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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해평리공파보서(己亥平理公派譜序) (1959년) - 재우(載宇)
우리나라는 箕子聖君께서 세운 東方禮義之國이라 그래서 옛날부터 百姓을 가 르치는 方法이 祖先을 섬기고 그 恩惠에 報答하는 것보다 더 큰것이 없다하였다. 그리고 겨례와 親合하는 것은 곧 先代를 기쁘게 하는 것이므로 이것을 萬世界 人間의 紀綱으로 세우고 있다. 대저 사람이 누구나 父祖子孫關係가 없는 사람은 없는 것이다. 처음으로 거슬러 올라갈때 물도 한가지로 한 根源에서 나오는 것이오 아래로 훌터볼때 한뿌리의 나무도 여러갈래의 가지로 各各 나누이는 것과 같이 사람도 오늘날한 祖上의 子孫으로 數百萬의 겨례로 나뉘어진 것이다. 이런고로 옛날부터 사람들이 宗族을 重하게 여겨 韋氏花樹會와 伊川月一之規로써 이를 좋아하였느니라 이에 族譜로 祖上을 밝히고 또 그 宗族을 연결시켜왔느니라。 우리 黃氏가 이나라에 두루 퍼져 있으나 오직 學士公이 鼻祖가 되는 것마는 모두 잘알고 있는 事實이다. 그리고 年代가 멀다하나 지금 여기 世系를 考證한다면 平海長水昌原으로 貫鄕을 달리쓰되 그 始祖는 다같다. 平海를 本貫으로 하는 우리들은 金吾公으로 中祖를 삼고 三兄弟분이 나누어져 三派가 되고 所謂大同 이라는 것은 이 三派의 合同을 말하는데 不外한 것이다. 甲戌平海大同譜以來 이미 二十六年이 되었다. 그동안 宗中에 德望있는 어른들이 차례로 돌아가시고 只今의 世態는 날로 갈수록 퇴폐하여 祖先의 뜻을 이어 修譜할
길이 막연해 보이므로 지난 丁酉年十月中丁에 月松先壇省掃하는 날 各處宗人들 이 齋室에 모여 奠祀를 올린 後에 修譜할 것을 議論하여 보았으나 意見이 區區 하여 다음 宗會로 미루고 말었다. 그 後다음해 三月에 다시 總會를 열러 三派 大同譜事務條例를 決議하고 成文布告한뒤에 本人과 世元斗星두 族人과 함께 豊 基와 清安 두 宗宅을 訪問하여 決議된 經緯의 전말을 大綱말하고 酬議한 結果 世態의 연고와 經濟의 어려움으로 莫重大事를 치루기 至難하다는 뜻을 앞세워 환영치 않음으로 不得己決裂되고 派譜를 決行키로 마음을 굽힌 後族宗載元과 함께 赤手空拳으로 南部地方을 다녀 七個月만에 收單을 마치고 돌아와 中抄한 것을 正書를 해서 다음해 三月에 完成하였다. 그러나 나의 마음 가운데 느끼 는 바는 이 修譜하는 大義가 先代를 追慕하고 宗族을 護衛하며 同宗間敦睦을 爲主하는 先代로부터 이어오는 뜻을 後世들이 繼承하는 當然之事業인데 여기에 異議를 갖는 宗人들의 心情을 理解할 수 없다. 모름지기 그들의 再考의 餘裕 를 갖는 것을 希求한다. 대저 士族之家에 譜牒이 있어야 된다는 것은 한집안에 아름다운 일에만 끝이는 것이 아니라 世道人心에 미치는 영향 또한 크다는 点에도 留意하여야 한다. 이러한 說은 程張夫子게서 이미 說罷하여 널리 傳해온 事實이니 다시 附言치 않기로 하노라。
가만히 生覺하니 族祖極英氏와 族弟載元君이 함께 침식을 잊고 凡百事를 담당 하여 先系를 밝히고 世德을 지었으나 大同修譜를 이루지 못하고 派譜에 끝혔음 을 심히 유감으로 생각한다. 나는 元來不足한 사람으로 아는 바 없이 어찌 감 히 無辭로써 先父老의 記述 밑에 序文을 둘 수 있으리요마는 다만 느끼는 바에 지나지 않은 것만을 몇마디 말해둔다. 己亥四月上浣裔孫載宇謹序