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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0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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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덕량희구재황공행략(通德郞喜懼齋黃公行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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通德郞喜懼齋黃公行略
公諱琛字君玉姓黃氏黃爲其城著姓高麗侍中謚文節公諱瑞其遠祖也中世有諱汝 一號海月 宣廟射策登第以文章德業著名當世龍蛇之變以朝天書狀官隨白沙月沙
上副价卞丁主事應泰之誣及還沉淪於冗散州郡孿官工曹參議歿後以翊戴勳 贈嘉 善大夫吏曹參判士林尸祝于明溪書院與仲父大海先生並享馬於公爲六代祖也五 代祖諱中憲宣敎郞高祖諱石平 贈通訓大夫司僕寺正曾祖諱塾 贈通政大夫承政
院左承旨兼經筵參贊官孝行出天學識超倫結茅于五台峯下娛樂泉石而號曰龜萱 當時交遊安參判黃懈軒諸公記其實行而褒美之祖諱世元 贈嘉善大夫戶曹參判兼
同知義禁府事五衛都摠府副摠管考諱受夏嘉善大夫同知中樞府事先妣貞夫人安 東權氏士人諱萬濟之女無育繼妣貞夫人坡平尹氏士人諱徵三之女公以英廟丁卯 八月二日生于沙洞里弟幻而機警絶人凡於愛親敬長隆師親友之方不敎而動輒中 矩性又好學勤劬如飢渴年甫弱冠才思穎發屢捷鄕觧華聞籍甚鄕人莫不以遠大期 之而洪奉賀秀輔金判書履彬累加勸勉而稱歎焉癸卯春赴楊口鄕試歸路聞先夫人 訃星夜奔哭泣血哀毀情文備至三年之後外制雖變而風樹餘懷恤恤乎猶未盡也絶 意外慕不復治擧子業偏奉春鬧至誠無間自以家勢淸寒無以盡随修之供爲憂乃勤 蠶績力耕稼養鶏豚便身之衣適口之味保元之資靡不用極以老人衰腸易飢易寒一 日之內進膳無常燃突無時而必躬執其役采甞使子弟婢僕代之至於粥飲濃煎之方 肉鮮爛烹之節亦親自看攝適其溫冷鹹淡而進之積六十年如一日每當諱日前期齋 宿致哀致敬備盡如在之誠先夫人墓所在於十里之外而每月必具酒果奠掃以爲常 雖祈寒盛暑未嘗或廢愛日之誠至老彌篤扁其所居齋曰喜懼盖欲其目擊思從以寓 其終身濡慕之至意也平居侍側怡愉承順和容婉色百世之下復見老莱子七十戲綵 之像嗚呼休哉始公之曾王考 贈承旨龜臺公以童年澈天之孝屢登鄕薦而未蒙棹楔
之典鄕人嗟惜之不已令於百年之後卓絶奇儒之行又鍾於玄曾孫盖其積累之漸所 從來遠矣是豈偶然哉權學士畯以士林重望宰本郡時累造其廬深加歎賞記其齋而 嘉奬之其略曰至如某也謂孝子者非耶郡中人士之狀有曰某孝誼純至斯人爲誰寔 爲君王大人也常所之靈芝有本醴泉有源者不其信然歟盖深服之語也歲戊辰先府 君春秋已治滿九十矣君以望七之年侍奉朝夕暫不離側加以衰病浸尋勢難遠役而 以先府君大耋陞資而未蒙實典心常慨恨乃於暮春之月扶病強作艱辛赴洛後數日 往謁西銓金公履翼語及先府君壽職事金公見公儀表之端雅辯情之剴功爽然異之 