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증자헌대부이조판서행사간원죽람황공행장(贈資憲大夫吏曹判書行司諫院竹覽黃公行狀)
죽람(竹覽) 황연(黃鑽)의 행장(行狀)
공 (公)의 휘(諱)는 흠(欽)이었는데 후에 연(𨬔)으로 고쳤으며 자(字)는
정숙(精淑)이요 성(姓)은 황씨(黃氏)이니 평해황씨(平海黃氏)이다.
중국(中國)에서 나온 성씨(姓氏)로서 후세(後世)에 이르러 휘(諱)가
온인(溫仁)이요 고려조(高麗朝)에 벼슬이 금오장군(金吾將軍) 검교(檢校)에 이른 분이
처음 평해(平海)를 성씨(姓氏)의 관향(貫鄕)으로 하였다.
손자에 이르러 휘(諱)가 유중(裕中)이요 벼슬이 문하시중(門下侍中)에 오른 분이
휘(諱)서(瑞)를 낳으니 벼슬이 금자광록대부(金紫光祿大夫) 첨의평리(僉議評理)였으며
시호(諡號)가 문절공(文節公)이요 익대공신(翊戴功臣)이었기 때문에
평해현(平海縣)을 군(郡)으로 승호(陞號)케 하였다.
조선조(朝鮮朝)에 들어와서 고조(高祖)의 휘(諱)는 우(瑀)이니 성주목사(星州牧使)를
지냈고 증조(曾祖)의 휘(諱)는 응청(應淸)이니 세칭(世稱) 대해선생(大海先生)이다.
진사(進士)를 지내고 효행(孝行)으로써 정려(旋閭)주1가 내려졌으며 유일(遺逸)로
천거(薦擧)되어 진보현감(眞寶縣監)에 제수(除授)되고 명계서원(明溪書院)에
제향(祭享)되고 있다.
조부(祖父)의 휘(諱)는 거일(居一)이요 호(號)는 명계(明溪)이며 참의(參議)
벼슬에 증직(贈職)되고 종형(從兄)인 해월선생(海月先生)이 세구슬을 가진 동
생으로 추증(推重)하였으며 문학(文學)으로 명망이 있었다.
아버지의 휘(諱)는 중신(中信)이니 생원(生員)이었으며 해월공(海月公)이
일찍이 영천군수(永川郡守)로 재임할 때에 공(公)이 모시고 따라가서 살았었다.
병자호란(丙子胡亂) 때에는 아들 연(𨬔)을 거느리고 양계(暘溪) 정호인(鄭好
仁)의 진지(陣地)에 들어가서 참전했기 때문에 영천(永川)의 사난창의록(四難
倡義錄)에 들어 있으며 여헌(旅軒) 장선생(張先生)의 문하(門下)에 유학(遊學)한
실적이 영양군지(永陽郡誌)에 실려있다.
어머니 안동권씨(安東權氏)는 호(號)가 동봉(東峯)이요 휘(諱)는 극립(克立)의
따님으로써 덕(德)이 있어서 부행(婦行)을 어기는 일이 없었다.
선조(宣祖) 36년(三十六年)(서기 1603(一六○三)) 계묘에 공을 낳으니 골상(骨相)이 비범하여
스승에게 나아가 독서(讀書)함에 이르러서는 재주가 항상 앞섰으며
예문가(禮文家)를 왕래하여 견문(見聞)이 넓다는 칭찬이 있었다.
이윽고 대인(大人)이신 노암공(魯菴公)을 따라 여헌(旅軒) 장선생(張先生)의
문하(門下)에서 배움을 받아 학문의 차례를 들었는데 영천(永川)의 선배들이
마음을 기울여 더불어 교분(交分)을 갖기를 바라지 않은 사람이 없었다.
병자년(서기 1636(一六三六))에 생원시(生員試)에 합격하였는데 곧 순릉참봉(順陵參奉)이
제수(除授)되었으니 또한 특이한 관운(官運)이었다.
인조(仁祖) 18년(十八年)(서기 1640(一六四○)) 경진에 별시(別試)의 문과(文科)에
발탁(拔濯)되어 명성(名聲)이 자자했으며 여러번 한림원(翰林院)과 같이 지위(地位)가
귀한 벼슬을 거쳤으니 홍문관(弘文館)으로부터 사간원(司諫院)에 이르는 벼슬
자리를 지내어서 사간원에는 임금의 잘못을 직언(直言)으로 간(諫)하는 신하가
많다는 기풍(氣風)을 세웠다.
