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書群正寢前補
고증(考證)
고증
황온인(黃溫仁)
고려(高麗) 때 금오장군(金吾將軍) 태자검교(太子檢校)를 지냄. 묘(墓)는 전해지지 않음.
여러 집의 가보(家譜)에는 간혹 휘(諱) 인온(仁溫)으로 적혀 있으나, 국내 만성보(萬姓譜)에는
모두 온인(溫仁)으로 적혀 있다.
평해군지(平海郡誌)에 역시 溫仁(온인)으로 적어 놓고 있다.
초간(草澗) 권문해(權文海)가 지은 대동옥운(大東玉韻)에 황자(黃字) 아래 성(姓)의
조열(條列)에 여러 황씨(黃氏) 원파(源派)에 쓰여 있기를 여러 황씨 원파에 평해(平海) 황온인
(黃溫仁)은 고려(高麗) 조정에서 벼슬하여 태자검교(太子檢校)가 되었는데, 그 후손(後孫)
시중공(侍中公) 황유중(黃裕中)과 평리공(評理公) 황서(黃瑞)와 전서공(典書公)
황태백(黃太白)이 분파(分派) 되어서 비록 한 줄에 있지 않으나 모두 온인(溫仁)의 후손(後孫)들이다.
황원로(黃原老)
고려조에 과거에 올랐고 사록참군(司錄參軍)이 되어 영해부사를 지냈다.
삼가 살펴보건대 공이 일찍이 시를 지어 이르기를 『비둘기 일곱 숲 가지에 나누어서 길러졌으니
각각 남북으로 갈라져 왕래가 드물게 되었도다』라고 했다. 즉 공의 아들이 칠 형제
같은데 다만 족보에는 여섯 형제만 기록되어 있으니 아마 한 사람이 누락되어 있는 것이
분명하다. 혹자는 말하기를 아들 중 현(琄)과 경(璥)은 향음(鄕音)으로 발음이 혼칭되어서
분간되지 않아 한 사람으로 되었다고 했다. 이에 현(琄)과 경(敬)은 각각 두 사람이 아니겠는가!
그런즉 일곱 명이 되게 되는데 단 경(璥)의 자손은 나타난 곳이 없으니 후손이 있는지
없는지를 근거할 만한 것이 없다. 이제 짐짓 의심나는 것을 그대로 두고 후로(厚老)의 앞의
시가 공의 아들이 많다 라고만 말했으니 이는 쉽게 서로 만나 볼 수가 없었다고 한 정(情)을
서술한 것이 아닌지 모르겠다.
황근(黃瑾)
고려조에 과거에 올라 벼슬이 성균관 사예(司藝) 예문관(藝文館) 지제교(知製敎)에
이르렀다. 살펴보건대 공민왕조에 좌헌납(左獻納)이 되어서 정언(正言)인 김속명(金續命)과
더불어 상소하여 당시 지진이 일어난 것이 후궁과의 관계에 엄격하지 못해서 발생했다고
극언을 하여 임금의 뜻을 거슬러서 옥천군수에 좌천되었는데 귀양 도중 한강 배 위에서
화엄 신총사(信聰師) 스님의 시를 차운(次韻)하여 「백성의 물에 임금의 배를 실은 것을
알고자 하면, 요컨대 충성을 다하고 편안히 노는 것을 경계하노라. 사간원에서 경계가 되는
직언(樂石)을 올리지 못하여 귀양 땅에 귀양을 당했으니 근심 할 것 없도다」라고 했다.
서거정 선생이 이르기를 「이 시는 신하의 도리와 체통을 다했고 세상 교화에 도움을 준다」
라고 했으니 이외의 저술도 볼만한 것이 많을 것이다.
황유정(黃有定)
(주: 1343년 충혜왕 복위 4년 출생, 서거 년도 미상)
고려조에 과거에 급제하여 한성판윤 공조판서 벼슬에 이르렀다.살펴보건대 공은
평해에서 영천(榮川)(: 현재 영주)으로 이사하여 살았다. 혹은 말하기를 황원로가 영천으로
이사하였다고 하니 누구 말이 맞는지 알지 못하겠다. 공이 군(郡)의 남쪽 초곡리(草谷里)에서
살았는데 군에서 거리가 오리쯤 된다. 홍무(洪武) 23(二十三)년 경오년 공양왕 2(二)년(1390(一三九○))에
각도에 명령을 내려서 호적 문서를 이루도록 했다. 영천 관청의 호적 문서에 의하면
황유정은 나이 48(四十八)세 이었고 그때 초계군수 였다. 아들 전(銓)은 28(二十八)세로
예빈추부(禮賓主簿)였고 아들 현(鉉)은 22(二十二)세로 생원이었고 또 아들 연(鋋)은 나이 11(十一)세라 했다.