即夕首擬於窠闕實同知詰朝蒙恩受點後又數日三世追榮並以華啣具兼帶而下鳴 呼異哉此豈非天與之順歸便乎制下之日東南人士莫不嘖嘖奇異之曰猗歟鬼神鑒 其誠也公手奉恩敎婦報親庭方與諸宗謀所以慶不踰月懸貫焚黃之節將刻日利成 矣夫何樂極生悲吉反爲凶張碩人以五月二十二日遘厲不幸無何公又寢疾於明溪 之寓舍以閏五月十二日飲恨長逝得年纔六十二是夕舁婦于本宅險殯才畢先府君 因廢食飲沉吟成疾是月二十五日繼又不諱嗚呼痛哉天地之間此何等情界也不世 榮光無邊禍色慘錯於一月之內使慈婦孝子之魂會哀抱寃於九泉之下是何蒼蒼之 無神而漠漠之無信也鳴呼痛哉是月九月初七日庚午克襄先府君于郡北三十里梨 田洞負亥之原二十日癸未窆公於同洞間一麓員已之原距先府君幽宅繞數百學武 相望之地也泉臺侍奉之樂無減於人世則公將伸孝於八地之日幽明之間可慰者此 也公前配幸州田氏士人諱弘玉之女先公二十七年而殁葬于周墙 向之原後配蔚珍
張氏士人諱東玉之女先公一月而發與公同穴兩碩人俱以貞亮之姿內行純備壺儀 無憾而不幸無子以本生再從兄璋之第二子致泓爲嗣女三人爲士人李龜繡妻士人 張天翼妻者田氏出也士人李相箕妻者張氏出也致泓娶務安朴鎭標女生一男尙幻 李龜孀無育張天翼有三男皆幻嗚呼公之傳受淵源有自來矣幻而啓發於復齋李
公春龍誘掖之方長而成就於伯父川西翁師夏爐錘之間畢竟樹立如是卓越於哀季 吾夫子所謂魯無君子斯馬取斯者政謂公發也風度秀常氣宇軒昂性行高潔持論鄕 黨不肯俯仰於流俗聞人之善若已有之推許闡揚猶恐不及見人之惡若將일焉嚴加 峻斥不少假借故鄕人之善者慕之不善者忌之然其律巳之謹嚴制行之公平賢不肖 之所共歎服者故能處濁世而怨禍不及於身吁亦可尙也已今夫嶝巖草澤之中非無 特立獨行之士而我國家取人專尙科目蒐逸之典不及於遐荒故士之抱負志行名연 没無稱者指不勝屈是可數也念昔川西公以孝友文行廉謹醇雅負儒林重望而卒乃 枯頂黃馘畢命於蓬蒿之下以公出天之誠高世之行懷寶莫售隱德不顯埋没窮巷與 草木同腐可勝痛哉可勝惜哉廼令致泓圖君志行之不朽於世袖持家狀一通來余請 記實文字余以育廢一物不自量力草先令公行略已極償越矣何敢更構拙語畳托語 傳信之地而第念平日通家之誼便是姓不同兄弟義有所不可終辯者敢忘其固陋於 原狀中略加欒括而撰次世係志行如右以備當世秉篳士之裁擇而去就焉
  上之八年戊辰九月日戚記尹東憲謹狀


통덕랑(通德郞) 희구재(喜懼齋) 황공(黃公) 행략(行略)
 공(公)의 휘(諱)는 침(琛)이요 자(字)는 군옥(君玉)이라 성(姓)은 황씨(黃氏)니 황씨(黃氏)가 기성(箕城)에서 제일(第一)가는 성(姓)이라 고려(高麗) 시중(侍中) 시(謚)는 문절공(文節公)이요 휘(諱)는 서(瑞)니, 그 원조(遠祖)라 중세(中世)에 휘(諱)는 여일(汝一)이요 호(號)는 해월(海月)이 있었으니 선조(宣祖) 때 활을 쏴서 과거(科擧)하였고 문장(文章)과 덕망(德望)으로서 이름을 나타냈으니 당세(當世)에 전란(戰亂)으로 인(因)하여 조정(朝庭)에 글을 올려 벼슬이 백사(白沙)와 월사(月沙)에 따랐고 상부개변(上副价卞) 정(丁) 주사(主事) 응태(應泰)1)의 무(誣)와 떠돌아 다니는 벼슬로서 산주군(散州郡) 孿에 빠져 工曹參 議를 하였으니 後에 거룩한 