그 후에 세상 일이 잘못되어 가는 것을 보고 벼슬 길에 나아감을 즐겁게 여기지
않고 죽곡(竹谷)에 물러나와 살면서 여러 간(間)의 모정(茅亭)을 지어 이름하기를
죽람정(竹覽亭)이라 하고 스스로 시골 풍경을 사랑하며 세상을 마칠 계획으로
살다가 을묘년(서기 1675(一六七五))에 졸(卒)하니 73(七十三)세의 수(壽)를 누렸는데 묘는
노가곡(魯歌谷)의 자좌(子坐)의 둔덕에 있다.
숙종(肅宗) 6(六)년(서기 1680(一六八〇)) 경신에 자헌대부(資憲大夫)의 품계로
이조판서(吏曹判書)에 증직(贈職)된 것은 대체로 특별한 증직(贈職)인 것이다.
배위(配位)는 정부인(貞夫人)으로 추증(追贈)된 전주최씨(全州崔氏)이니
예조참판(禮曹參判)을 지낸 경구(慶九)의 따님이며 묘는 공(公)과 합폄(合窆)이나
아들이 없어서 동생인 혜(鏸)의 아들 영하(永河)를 취하여 대(代)를 이었다.
영하(永河)는 진사(進士)로서 문과(文科)에 급제(及第)하여 문의현감(文義縣監)의
행직(行職)주2을 지냈으며 아들 수길(壽吉)은 진사(進士)를 하여 음사(陰仕)로
청주목사(淸州牧使)를 지냈으며 그 아들은 인묵(仁默)이요
그 아들은 운동(運東)과 운남(運南)과 운성(運成)이다.
운동(運東)의 아들은 치만(致萬)과 치발(致發)이며 운남(運南)의 아들은 치술(致述)이니
참봉(參奉)을 지냈고 운성(運成)의 아들은 치진(致進)이니 통정대부(通政大夫)였으며
나머지는 기록하지 않는다.
아! 공이 맑고 밝은 기품(氣禀)을 타고 난 데다가 특출한 재주를 더하였으며
안으로는 가정의 유훈(遺訓)을 계승하고 밖으로는 스승의 가르침을 가슴에 잘
간직하였기 때문에 배움을 쌓은 것이 풍부하니 실력을 발휘하면 반드시 적중
(適中)하였다.
일찍이 진사시(進士試)에 뽑혔고 곧 참봉(參奉)의 직첩이 내리는 은전(恩典)이
있었으며 이윽고 문과급제(文科及第)의 반열(班列)에 발탁되어서 홍문관(弘文館)의
여러 벼슬을 거치는 행보(行歩)가 조정에서도 특출하여 여러 관료(官僚)가
칭찬하고 감탄했으니 이것만으로도 공의 평생 이력을 알 수 있다.
문헌(文獻)이 비록 없어서 고증(考證)할 수 없는 탄식을 면치 못하지만 공에게
있어서 무슨 관계가 있겠는가? 내가 이 군(郡)에 우거(寓居)해 살았기 때문에
공에 대한 풍문(風聞)을 많이 들었는지라 높이 앙모(仰慕)하는 나머지 여러차례
죽람정(竹覽亭)에 올라 공이 살던 당시의 광경을 상상해 보니 산(山)도
비웃지 않고 물도 흐느끼지 않았을 것이요, 풀은 더욱 향기롭고 꽃은 더욱 고왔으리라.
정자에 오를 때마다 서성거리며 차마 떠나지 못했었다.
공의 후손인 화석(和錫)과 무석(武錫)씨가 나에게 행장(行狀)을 지어 달라고
부탁하였는데 사람도 보잘것 없고말고 가벼운 내가 어떻게 감히 이 부탁을
감당하겠는가 여러번 사양해도 되지 않아 오른쪽과 같이 지어서 사필(史筆)을 잡을
사람의 취사선택(取捨選擇)을 기다리노라.
문소(聞韶) 김헌주(金獻周) 삼가 짓다.
주1: 정려(旌閭): 충신(忠臣), 효자(孝子), 열녀(烈女) 등을 그들이 살던 고을에 정문(旌門)을 세워서 표창하던 일
주2: 행직(行職): 품계(品階)는 높으나 직책(職責)은 낮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