판윤은 아마 계미(癸未)년인 원나라 지정 3(三)년 즉 고려 충혜왕 4(四)년(1343(一三四三))에 출생하였다.
(풍기보에 이르기를 금계선생이 상고한 바라고 했다).
공은 어려서 부터 노인이 되어서까지 논어 읽기를 좋아하였고 세인들이 칭하기를
미균(米囷)선생이라고 하였다. 공의 시는 당나라 풍조(風調)가 있다고 했다.
어느 날 외손(外孫)인 문절공(文節公) 김담(金淡)을 찾아가서 시를 지은 바 있는데 그 시에
偶携藜杖出柴扉 우연히 명아주 지팡이를 끌고 사립문을 나서
四月淸和燕燕飛 사월달 화창한 날씨 제비들이 날고
乘興往尋金氏子 흥을 타고 김씨의 집에 찾아가 보니
薔薇一朵秀疎籬 한 떨기 장미 울타리에서 빼어났구려
초계의 근관민들이 지금까지도 공의 맑은 덕을 칭송하고 있다. 공의 사람됨이 단정해서
허트러지지 않았다고 그때 사람이 공을 지목하여 미균(米囷)(: 쌀창고)이라고 했다.
묘가 영천군(현재 영주) 동쪽 20(二十)리 쯤에 있는데 사람들이 그 무덤을 황분토(黃墳土)라고
하고 그 안에 필히 지석(誌石)이 있을 것이라고 한다.
황현(黃鉉)
(공민왕 21(二十一)년 (1372(一三七二)) ~ 서거연도 미상)
홍무 22(二十二)년(공양왕 원년 1389(一三八九)) 기사년 2(二)월 생원으로 장원을 했고 조선 태조
2(二)년 (1393(一三九三)) 계유(癸酉) 식년(式年) 과거에 송개신(宋介臣)이 시관일 때 진사과에 올랐는데
제15(十五)인으로 합격했고 또 태종 7(七)년 정해년(1407(一四○七)) 중시(重試)에 변계량(卞季良)이 시관일
때 을과 제5(五)인으로 급제했고 벼슬이 가선대부 행대사성 인수부윤(仁壽府尹)을 지냈고 경서에
밝고 행동이 닦아져서 세상에 칭송되었다.
황계하(黃季夏)
세종 三十二년 경오(一四五○)。권람(權擥)이 시관일 때 급제하여 감찰(監察)직에 이르렀다.
황진손(黃震孫)
세조 六년 경진(一四六○) 별시에 나아가 최경지(崔敬止)가 시관일때 병과로 제 二인에
급제하여 관(官)이 선공정(繕工正)에 이르렀다.
황계옥(黃啓沃)
(출생년도 미상~一四九四년 성종二十五년 갑인)
황정(黃玎)
자(字)가 부응(傅翁)인데 임진년(一四七二 성종三)에 생원이 되고 성종 1년 정유(一四七七)년
식년 과거에 신계거(辛季琚)가 시관일때 을과에 제二인으로 급제 계묘(一四八三)에 설경관
(說經官)이 되고 응교(應敎) 벼슬에 이르르고 영천에 살았다. 초곡집(草谷集)이 세상에 간행되었다. 함경도에 봉사(奉使)하고 거산관(居山官)에서 서거하였다.용인 처인(處仁)의 임천(林川)에 묻혔다.
성종五년 갑오(一四七四) 식년 시관 최관(崔灌) 당시 병과(丙科) 十四인으로 급제하고
병오년(一四八六)에 정언이 되었다가 나중에 관직에서 물러나 청백리가 되었다.
황준량(黃俊良)
자는 증거(仲擧) 중종 三十五년(一五四○) 경자식년 김윤정(金胤鼎) 시관(試官)때 을과에 제二인으로 급제 단양 구주 성주 목사를 지냈다. 문집 금계집(錦溪集)이 세상에 간행되어 퍼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