 전해지지 않음. 여러 집의 가보(家譜)에는 간혹 휘(諱) 인온(仁溫)으로 적혀 있으나, 국내 만성보(萬姓譜)에는 모두 온인(溫仁)으로 적혀 있다.
 평해군지(平海郡誌)에 역시 溫仁(온인)으로 적어 놓고 있다.
 초간(草澗) 권문해(權文海)가 지은 대동옥운(大東玉韻)에 황자(黃字) 아래 성(姓)의 조열(條列)에 여러 황씨(黃氏) 원파(源派)에 쓰여 있기를 여러 황씨 원파에 평해(平海) 황온인 (黃溫仁)은 고려(高麗) 조정에서 벼슬하여 태자검교(太子檢校)가 되었는데, 그 후손(後孫) 시중공(侍中公) 황유중(黃裕中)과 평리공(評理公) 황서(黃瑞)와 전서공(典書公) 황태백(黃太白)이 분파(分派) 되어서 비록 한 줄에 있지 않으나 모두 온인(溫仁)의 후손(後孫)들이다.

황원로(黃原老)
 고려조에 과거에 올랐고 사록참군(司錄參軍)이 되어 영해부사를 지냈다.
 삼가 살펴보건대 공이 일찍이 시를 지어 이르기를 『비둘기 일곱 숲 가지에 나누어서 길러졌으니 각각 남북으로 갈라져 왕래가 드물게 되었도다』라고 했다. 즉 공의 아들이 칠 형제 같은데 다만 족보에는 여섯 형제만 기록되어 있으니 아마 한 사람이 누락되어 있는 것이 분명하다. 혹자는 말하기를 아들 중 현(琄)과 경(璥)은 향음(鄕音)으로 발음이 혼칭되어서 분간되지 않아 한 사람으로 되었다고 했다. 이에 현(琄)과 경(敬)은 각각 두 사람이 아니겠는가!
 그런즉 일곱 명이 되게 되는데 단 경(璥)의 자손은 나타난 곳이 없으니 후손이 있는지 없는지를 근거할 만한 것이 없다. 이제 짐짓 의심나는 것을 그대로 두고 후로(厚老)의 앞의 시가 공의 아들이 많다 라고만 말했으니 이는 쉽게 서로 만나 볼 수가 없었다고 한 정(情)을 서술한 것이 아닌지 모르겠다.

황근(黃瑾)
 고려조에 과거에 올라 벼슬이 성균관 사예(司藝) 예문관(藝文館) 지제교(知製敎)에 이르렀다. 살펴보건대 공민왕조에 좌헌납(左獻納)이 되어서 정언(正言)인 김속명(金續命)과 더불어 상소하여 당시 지진이 일어난 것이 후궁과의 관계에 엄격하지 못해서 발생했다고 극언을 하여 임금의 뜻을 거슬러서 옥천군수에 좌천되었는데 귀양 도중 한강 배 위에서 화엄 신총사(信聰師) 스님의 시를 차운(次韻)하여 「백성의 물에 임금의 배를 실은 것을 알고자 하면, 요컨대 충성을 다하고 편안히 노는 것을 경계하노라. 사간원에서 경계가 되는 직언(樂石)을 올리지 못하여 귀양 땅에 귀양을 당했으니 근심 할 것 없도다」라고 했다.
 서거정 선생이 이르기를 「이 시는 신하의 도리와 체통을 다했고 세상 교화에 도움을 준다」 라고 했으니 이외의 저술도 볼만한 것이 많을 것이다.

