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이전 판입니다!
문절공신도비문(文節公神道碑銘)
문절공(文節公) 신도비명(神道碑銘) 서문과 함께
공(公)의 성(姓)은 황씨(黃氏)로 휘(諱)는 서(瑞)이니 고려(高麗)의
충렬왕(忠烈王) 때에 세자(世子)를 위하여 원(元)나라 조정에 세번 들어갔으며
익대공신(翊戴功臣)으로 금자광록대부(金紫光祿大夫)의 품계(品偕)에 올라
금어대첨의(金漁黛僉議) 평리문하시중(評理門下侍中) 벼슬을 했으며 충절공(忠節公)의
시호(諡號)를 받았다고 족보(族譜)에 실려 있다.
또 고려의 문헌통고(文獻通考)를 살펴보면 첨의(僉議)벼슬을 한 주열(朱悅)과
좌정승(左政丞)을 지낸 한종유(韓宗愈)와 지첨의(知僉議) 벼슬을 한
황서(黃瑞)와 전서(典書) 벼슬을 한 양사도(梁思道)와 시중(侍中) 벼슬을 한
차원조(車原頫) 다섯 사람이 동시에 문절공(文節公)의 시호(諡號)를 받은 것은 가히
증명되겠는데 충(忠)을 써 문(文)으로 고친 것을 위선(衛先)하는 도리에 있어서는
거의 해로울 것이 없으리라.
시조(始祖)의 휘(諱)는 낙(洛)이니 한(漢)나라 성제(成帝) 건시(建始)
3(三)년(서기전 30(三○)년) 신묘에 출생하시고 신라(新羅) 시조(始祖) 50(五十)년(서기전 1년)
계축에 대장군(大將軍)으로서 강하후(江夏侯)에 봉(封)해지고 광무건무(光武建武)
4(四)년(신라 유리왕 5(五)년) 무자에 복야(僕射) 벼슬에 있던 구대림(丘大林)과 더불어
동국(東國)으로 나와서 평해(平海)의 월송(月松) 굴정리(掘井里)에 터를 잡아
살았으니 평해는 옛날 기성(箕城)이다.
휘(諱) 갑고(甲古)와 을고(古)와 병고(丙古) 삼형제를 낳았는데,
갑고(甲古)는 고구려(高句麗)의 민중왕(閔中王)이 기성군(箕城君)으로 봉(封)하였고
을고(乙古)는 백제(百濟)의 다루왕(多婁王)이 장수군(長水君)으로 봉(封)하였고
병고(丙古)는 신라(新羅)의 유리왕(儒理王)이 창원백(昌原伯)을 봉하였다.
갑고(甲古)에게 아들 하나가 있으니 휘(諱)는 온인(溫仁)이요 벼슬은
금오장군(金吾將軍) 태자검교(太子檢校)였으니 이 어른이 평해황씨(平海黃氏)의
선조(先祖)이다.
한 대(代)를 건너서 휘(諱)는 유중(裕中)이요 벼슬은 문하시중(門下侍中)이었던
분이 아들 삼형제를 두었으니 맏이는 진(璡)이니 검교군기감(檢校軍器監) 벼슬을
했고, 셋째는 용(𤨭)이니 벼슬은 숭록대부(崇祿大夫) 삼중대광보극(三重大匡輔國)이요
시호(諡號)는 충경공(忠敬公)이며, 둘째가 바로 공(公)이다. 공의 일가(一家)가
관작(官爵)과 복록(福祿)의 영관이 그렇게도 혁혁했는데 어쩐 일인지
침체하여 나타나지 못한 것이 자손들의 한(恨)을 깊게 했던 것이다.