功으로 贈嘉善大夫吏曹參判을 하셨고 士林들이 明 溪書院에 仲父大海先生과 같이 並享하시니 公의 六代祖라 五代祖에 諱는 中憲이니 宣敎卽이라 高祖의 諱는 石平이니 贈通政大夫司僕寺正이다 曾祖의 諱는 塾이니 贈通政大夫承政院左承旨兼經筵參贊官이라 孝行이 出天하였고 學識이 뛰어나서 띠집을 五峯山아래 짓고 개미와 돌을 사랑하며 號를 龜臺라 하니 당시에 交遊하는 安參判과 黃懈軒 모든 分들이 그 實行을 記錄褒賞하고、아름다움을 稱贊하더라 祖의 諱는 世元이니 贈嘉善大夫戶曹參判兼同知義禁府事 五衛 都惚管이 시고 考의 諱는 受夏니 嘉善大夫同知中樞府事라 先妣貞夫人安東權氏니 士人諱는 萬濟의 女라 無后하고 繼妣貞夫人坡平尹氏니 士人 諱는 徵三의 女라 公은 英廟丁卯八 月二日 沙銅에서 出生하셨다 幼時부터 모든 行動이 남에게 뛰어나서 무럿 어버 이를 사랑하고 어른을 恭敬하며 벗을 親하는 方法이 가르치지 않이해도 그 規模가 달랐고 또 배움을 좋아하고 勤勉함을 飢湯과 같이하여 나이 二十未滿에 才能이 穎特해서 그 敏捷한 行動이 所關이 籍籍하여 鄕人들이 그 遠大한 抱負를 말하 지않은 者없었으며 致賀하지않은 者없드라 金判書履彬이 여러번 그 勤勉함을 稱贊하드라 癸卯년 봄에 楊口의 鄕誠에 갔다가 도라오는 길에 先人의 訃音을 받고 밤에 달려와 피눈물로 설피우매 至極한 정성을 다하여 하루라도 결한날이 없었고 三年이 지난 後에도 外勢가 비록 變해도 어버이를 思慕한 것이 조금도 變함이 없이 뜻을 밖에 두어도 子息사랑 하는데 두지않고 오로지 偏母에게 至誠을 다하여 한거한 날이 없드라。家勢가 漸漸貧寒해지자 먹고 살일을 근심하여 누애를 치고 갈고심우며 養豚과 養鷄를 하여 몸에 便宜하도록 옷을 해입고 입에마추어 飲食을 하여 健康을 保存하고 老人들의 배고프고 추운것을 감안하여 반찬을 進供하며 추울때에는 반드시 손수 나무를 하여 子弟나 奴婢의 손을 빌리지 않이하고 그 飲食과 肉과 生鮮을 다루는 方法이 또한 直接自己의 손으로 하고 그떠시고、찬 節次와 그더루운것을 무려 六十年을 하루같이 하여 每樣諱前날 밤에는 슬프하고 恭敬하기를 生存해 계실때와 같이하며 先夫人墓所가 十里밖에 있으도 每日 반드시 酒果를 가추어 墓所를 정결히 썰고 항상 춥고 덥고 한것을 늘 념여하여 정성을 다 하며 나이많을수록 所居한 齋를 갈때 喜懼라 하니 대개 눈에보고 생각하는 것이 우연이 않이라 終身토록 追慕하는 뜻이 至極함이라 平時옆에서 모실때 平 安하게 해드리고 和順한 얼굴을 하여 百世下에 다시 老子께서 七十에 戲彩의 像을 보게 하였다 슬프고 설프다 처음에 曾王考께서 贈丞旨하시고 龜臺公이 童年에 徹天之孝로서 여러번 鄕薦을 올였으나 한번도 棹禊외 典을 입지못하여 鄕人들이 설프하고 아쉬워한지 于今百年이라 뒤에 卓越한 奇偉의 行이 玄曾孫에게 울이니 그 積累한 점이 멀리와 비춘 것이다 이것이 얻지 偶然한 일일까부야 權學士晙이 士林重望이 