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증이조판서행사간죽람황공묘표(贈吏曹判書行司諫竹覽黃公墓表)
贈吏曹判書行司諫竹覽黃公墓表 永川治北魯柯之谷有向午而封者故司諫 贈判書平海黃公巾寫之藏而 貞夫人全州崔氏合封之原也舊有短碣爲風雨所剝落苔痕烏跡幾不能保 有真面后孫履龜相燮履喆爲是之惧將謀改堅淸表其墓余推鄉隣之誼豈 可以不文辭謹按公諱欽改鋼字敏中竹覽其號也生 宜廟癸卯丙子中生 員 除順陵參奉 仁廟庚辰擢別試文科自玉堂歷司諫見時事多艱不樂 仕進退居竹谷脩然爲終老計乙卯某月終于寢壽七十三肅宗庚申追贈 長銓盖殊恩也公之居官履歷稽諸國乘有學識超倫誠孝出天八字赫赫然 照人耳目雖其兵燹之餘文獻無徵而此可以緊見公生平也盖平海之黃著 於東方者皆以學士公洛爲鼻祖而高麗金吾將軍太子檢校溫仁之后也中 祖有諱瑞金紫光祿大夫評理門下侍中封平海君陞縣爲郡歷九世諱瑀星 州牧使諱應淸逸薦真寶縣監學行純篤世稱大海先生亨明溪書院諱居一 贈工議有文行從兄海月先生稱以三珠弟寔公之祖曾高也考諱中信生員 早遊旅軒張先生門得聞爲己之學丙子之亂赴暘溪鄭公好仁陣參四難倡
義實蹟載郡誌及諸子錄她安東權氏曾參判東峯諱克立之女盖先公從 於陵而居遂爲永人生五男曰鋼即公也日鏸曰鋌曰謚曰鎮其次也公無嗣 以仲弟鏈之子永河爲后文科文義縣令永河男壽吉進士蔭淸州牧使弟錄 如右書之于陰 烏川鄭致埏謹撰 이조판서(吏曹判書)에 증직(贈職)되고 사간(司諫) 벼슬에 행직(行 職)된 죽림(竹覽) 황공(黃公)의 묘표(墓表) 영천군(永川郡)의 북쪽 노가곡(魯柯谷)에 오향(午向)의 봉분(封墳)이 있는 것은 고인(故人)이 된 사간(司諫) 벼슬을 하고 판서(判書)에 증직(贈職)된 평 해황공(平海黃公)의 묘(墓)이며 정부인(貞夫人)인 전주최씨(全州崔氏)와 합봉 (合封)한 둔덕이다. 옛날에 작은 비석(碑石)이 있었는데 비바람에 깎이고 이끼의 흔적과 새의 발 자극으로 거의 비석의 면목(面目)을 보조하지 못하게 되는 후손(後孫)인 이구 (履龜)와 상섭(相燮)과 이철(履喆)씨가 그것을 두려워 하여 장차 개갈(改碣)할 계획으로 그 묘도(墓道)에 맑게 표시할 갈문(碣文)을 나에게 부탁하는지라 내가
향주(鄉中)의 이웃마을에 사는 정의(情誼)로서 어떻게 글이 안된다고 사양하 겠는가 삼가 상고(詳考)해 보니 공(公)의 휘(諱)는 흠(欽)이었는데 윤(鋼)으로 고쳤으며 자(字)는 민중(敏中)이요 죽림(竹覽)이 그의 호(號)이다 선조(宣祖)三十六년 계모(癸卯)(一六〇三)에 출생하여 인조(仁祖) 十四년 병 자(丙子)(一六三六)에 생원시(生員試)에 합격하고 순능참봉(順陵參奉)에 제 수되었으며 인조(仁祖) 十八년 경진(庚辰)(一六四○)에 별시(別試)의 문과(文 科)에 발탁(拔濯)되어 성균관(成均館)을 비록하여 사간(司諫)을 역임(歷任)하 였으나 그 시대의 사세(事勢)가 많이 어렵게 됨을 보고 벼슬에 나아감을 글지지 않고 죽곡(竹谷)에 물러나 살면서 문득 늙어 세상을 마칠 때까지 살 계획었는데 숙종(肅宗) 一년 을묘(乙卯)(一六七五)에 정침(正寢)에서 세상을 마치니 七十 三세의 수(壽)를 누렸는데 숙종(肅宗) 경신년에 이조판조(吏曹判書)에 추증(追 贈)되었으니 대체로 특별한 은전(恩典)이었다. 공(公)의 관직생활(官職生活)의 이력(履歷)은 국사(國史)를 상고해 보면 학식 (學識)이 특별히 뛰어나고 천성(天性)으로 타고난 효성었다는(學識超倫誠孝 出天) 여덟글자가 사람들의 이목(耳目)에 빛나고 있으니 비록 그 병란(兵亂)을 겪은 나머지 문헌(文獻)이 없어져서 증거로 내새우지는 못하지만 이것만으로도 공(公)의 평생이력의 대략은 볼 수 있다.