자고(自古)로 나라가 잘 다스려지고 어지러운 것이 일정(一定)치 않고 사람의
일도 흥(興)하고 쇠퇴해 지는 것은 명수(命數)에 달려 있는 것인데 또 세월이
오래 되어 선대(先代)의 사적(事蹟)들을 징신(微信)할 길이 없으니 비록 효성스럽고
자애로운 자손이 있다 하여도 세대(世代)가 멀어서 고증(考證)할 수 없는
사적(事蹟)을 밝혀 후세에 전해 줄 수 없는 것이다.
그러나 그 후손들이 보본(報本)하려는 뜻에 있어서는 또한 조상(祖上)을
추모(追慕)하는 뜻을 붙여 높이 받들어 정성을 기울일 곳이 없을 수 없다. 그래서
원근(遠近)에 사는 여러 후손들이 신도비(神道碑)를 세우기로 공의(公議)하고
행장((行狀)의 글을 받들고 세명(世明)을 나 종호(從鎬)에게 보내어 말하기를
“저의 선조(先祖)님의 관작(官爵)과 시호(諡號)의 영예는 보첩(譜牒)과
고려사(高麗史)에 간략하게 전해지고 있으나 전현(前賢)들의 손에서는 그 당시의
어질고 빛나는 사행(事行)은 하나도 고증(考證)할 자료가 전해지는 것이 없습니다.
간혹 전래(傳來)되어 오는 말은 있으나 그 또한 취신(取信)할 수 없으니
귀인(貴人)께서 고명(高明)하신 글로 상하를 참작하여 징신(證信)할 기록들을 근거로
후세에 무궁토록 전해질 수 있게 하여 주십시요” 하는지라
내가 정신력도 줄고 병으로 신음하는 중이므로 이 부탁은 감당할 수 없다고
두세번 사양했으나 되지 않았다.
삼가 가지고 온 행장(行狀)을 다듬어 밝혀보니 공(公)은 고려의 충렬왕(忠烈王)과
충혜왕(忠惠王)과 충숙왕(忠肅王)과 충목왕(忠穆王)의 네 왕조(王朝)를 섬겨
왕명(王命)으로 31(三十一)회나 원(元)나라에 들어간 공이 있어 익대공신(翊戴功臣)의
은전(恩典)을 받았으니 임금에게 충성한 높은 덕망과 좋은 말씀과 착한
행의(行義)를 만분지 일이라도 추상할 수 있다.
또 가문(家門)을 빛낸 분으로 드러난 조상(祖上)은 조부(祖父)인 우정(佑精)은
벼슬이 군기소윤(軍器少尹)이었고 아버지 유중(裕中)은 벼슬이 문하시중(門下侍中)이었으며
아들 종량(宗亮)은 벼슬이 호부전서(戶部典書)였고 손자 세영(世英)은
진사(進士)를 거쳐 벼슬이 예빈시동정(禮賓寺同正)이며 일찍이 두 아들이
있어서 용기(龍起)는 벼슬이 예빈정(禮賓正)이었고 운기(雲起)는 벼슬이
내자소윤(內資少尹)이며 용기(龍起)에게는 아들 셋이 있으니 길보(吉甫)는
병사(兵使)였고 계보(季甫)는 보승랑장(保勝郞將)이었으며 유보(有甫)는
중랑장(中郞將)이었다. 길보(吉甫)의 아들 득재(得載)는 함풍현감(咸豊縣監)이었고
득중(得重)은 호조좌랑(戶曹佐郞)이었으며 유보(有甫)의 아들 후(厚)는
예빈판관(禮賓判官)이었고 득재(得載)의 아들 옥숭(玉崇)은
한성판윤(漢城判尹)이었으며 후(厚)의 아들 옥산(玉山)은 예빈참봉(禮賓參奉)이었고
옥강(玉崗)
호(號)가 삼우당(三友堂)이니 습독(習讀) 벼슬을 했으며 옥숭(玉崇)의
아들 보곤(輔坤)은 생원(生員)이었고 아들 우(瑀)는 성주목사(星州牧使)였으며
목사의 동생 찬(瓚)은 안릉참봉(安陵參奉)을 지냈고 다음 연(璉)은 훈도(訓導)를
지냈으며 우(瑀)의 아들은 응하(應河)와 응청(應淸)인데 응청(應淸)은 진사(進士)를
거쳐 벼슬이 진보현감(眞寶縣監)을 지냈으며 명계서원(明溪書院)에
제향(祭享)되고 다음은 응징(應澄)이니 통훈대부(通訓大夫)로
장예원판결사(掌隷院判決事)에 증직(贈職)되었다.