本郡에 宰하실때에 여러번 그집을 고치고 깊이 勤貴을 加하여 그 齋를 記하고 아름답게 勸奬하고 略해 가로대某를 보고 孝子라 않이할 者 있으랴 또 郡中의 人士들이 状이 있어갈때 某孝는 누구를 위한 것인가 진실로 君玉大人을 위한것이다 倘所에 云하되 靈芝는 根本이 있고 醴泉은 根源이있다는 것은 미더이 않이할수없다는 것은 깊이 心服한 말이다 해가 戊辰에 先府君의 春秋가 이미 萬九十이나 君이 七年 前부터 朝夕으로 侍奉하여 잠간도 옆을 떠나지 아니하였으며 老病이 점점더하여 멀리 떠나려했으나 先府君의 老病이 많이危독하지 않이 함으로 마음에 恒常慨恨하고 있다가 暮 春月에 病이 조금 낳은 氣色이있기로 서울에 갔 다가 數日後에 拜竭하니 西銓金公履翼의 말이 先府君은 壽職事라 金公이 公을보고 端雅하고 辞情하여 精神이 傘然 하드니 即夕에 머리가 옆으로 삐걸어지드니 朝飯을 點한 後에 또 數日만에 三世를 追榮하시고 마춤내 허득이고 느낌으로서 世上을 떠나시니 슬프다 이 얻지 하늘이 준 順歸가 않일까무랴 服制를 하든날에 東南 人士들이다 크게소리 질어며 奇異해 말하기를 아름답다 鬼神에 그 精誠을 보이라 하드니 公이 손수 恩敎를 받으러 돌아가신 것을 諸宗들과 더불어 平安히 계시는 곳을 마련하고 달이 늠지않케하여 좋은날을 擇하여 利成을 하였으니 무슨樂이 이生과 悲와 놈이 이에 더 할수 있으랴 碩人이 五月二十二日에 安葬하고 公이 明溪書院웃막 집에서 寢食을 같이하시다가 閏五月十二日에 마침내 도라가시니 겨우 나이六十二라. 이날 저녁에 마주들어 本宅으로 運尺하여 殮殯을 마치고 또 先府君께서 食飲을 全폐하고 沈然히 病을얻어 이달 二十五日에 繼父를 이어 도 라가시니 설프고 설프다. 하늘과 땅사 이에 이것이 무슨 情界야 세상이 榮光이 없고 또 禍가 끝이 없이 慘錯한 일이 一개월 內에 慈婦孝子외 魂이 슬픔을 머금고 冤病함을 九泉앞에 끝나니 이잊지 蒼蒼히 鬼神이 없다는 것을 믿어할 수 있나 슬프고 아프다 이날 九月 即 七月庚午에 先府君을 郡北三十里 梨田洞負亥의 原에 襄禮를 지내고 二十日 癸未에 公을 같은 洞間一麓 사이 巳의 原에 合窆을 하니 距里가 先府君幽宅과 겨우 數百步 서로 望見한땅이다 泉堂에서 侍奉한 樂이 사 람이 사는世上과 같음이 없는적 公은 將次孝道를 땅에 入地한 날까지 幽明間에 可히 慰勞한 者이라 公의 前配는 幸州田氏니 士人諱는 弘玉의 女니 先公二十七 年에 도라가셔서 恩墻에 向의 原에 葬하고 後配蔚珍張氏니 士人諱는 東玉의 女니 先公一月에 歿하여 公과 더불어 同穴內에 같이 合葬을 하여 貞亮의 姿態가 서로 純備하고 壼儀가 無憾하나 不幸히 無子하여 本生再從兄瑺의 第二子致弘으로 嗣 하고 女로 士人李龜繡士人張天翼의 妻는 田氏에게 出하다 士人李相箕妻는 張氏 에게 出하다 致弘은 務女朴鎭標의 女에게 장가가서 一男尙幼를 나섰고 李龜繡은 無育하고 張天翼은 三男이 있으나 다 어리다.
