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증통정대부산월평해황공휘종운묘갈명(贈通政大夫山月平海黃公諱鍾運墓碣銘)
증통정대부(贈通政大夫) 호(號) 월산(月山) 평해황공(平海黃公)
휘(諱) 종운(鐘運)의 묘갈명(墓碣銘)
공(公)의 휘(諱)는 종운(鐘運)이요 호(號)는 월산(月山)이며 성(姓)은
황씨(黃氏)이니 시조(始祖)이신 학사(學士)벼슬을 한 휘(諱) 락(洛)께서
중국(中國)으로부터 처음 평해(平海)에 와서 살았기 때문에 거기를 관향(貫鄕)으로 했다.
증세(中世)에 휘(諱) 서(瑞)가 있으니 고려(高麗)에 출사(出仕)하여 벼슬이
시중(侍中)에 이르러 익대공신(翊戴功臣)으로서 평해현(平海縣)을 군(郡)으로
승격(昇格)시켰으며 시호(諡號)를 문절(文節)이라 했다.
조선조(朝鮮朝)에 들어와서 휘(諱) 옥숭(玉崇)은 한성판윤(漢城判尹)을 지냈으며
삼대(三代)를 지나서 휘(諱) 도일(道一)은 학행(學行)이 높은 때문에 별제(別提)
벼슬에 천거(薦擧)되었고 아들의 휘(諱)는 중식(中寔)이니 통정대부(通政大夫)에
올랐고 아들의 휘(諱)는 명하(命河)이며 호(號)는 해헌(懈軒)이니
문장(文章)과 덕행(德行)이 당세(當世)를 울렸으며 공(公)에게는 6대조(六代祖)가
되신다.
고조(高祖)의 휘(諱)는 처오(處五)이며 지행(志行)과 문장(文章)으로 명망(名望)이
있어서 향중(鄕中)에서 추중(推重)되었으며 증조(曾祖)의 휘(諱)는 정찬(廷燈)이요
조부(祖父)의 휘(諱)는 치한(致漢)이며 아버지의 휘(諱)는 이구(履九)이니
천품과 덕(德)이 많고 기국(器局)과 도량(度量)이 크고 넓었다.
어머니는 진성이씨(眞城李氏)이니 종태(宗泰)의 따님으로서 부덕(婦德)이 있었다.
경인년(庚寅年) 2(二)월 9(九)일에 공(公)을 온정리(溫井里)의 집에서 낳으니
정제(精製)한 금과 같이 아름다운 자질이었고 가을 달과 같은 맑은 정신(精神)이었으며
눈빛이 번개같고 말소리가 우뢰같이 웅장했다.
총명하고 민첩하며 독서(讀書)를 좋아 하여 위로는 공자(孔子)를 스승으로 하고
아래로는 여러 현인(賢人)들을 벗으로 하여 인의(仁義)의 근원을 살피고 예악(禮樂)의
단서(端緖)를 탐구(探究)하여 법도(法度)에 따라 행동하고 정성스럽고
정직한 것으로 자신(自身)을 바로잡으며 언론(言論)이 바르고 무거우니 군자(君子)들은
믿는 바가 있게 되어 두려워 하지 않고 소인(小人)들은 두려워 하는
바가 있어서 악(惡)을 행하지 않게 되었다.
천품이 뛰어나고 덕행(德行)이 어질고 곧았으며 깨끗한 외모(外貌)에 맑은
기상(氣像)으로 마치 푸른 소나무 숲에 천년을 서식(棲息)하는 선학(仙鶴)에서
나온 한 빛깔의 좋은 옥과 같았다.
생활이 궁해도 스스로 괴로워하지 않고 빈곤해도 스스로 근심하지 않았으며
마음은 노을과 바위가 아름다운 자연의 세계(世界)에서 놀았고 회포(懷抱)는
천지(天地) 밖 무형계(無形界)에서 넓었다.
보통사람들과 함께 있어도 그 안색(顔色)은 스스로 만족하고 현자(賢者)들과
더불어 벗할 때에도 그의 말은 강직했으며 그가 의리(義理)를 판단함과 시비(是非)를
명백(明白)히 함도 한결같이 대도(大道)에 맞게 하여 사람들을 마음으로
복종(服從)케 하니 향방(鄕邦)의 사우(士友)들은 비호(庇護)를 받기를 바랬었다.
대로(大老)의 나이 때문에 늙은 이를 우대하는 은전(恩典)을 입어
통정대부(通政大夫)의 수직(壽職)이 제수(除授)되어 관(冠)의 꼭대기에 달린 정옥(頂玉)이
영광(榮光)을 수놓았으니 대체로 공의 청복(淸福)이었다. 경술년(庚戌年) 10(十)월
30(三十)일에 자리를 정제(整齊)한 뒤에 누워 편안히 서거(逝去)했으니 이것이
군자(君子)의 마지막인 것이다.
81(八十一)세를 향수(享壽)하여 선미(仙味)의 앞산 오좌(午坐)의 둔덕에 묘를 썼으며
배위(配位)는 의성김씨(義城金氏)이니 정수(禎壽)의 따님이었는데 자식을 두지
못했다. 둘째 배위(配位)는 전의이씨(全義李氏)이니 명규(明圭)의 따님이며 묘는 남아(南阿)의
춘정(春井) 경좌(庚坐)에 있다.
