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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0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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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암공 중신 행장(魯庵公中信行狀)

 노암공 중신 행장(魯庵公中信行狀)
 공(公)의 휘(諱)는 중신(中信)이고 자(字)는 자정(子貞)이며 호(號)는 노암(魯庵)이다. 한학사(漢學士) 휘(諱) 낙(洛)께서 신라(新羅) 유리왕(儒理王) 6년(六年)(기원전 52(五二))에 동국(東國) 월송(越松)에 제일 먼저 오시어 살게 되였다. 그후 고려(高麗) 때에 벼슬이 태자검교 금오장군(太子檢校金吾將軍) 휘(諱) 온인(温仁)으로부터 1세(一世)로 하여 평해황씨(平海黃氏)라 했다.
 3세(三世) 휘(諱) 유증(裕中)은 문하시중(門下侍中)이고 그 아들 서(瑞)는 문하시중(門下侍中)인데 시호(諡號)가 문절공(文節公)이였으며 그 아들 종량(宗亮)은 호부전서(戶部典書)였으며 그 아들 세영(世英)은 예빈시(禮賓寺)의 동정(同正)이고 그 아들 용기(龍起)는 예빈(禮賓) 정(正)이며 그 아들 길보(吉甫)는 병사(兵使)였다. 그 아들 득재(得載)는 현감(縣監)이며 그 아들 옥승(玉崇)은 본조(本朝)에 들어와서 한성판윤(漢城判尹)이다. 그 아들 보곤(輔坤)은 생원(生員)이며 공(公)의 고조부(高祖父)가 되신다. 증조(曾祖)의 휘(諱)는 우(瑀)이며 성주목사(星州牧使)였다. 조(祖)의 휘(諱)는 응청(應淸)이니 임자년(壬子年) 사마시(司馬試)에 합격(合格)하여 도학(道學)이 고명(高明)하고 효행(孝行)이 특이하여 진보현감(眞寶縣監)에 제수(除授)되었으며 정려문(旌閭門)이 내려져 명계서원(明溪書院)에 제향(祭享)하고 있으며 세상(世上)에서 대해선생(大海先生)이라 부른다. 강행(强行)을 목표(目標)에 두고 인조(仁祖) 3년 을축(乙丑) (1625(一六二五))에 명륜당(明倫堂) 창건(創建)을 시발(始發)하여 만고(萬苦) 끝에 인조(仁祖) 6년(六年) 무진(戊辰)(1628(一六二八)) 8월 초1일(八月初一日)에 역사(歷事)를 마치고 주자(朱子)가 쓴 글자를 사본하여 현판(懸板)을 올릴 때 후면(後面)에 숭정 원년 팔월 초일일(崇禎元年八月初一日) 도유사 황중신(都有事黃中信)이 조작(造作)하였다는 각자(刻字)가 후학(後學)에 전하여 왔다.
 공(公)은 정포은(鄭甫隱) 선생(先生)의 서원원장(書院院長)으로 있을 시 의전(儀典)을 펴 후학(後學)들에게 전하니 의전선구자(儀典先驅者)라 추앙(推仰)을 받았으며 그 후 인조(仁祖) 14년(十四年)(1636(一六三六))에 병자호란(丙子胡亂)이 일어나자 아들 윤(鋼) 혜(鏸) 정(鋏)을 데리고 의병(義兵)을 일으켜 큰 공(功)을 세운업적(業跡)이 영양사난록(永陽四乱錄)과 창의록(倡義錄)에 기록(記錄)되 여있다. 공(功)은 인조십육년무인(仁祖十六年戊寅)(一六三八)에 졸(卒)하니 향년 오십삼세(享年五十三世)였으며 묘(墓)는 영천 단호동 노가 곡중봉자좌 (永川丹湖洞魯柯谷中峯子坐)에 배위(配位)와 합폄(合室)이다.
 배 의인 안동권씨(配 宜仁安東權氏)는 동봉(東峯) 극립(克立)의 따님으로서 의 방(義方)의 교훈(敎訓)과 현모양처(賢母良妻)의 덕행(德行)이 돈독(敦篤)하여 원근(遠近) 고을에서 칭송(稱訟)이 자자했다. 공(功)의 빛난 문헌(文獻)은 난 시(亂視)에 소실(消失)되였으나 동봉공(東峯公) 장여헌공(張旅軒公)의 문집(文 集)에 기록(記錄)되여 있으며 영양구읍지(永陽舊邑誌)에도 기록(記錄)되여 있 다. 사간원사간(司諫院司諫)으로 있던 초휘(初諱) 흠(欽) 개명윤(改名鋼)은 공(公)의 병자호란시(丙子胡亂時)의 공훈(功勳)으로 숙종육년경신(肅宗六年庚 申)(一六八〇)에 증 이조판서(贈 吏曹判書)에 제수(除授)되였으며 배위 전주 최씨(配位 全州崔氏)는 정부인(貞夫人)으로 추증(追贈)되였다. 功의 손자(孫 )계하(啓河) 개명영하(改名永河)는 숙종 십오년 기사년(肅宗十五年 己巳年) (一六八九)과시(科試)에 합격(合格)하여 문의현령(文義縣令)을 지냈고 공(公) 의 증손(曾孫)일(鎰) 개명수길(改名壽吉)은 영조 칠년 신해(英祖七年辛亥)(一 七三一)에 급제(及第)하여 청주목사(淸州牧使)를 지냈으며 이하는 기록지 않 는다. 오! 공(公)의 효(孝)와 학문(學文)은 하늘에 이루였고 청념결백(淸廉 潔白)한 선비의 성품(性品)과 고귀(高貴)한 업적(業跡)을 볼때 아쉬움을 남긴채 세상을 떠났음을 누대앙모(累代仰慕) 코져 후손(後孫) 화석 무석씨(和錫 武錫 氏)가 교지(敎旨)와 호적(戶籍)을 갔고와 공(公)의 행장(行狀)을 수차 간청(懇 請)하기에 공(公)의 행장(行狀)을 감당하기가 어려워 사양(辭讓)하였지만 공 (公)의 행적(行跡)은 하늘에 닫는 것과 같아 향내(鄕內)살면서 간혹 중남정(竹 覽亭)에 올라 공(公)의 옛날 자취를 염상(儼想)함에 화풍(和風)은 순응(順應) 하고 일기(日氣)는 청명(淸明)하며 산천(山川)은 고금(古今)과 다를바없이 유 유(流流)하옵고 일월(日月)은 빛을 더하는듯 하와 곳곳에 흐터있는 문헌(文獻)을 종합(綜合)하여 우(右)와 갓추니 후일 재 채택기를 바라노라.
  문소(文韶) 김현주(金獻周) 삼가 쓰다.

b-052.1748428202.txt.gz · 마지막으로 수정됨: 2025/05/28 19:30 저자 ssio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