 슬프다 公의 傳하고 받는 일이다 淵源이 있다. 어려서는 復齋李公春龍의 가 르침을 받었고 成長해서는 伯父川 西翁師夏公의 도움을 받아 畢境에 이와같이 뜻을 襄季에 樹立하였으니 夫子가 이른바 魯나라에 君子가 없다는 것이 곧이 것 이며 이를 取한者政이라 하셨오니 이는 公을 두고 말한 것이다. 風体가 秀偉하고 氣力이 健壮하며 또 性行이 高潔하여 鄕黨에서 論議하실적에 남에게 질타하지 아니하고 남에게 善을 들으면 모에 推許한것같아서 도리어 오직 두려워하고 남 의惡을 본적、도리어 부끄러워하여 嚴然히 이를멀리 물리치고 조금도 이를 假借 하지않이 함으로 鄕人이 善者를 慕하고 善치않은 者를 忌하여、그 知己의 勤嚴을 制除하니 公이 平素에 어지고 어지지않은것을 嘆服한 故로 能히 濁世에 處해도 怨과 禍가 몸에 미치지 못한것은 可히 崇尙할 바다. 이제 드구나 渾濁한 時代에 特히 獨行한 선비가 우리國家의 사람들을 取하고 모든 科目과 모든 法典을 蒐逸한 것이 멀리 보지못 함으로 선비들의 포부와 志行과 名譽가 埋没해서 無稱者가 손을 해아릴수 없으니 이것에 可히 嘆息할 일이라 옛날에 川西公의 孝友와 交行에 廉 謹하고 醇雅한것이 儒林의 重望으로서 卒然히 이에 黃藪의 命을 蓬蒿아래다 하 였으니 公의 出天之孝誠과 高世의 行과 懷宝와 隱德을 埋没에 나타내지않이 하여 草木을 더불어 같이 썩어니 可히 아프고 可히 아프다 이제 致弘의 소매에 감춘 家狀一通이 나에게 實記文字를 付託함으로 나의 力量으로서는 敢히 얻지못하고 原狀을 生覺하여 中略 그대로 적고 다음 世에 志行을 위와같이 當世秉筆之士가 兼備할 것을 撰하고 물러가노라.
  상지(上之) 8년(八年) 무진(戊辰) 9월(九月) 일(日) 척기(戚記)2) 윤동헌(尹東憲) 근장(謹狀)

1)
정응태 무고사건: 조선 선조 31년(1598) 명나라 간신 정응태(丁應泰)가 명 황제 만력제에게 조선을 무고한 사건으로 류성룡이 실각하고 북인이 집권하는 계기가 된 사건 중 하나다. 정응태가 양호를 탄핵하였는데 조선은 양호와 가까웠기 때문에 양호를 옹호하였다. 그러자 정응태가 화를 내어 조선을 무고한 것이다. 조선이 해명함으로서 일이 해결되었고 정응태는 파직되고 쫒겨나는 것으로 마무리 지어졌다.
2)
척하(戚下): 성(姓)이 다른 겨레붙이를 상대(相對)하여 자기(自己)를 낮추어 이르는 일인칭(一人稱) 대명사(代名詞).
b-057.1748477496.txt.gz · 마지막으로 수정됨: 2025/05/29 09:11 저자 ssio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