황유정(黃有定)
 (주: 1343년 충혜왕 복위 4년 출생, 서거 년도 미상)
 고려조에 과거에 급제하여 한성판윤 공조판서 벼슬에 이르렀다.살펴보건대 공은 평해에서 영천(榮川)(: 현재 영주)으로 이사하여 살았다. 혹은 말하기를 황원로가 영천으로 이사하였다고 하니 누구 말이 맞는지 알지 못하겠다. 공이 군(郡)의 남쪽 초곡리(草谷里)에서 살았는데 군에서 거리가 오리쯤 된다. 홍무(洪武) 23(二十三)년 경오년 공양왕 2(二)년(1390(一三九○))에 각도에 명령을 내려서 호적 문서를 이루도록 했다. 영천 관청의 호적 문서에 의하면 황유정은 나이 48(四十八)세 이었고 그때 초계군수 였다. 아들 전(銓)은 28(二十八)세로 예빈추부(禮賓主簿)였고 아들 현(鉉)은 22(二十二)세로 생원이었고 또 아들 연(鋋)은 나이 11(十一)세라 했다. 판윤은 아마 계미(癸未)년인 원나라 지정 3(三)년 즉 고려 충혜왕 4(四)년(1343(一三四三))에 출생하였다. (풍기보에 이르기를 금계선생이 상고한 바라고 했다).
 공은 어려서 부터 노인이 되어서까지 논어 읽기를 좋아하였고 세인들이 칭하기를 미균(米囷)선생이라고 하였다. 공의 시는 당나라 풍조(風調)가 있다고 했다. 어느 날 외손(外孫)인 문절공(文節公) 김담(金淡)을 찾아가서 시를 지은 바 있는데 그 시에
偶携藜杖出柴扉 우연히 명아주 지팡이를 끌고 사립문을 나서
四月淸和燕燕飛 사월달 화창한 날씨 제비들이 날고
乘興往尋金氏子 흥을 타고 김씨의 집에 찾아가 보니
薔薇一朵秀疎籬 한 떨기 장미 울타리에서 빼어났구려
초계의 근관민들이 지금까지도 공의 맑은 덕을 칭송하고 있다. 공의 사람됨이 단정해서 허트러지지 않았다고 그때 사람이 공을 지목하여 미균(米囷)(: 쌀창고)이라고 했다.
 묘가 영천군(현재 영주) 동쪽 20(二十)리 쯤에 있는데 사람들이 그 무덤을 황분토(黃墳土)라고 하고 그 안에 필히 지석(誌石)이 있을 것이라고 한다.

황현(黃鉉)
 (공민왕 21(二十一)년 (1372(一三七二)) ~ 서거연도 미상)
 홍무 22(二十二)년(공양왕 원년 1389(一三八九)) 기사년 2(二)월 생원으로 장원을 했고 조선 태조 2(二)년 (1393(一三九三)) 계유(癸酉) 식년(式年) 과거에 송개신(宋介臣)이 시관일 때 진사과에 올랐는데 제15(十五)인으로 합격했고 또 태종 7(七)년 정해년(1407(一四○七)) 중시(重試)에 변계량(卞季良)이 시관일 때 을과 제5(五)인으로 급제했고 벼슬이 가선대부 행대사성 인수부윤(仁壽府尹)을 지냈고 경서에 밝고 행동이 닦아져서 세상에 칭송되었다.
황계하(黃季夏) 세종 三十二년 경오(一四五○)。권람(權擥)이 시관일 때 급제하여 감찰(監察)직에 이르렀다. 황진손(黃震孫) 세조 六년 경진(一四六○) 별시에 나아가 최경지(崔敬止)가 시관일때 병과로 제 二인에 급제하여 관(官)이 선공정(繕工正)에 이르렀다. 황계옥(黃啓沃) (출생년도 미상~一四九四년 성종二十五년 갑인)

황정(黃玎)
자(字)가 부응(傅翁)인데 임진년(一四七二 성종三)에 생원이 되고 성종 1년 정유(一四七七)년 식년 과거에 신계거(辛季琚)가 시관일때 을과에 제二인으로 급제 계묘(一四八三)에 설경관 (說經官)이 되고 응교(應敎) 벼슬에 이르르고 영천에 살았다. 초곡집(草谷集)이 세상에 간행되었다. 함경도에 봉사(奉使)하고 거산관(居山官)에서 서거하였다.용인 처인(處仁)의 임천(林川)에 묻혔다. 성종五년 갑오(一四七四) 식년 시관 최관(崔灌) 당시 병과(丙科) 十四인으로 급제하고 병오년(一四八六)에 정언이 되었다가 나중에 관직에서 물러나 청백리가 되었다. 황준량(黃俊良) 자는 증거(仲擧) 중종 三十五년(一五四○) 경자식년 김윤정(金胤鼎) 시관(試官)때 을과에 제二인으로 급제 단양 구주 성주 목사를 지냈다. 문집 금계집(錦溪集)이 세상에 간행되어 퍼졌다.

a-123.1747960550.txt.gz · 마지막으로 수정됨: 2025/05/23 09:35 저자 ssio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