대체로 평해황씨(平海黃氏)는 동방(東方)에 드러난 성씨(姓氏)이니 모두 학사 공(學士公)인 휘(諱)는 락(洛)이 시조가 되며 고려때에 벼슬이 금오장군(金吾 將軍) 태자검교(太子檢校)였던 휘(諱) 온인(溫仁)의 후예이다. 증세(中世)의 조상(祖上)으로는 휘 서(瑞)는 벼슬이 금자광록대부(金紫光祿大 夫) 평리문하시중(評理門下侍中)이며 평해군(平海郡)에 봉해져서 평해현(平海 縣)을 군(郡)으로 승격시켰다. 구대(九代)를 내려서 휘 우(瑀)는 성주목사(星州牧使)였으며 휘 응청(應淸)은 유일(遺逸)로 천거되어 진보현감(眞寶縣監)을 지냈으며 학행(學行)이 순수(純 粹)하고 독실하여 세상에서 대해선생(大海先生)이라고 칭하며 명계서원(明溪 書院)에 제향되고 있다. 휘(諱)는 거일(居一)은 공조참의(工曹參議)에 증직(贈職)되고 학문(學問)과 행 의(行義)가 있어서 종형(從兄)인 해월선생(海月先生)이 삼주제(三珠弟)라고 칭 찬했으니 이 세 어른이 공의 고조(高祖)와 증조(曾祖)와 조부(祖父)가 되신다. 아버지의 휘(諱)는 중신(中信)이니 생원(生員)으로서 일찍이 장려헌선생(張旅 軒先生)의 문하(門下)에 유학하여 자신을 위하는 학문을 들을 수 있었으며 병 자호란(丙子胡亂)이 일어났을 때에는 호(號)가 양계(暘溪)인 정공(鄭公) 호인 (好仁)의 진지(陣地)에 들어가 사난창의(四難倡義)에 참가하여 실적(實蹟)이
영천군지(永川郡誌)와 참가했던 여러사람들의 기록에 실려있다. 어머니는 안동권씨(安東權氏)이니 참찬(參贊)에 증직(贈職)되고 호는 동봉(東 峯)이며 휘는 극립(克立)의 따님이니 대체로 선공(先公)께서 처향(妻鄕)을 따라 살았기 때문에 드디어 영천(永川)사람이 되었다. 아들 아섯을 낳았으니 윤(鋼)은 곧 공(公)이요 다음은 혜(魏)요 다음은 정(鍵) 이며 다음은 일(鎰)이요 다음은 진(鎭)이다. 공(公)은 후사(後嗣)가 없어서 다음 동생(鏸)의 아들 영하(永河)를 입후(入後) 했는데 문과(文科)에 급제하여 문의현령(文義縣令)을 지냈으며 영하(永河)의 아들 수길(壽吉)은 진사(進士)가 되고 음사(蔭仕)로 청주목사(淸州牧使)를 지 냈다 차례로 오른쪽과 같이 기록하여 묘비(墓碑)의 뒷 면(面)에 쓰다. 오천(烏川) 정치연(鄭致珽) 삼가 짓다. 註一。三珠弟:唐나라의 王勃과 王劇과 王動 三兄弟의 재주가 모두 特出했다는 대서 온 말 二。蔭 仕:父、祖의 功德으로 얻은 벼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