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이전 판입니다!
송암황재철효행록(松巖黃載喆孝行錄)
송암(松巖) 황재철(黃載喆)의 효행록(孝行錄)*
공(公)의 휘(諱)는 재철(載喆)이요 자(字)는 내순(乃順)이며 성(姓)은 황씨(黃
氏)이니 평해황씨(平海黃氏)이다.
대대로 영천군(永川君) 명산면(鳴山面) 죽곡리(竹谷里)에 살았는데 어릴 때부터
효성이 있어서 이상한 과일이나 맛 좋은 음식을 얻으면 반드시 부모에게
진상(進上)했으며 장성(長成)하여서는 더욱 어버이 섬기는 도리를 알아 모든 일은
먼저 부모의 뜻에 따라 순하게 행동했으며 일찍이 부모의 곁에 모시고 있다가
물러가라는 명(命)이 없으면 감히 나가지 못했으며 세시(歲時)인 복(伏)과
납일(臘日)에는 반드시 주석(酒席)을 마련하고 아버지의 연배(年輩) 친구들을
맞이하여 환담(歡談)하고 웃는 것을 즐겁게 보았으며 춥고 따뜻한 기후에 따라
반드시 몸에 맞는 의복을 드리며 방을 따뜻하게 불을 지필 때에도 부엌 사람에게
시키지 않고 아침 저녁의 밥상의 반찬을 보아 비록 흉년이 들어도 맛있는 음식이
빠지지 않았고 속옷과 뒷간이 더러워지면 스스로 빨래하고 청소하여 부모님이
모르게 했다.
부모님이 병이 들면 뛰어다니지도 않고 잇몸을 드러내어 웃지도 않았으며 옷의
띠를 푸는 일 없이 근심으로 방황하며 가슴 태우고 목욕재계하여 자기가 그 병을
대신하여 알겠다고 빌면서 극도의 방법을 쓰지 않은 것이 없었다.
바야흐로 선친(先親)이 질병이 있을 때에 똥을 맛보아 그 맛이 쓰면 근심하는
기색을 조금 늦추었으며 선친(先親)께서 겨울에 자라 고기를 먹고 싶어 함을 알고
개울과 못을 방황하며 울고 눈물 흘리며 힘을 다하여 찾으니 홀연히 한 마리의
자라가 어른어른 개울가의 모래 속에서 나왔다. 드디어 그것을 삶아 올려서
드시게 하니 병이 조금 나아져서 이웃과 마을 사람들이 놀라 감탄하면서 효성에
감동(感動)된 소치라고 생각했다. 부모님의 상(喪)을 당해서는 부르짖으며
호곡(號哭)하고 땅을 치며 가슴쳐서 몇번이나 혼절했다가 살아났으며 물과 장을
입에 넣지 않고 몸에 붙이고 다닌 장신구(裝身具)도 반드시 정성스럽고 삼가서
후회가 없도록 했다. 삼년상(三年喪)을 마칠 때까지 내당(內堂)에 들어가지
않고 상복(喪服)과 수요질(首腰絰)주1을 벗는 일이 없이 여막(盧幕)에 짚자리를
깔고 의지하고 묘막(墓幕)에서 잠을 빌리다가 새벽 닭이 울면 빈소에 아침
상식(上食)을 드리고 하늘이 밝기를 기다리지 않고 묘소에 가서 신혼곡(晨昏哭)주2
예(禮)를 빈청(殯廳)과 병행(竝行)하니 묘소를 다닌 가시 길이 신발에 눌려
오솔길이 되었으며 묘계(墓階)에 절하던 무릅 자리에는 움푹 뚫리고 풀 위에 맺힌
이슬에는 그의 슬픈 눈물을 보는 듯하고 숲 사이를 스치는 바람 소리에는 그의
애곡(哀哭) 소리가 들리는 듯하여 나무꾼 아이와 소 먹이는 늙은이들이 모두
탄식하며 말하기를 이것은 효자 아무개의 자취라고 말했으니 그 또한
조상(吊喪)하는 사람들도 그의 효행을 크게 흡족하게 생각한다는 뜻이 아니겠는가.
27일(二十七日)에 상기(喪期)가 벌써 끝나게 됨에 이르러서는 기제일(忌祭日)을 당해도
예(禮)를 극진히 하기를 전일과 같이 했으나 아! 애통하고 애통하도다.
공(公)이 궁촌(窮村)에서 생장(生長)하여 무슨 견문(見聞)이 있었기에 효성이
독실하기를 능히 이같이 할 수 있었는가? 공자(孔子)가 말씀하시기를 그림을
그릴 때에 채색(彩色)을 마치고 흰 가루로 바탕을 칠해야 완성한다(論語에 있는
말) 하셨으니 대체로 바탕이 있은 뒤에 학문(學文)을 베푼다는 말이다.
공(公)은 본질(本質)을 두텁게 타고 났으니 진실로 뜻을 펴서 의귀(依歸)할
스승을 만나 그의 짧은 학문(學問)을 구제했더라면 그의 성취(成就)할 바가 어찌
다만 궁벽(窮僻)한 산촌의 한 사람의 효자가 되었을 뿐이겠는가.
문소(聞韶) 김헌주(金獻周) 삼가 짓다.
주1. 수요질(首腰絰): 상주가 상복을 입고 머리와 허리에 두른 짚과 삼으로 만든 둥근테
주2. 신혼곡(晨昏哭): 상주가 아침과 저녁에 영위(靈位)에 절하며 우는 곡(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