응청(應淸)의 아들 거일(居一)은 공조참의(工曹參議)에 증직(贈職)되었고
다음은 유일(有一)이니 성균정자(成均正字)였으며 다음은 경일(慶一)과
천일(千一)과 억일(億一)이다.
응징(應澄)의 아들 여일(汝一)은 문과급제(文科及第)하여 벼슬이 승지(承旨)와
공조참의(工曹參議)였으며 이조참판(吏曹參判)에 증직(贈職)되었고 찬(瓚)의
아들은 득시(得時)와 득룡(得龍)과 득원(得元)이며 연(璉)의 아들은
응쇄(應碎)와 응정(應挺)과 응탁(應擢)이요 득시(得時)의 아들은 영복(榮福)과
회복(希福)이며 득룡(得龍)의 아들은 춘우(春雨)이고 득원(得元)의 아들은
복수(福檖)이며 응쇄(應碎)의 아들은 춘일(春一)이요 응탁(應擢)의 아들은 도일(道一)과
승일(承一)이며 득중(得重)의 아들은 옥견(玉堅)이요 그 아들은 세복(世福)이며
그 아들은 영(瑛)이요 그 아들은 맹춘(孟春)과 중춘(仲春)과 계춘(李春)인데
계춘(季春)은 원주판관(原州判官)을 지냈으며 그 아들 하수(河壽)는
성균생원(成均生員)이었고 옥산(玉山)의 아들은 인석(麟碩)과 구석(龜碩)과
계석(季碩)이니 인석(麟碩)의 아들 한좌(漢佐)는 진사(進士)를 했고 다음은 한필(漢弼)과
한우(漢佑)와 한창(漢昌)이다. 구석(龜碩)의 아들은 한보(漢輔)이며
계석(季碩)의 아들은 한침(漢忱)과 한좌(漢佐)이니 한좌(漢佐)의 아들은 세원(世元)과
준(浚)이요 한필(漢弼)의 아들은 세환(世還)이고 한우(漢佑)의 아들은
응종(應悰)이며 한창(漢昌)의 아들은 응만(應萬)이다.
한보(漢輔)의 아들은 응경(應敬)이며 한침(漢忱)의 아들은 준(俊)이요
옥강(玉崗)의 아들 영(英)은 통훈대부(通訓大夫)의 품계로 예천군수(醴泉郡守)의
행직(行職)을 지냈으며 그 아들 혁(革)은 가선대부(嘉善大夫)에 증직(贈職)되고
홍천현령(洪川縣令)의 행직(行職)을 지냈으며 아들은 중추(仲秋)와
계추(李秋)이다. 한좌(漢佐)의 아들 세원(世元)은 문과급제(文科及第)와 진사(進士)를
했으며 그 아들 민천(敏洤)은 선무랑(宣務郞)이었고 준(浚)은 자헌대부(資憲大夫)의
품계(品偕)로 의금부도사(義禁府都事)를 지냈으며 그 아들 삼계(三繼)는
통정대부(通政大夫)의 품계로 원주목사(原州牧使)를 지냈고 다음 중숙(重淑)은
통덕랑(通德郞)이었다.
세환(世還)의 아들 성승(成承)은 예빈시(禮賓寺)에서 벼슬했고 응종(應棕)의
아들은 모일(模一)과 응만(應萬)인데 응만(應萬)은 비안현감(比安縣監)을 지냈고
아들은 순일(順一)이며 응경(應做)의 아들은 정일(廷一)이요 중추(仲秋)의
아들은 오견(五堅)이며 계추(季秋)의 아들은 천석(天錫)이다.