아들 둘과 딸 하나를 두었으니 아들은 상장(相璋)과 상진(相璡)이며 딸은
안명선(安明善)에게 출가했고 셋째 배위(配位)는 김해김씨(金海金氏)로서 아들
하나를 두었으니 상거(相琚)이다.
상장(相璋)의 아들은 경(暻)과 호(昈)이며 딸은 남재철(南載哲)에게 시집갔고
상진(相璡)의 아들은 성(星)과 왕(旺)이며 딸은 백남선(白南璇)과 장무(張懋)와
권상성(權相善)에게 출가했고 상거(相琚)의 아들은 광일(光日)과 붕선(朋善)과
오선(晤善)이요 딸은 강시만(姜始萬)에게 출가했으며 경(暻)의 아들은 학규(鶴圭)와
봉규(鳳圭)이고 딸은 김시무(金時無)와 안두원(安斗源)에게 출가했으며
성(星)의 아들은 석규(碩圭)와 대규(大圭)이다.
왕(旺)의 아들은 찬규(燦圭)와 성규(聖圭)이며 딸은 김성규(金盛奎)와
김원찬(金元燦)과 박문홍(朴文弘)에게 출가했고 광일(光日)의 아들은 희곤(熙坤)과
동곤(東坤)과 익곤(益坤)이며 딸은 김무공(金武功)과 권동충(權東忠)과
정남석(鄭南石)에게 출가했고 붕선(朋善)의 아들은 춘길(春吉)과 재덕(在德)과
정수(貞洙)이며 딸은 윤연식(尹年植)에게 출가했다.
오선(晤善)의 아들은 운곤(雲坤)과 학곤(鶴坤)과 인곤(仁坤)이며 학규(鶴圭)의
아들은 진학(鎭鶴)과 진명(鎭明)과 진호(鎭浩)와 진운(鎭雲)이며 딸은
박남철(朴南喆)에게 출가했다.
봉규(鳳圭)의 아들은 진석(鎭碩)이며 딸은 남중칠(南重七)과 권찬일(權燦日)에게
출가했고 석규(碩圭)의 아들은 진국(鎭國)과 진낙(鎭樂)과 국발(國發)이며
대규(大圭)의 아들은 광성(光星)이요 찬규(燦圭)의 아들은 호춘(鎬春)과
호정(鎬正)이며 성규(聖圭)의 아들은 진인(鎭寅)이요 희곤(熙坤)의 아들은 진달(鎭達)과
진현(鎭鉉)과 진호(震虎)와 진철(鎭撤)과 진원(鎭元)이며 동곤(東坤)의
아들은 진흥(鎭興)과 진근(鎭根)과 진수(鎭洙)이고 익곤(益坤)의 아들은
재순(載舜)이며 춘길(春吉)의 아들은 경진(慶眞)이요 운곤(雲坤)의 아들은
진훈(鎭勳)이며 진학(鎭鶴)의 아들은 원순(愿淳)과 의순(義淳)과 동순(東淳)이요 딸은
우봉성(禹奉成)에게 출가했다.
진명(鎭明)의 아들은 정순(正淳)과 효순(孝淳)이요 진석(鎭碩)의 아들은
재순(載淳)이고 의순(義淳)의 아들은 영식(映植)이며 나머지는 기록하지 않는다.
어느날 공의 사손(嗣孫)인 진학(鎭鶴)씨가 나에게 묘갈명(墓碣銘)을 지어 달라고
청하는지라 나 같은 글이 짧은 사람이 어떻게 감히 대현군자(大賢君子)의
덕행(德行)을 만분일(萬分一)이라도 서술하겠는가 하고 고집스레 사양했으나 되지
않아서 드디어 명(銘)을 말하노니
其氣豪英 그의 기개(氣槪)는 호탕하고 영걸(英傑)했으며
其學文章 그의 학문(學問)은 큰 문장(文章)이었다.
淸風明月 청풍명월(淸風明月)같은 풍모(風貌)이었고
玉色金聲 구슬같이 깨끗했고 쇠소리같이 쟁쟁했다.
矩方規圓 규구(規矩)주1를 법도(法度)로 처신(處身)하였고
準眞繩平 준승(準繩)주2같이 바른 행동이었다.
賢聖之訓 성현(聖賢)의 훈계를 배우고 따르니
君子之行 군자(君子)가 지켜나갈 행의(行義)이었다.
大耊高齡 80(八十)세를 넘기는 높은 나이로
優老典蒙 수직(壽職)의 은전(恩典)으로 통정(通政)에 올랐다.
刻之玉石 구슬같은 비석(碑石)에 행적(行蹟)을 새기니
千古芳名 꽃다운 이름은 천추(千秋)에 전해지리.
신미(辛未)년 12(十二)월 겨울에 김녕(金寧) 김병익(金炳翊) 삼가 짓다.
주1. 규구(規矩): 일상생활(日常生活)에 지켜야 할 법도(法度)
주2. 준승(準繩): 수평을 헤아리는 수평(水平)과 직선(直線)을 정(定)하는 먹줄(일정(一定)한 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