아! 한 집의 관작(官爵)이 대단하기가 세상에는 그 짝이 될 말한 집이 드물 것이니
빛나는 조상(祖上)이 후손을 이끌게 됨이 이치(理致)로도 혹시 가능하겠는가.
지금 자손이 더욱 번성하지만 조상을 우모(寓慕)할 곳이 없어 공의 신도비(神道碑)를
급급(汲汲)히 서두르게 되었는데 22(二十二)세(世) 주사손(主嗣孫)인 재우(載宇)가
그 일을 맡아 나에게 비명(碑銘)을 청하는지라.
이 청(請)을 어떻게 글이 짧다는 이유로 후생(後生)으로서 끝내 사양할 수
있겠는가. 그 행장(行狀)을 상고(詳考)하여 전말(顚末)을 간략하게 오른쪽과 같이
서술하며 이어서 명(銘)을 말하노니
公生麗世 공(公)은 고려시대에 출생하여
挺資卓然 천품(天禀)이 특출한 자질이었다.
德厚望重 덕망(德望)이 두텁고 무거웠으며
氣淑精全 기상(氣像)은 맑고 정신은 순전하였다.
歷事四朝 네(四) 임금의 조정(朝廷)을 두루 섬기니
忠義孰先 충성스런 의기(義氣)는 누가 앞서랴.
胡元制命 오랑캐 원(元)나라가 명령으로 누르며
威力布宜 위력(威力)으로 천자(天子)임을 선포하였다.
强弱不同 강(强)하고 약(弱)함이 동일(同一)하지 않아서
補藩媤天 원나라의 울타리 된 것은 하늘에 부끄럽다.
扈駕三入 세자(世子)를 모시고 세 번 원(元)에 갔으나
不辱君焉 임금을 욕되게 하지 않았다.
恩賜勳功 은전(恩典)으로 내려진 익대공신(翊戴功臣)은
門戶耀燀 가문(家門)을 빛내는 영광(榮光)이었다.
子孫百代 자자손손(子子孫孫) 백대(百代)를 내려가며
慶流萬年 만년이 되도록 경사(慶事)가 이어지리.
國祚改革 국가(國家)의 운명이 개혁(改革)되어서
人事變遷 인간의 만사(萬事)도 변천하였다.
雪鴻無跡 눈 녹으니 기러기 발자취 없어지고
杞宋无傳 기(杞)나라 송(宋)나라 사적(史蹟)도 전하지 않네.
祖微未闡 빛나는 조상의 사적을 밝히지 않으면
孱孫是愆 후손 된 사람의 과실이로다.
神道立表 신도비(神道碑)를 세워서 드러냄에는
情合事圓 자손의 뜻 서로 맞으니 일도 원만하구나.
琢之貞石 정석(貞石)을 갈고 또 다듬어서
攷蹟深鐫 사적(事蹟)을 기록하고 깊이 새겼다.
龍頭龜跌 용두(龍頭)를 위에 얹고 거북 등에 세워서
永保來千 천년토록 길이길이 보전하리라.
경신년 8(八)월에 진성(眞誠) 이종호(李從鎬) 삼가 짓다.
주1. 기송(杞宋) 무전(无傳): 기(杞)나라는 주(周) 무왕(武王)이 하(夏) 우왕(禹王)의 후예인 동루공(東樓公)으로 하여금 우왕(禹王)의 제사를 지내게 하기 위해 세운 나라이며, 송(宋)은 주(周) 무왕(武王)이 은(殷)의 주왕(紂王)을 멸(滅)하고 주왕(紂王)의 서형(庶兄)인 미자계(微子啓)를 봉(封)하여 탕왕(湯王)외 제사를 지내게 한 나라이나, 그 사적이 모두 전하지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