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駙馬公墓碣時記事
부마공묘갈시기사
공은 즉 太宗의 신숙옹주 부마였으며 병조판서로 증 영의정 휘 象이오 성은 黃이니 唐나라 학사 휘 洛의 후손이라 부
의 휘는 希碩 개국원훈으로 봉평해군하고 증 우의정 시호 양무요 조의 휘는 天祿이니 밀직부사판도판서증영의정이요 비
위는 삼척 朴씨 부정 源祐의 여로써 봉 신혜택주이며 계비는 정경부인 연안李씨 형조전서 琪亨의 여라 신숙옹주 조세하
심에 전주李씨로 재취니 인하야 파尉되어 선원보에 부재라 후에 벼슬이 병조판서니라 태종 九년 문무중시에 사영연을
베픔에 공이 본관으로 연석하였음의 기사가 야승에 보이도다.太祖께서 함흥에 수유중 배환으로 갔던 많은 사신이 돌아
오지 못함으로 太宗이 크게 근심하사 太祖께서 상시 유달리 총애하던 공을 성절진하사로 명하야 국왕이 친히 백관을 거
느리고 혜화문 밖까지 전송해 보내다.太祖에게 진하사를 주상함에 인하야 부자자효의 도리와 종묘사직의 안위가 소관
되는 일임을 고두출혈로 간절히 간언하니 太祖가 또한 손을 잡고 낙누희심하여 환도하기를 결심하고 중외에 선포러니
함흥에 함께하는 제신들이 간언키를 黃공이 芳蕃 죽일것을 선창한자라 생환시킴이 불가라고 함이나 太祖가 양무공과 초
매시에 심기상합하야 나라를 세운 친교로 참아 형을 가할수 없다하야 특별히 문천군수로 봉하였드니 얼마되지 않아 울
분으로 관아에서 생를 마치시니 太祖가 심히 후회하야 영의정을 추증하고 나라의 지관으로 묘지를 가려서 예장으로 특
명함이 동군 초한사 남면 언덕에 정하다. 그리하여 고을 사람들이 그곳을 黃정승묘골이라 이르다. 까닭에 海月선생의
초보서중 黃象의 귀폄우 문천하다 함이라 그후 淑능을 천봉할때 공의 묘소가 너무 가까운고로 국조법도에 따라 천봉 양
주코저 남과 오리허에서 돌연 관구가 무거워 움직일수 없는고로 모두 크게 놀라 영전에 위령제를 올리고 이어 지연을
만들어 띄우니 떨어진곳이 곧 지금의 당우리 甲좌원으로 안장 봉영하다. 그후 공의 영험이 누차 음현하야 묘하의 崔가
성이 암장한 일이며 또는 방손이 입장한것을 현몽하야 호되게 꾸짖어 천굴하였으며 또 산하 가까이에 서당을 지었더니
항시로 존영이 격노하사 불일내 철거하였으며 용호대로지변에 말과 소를 타고 다니는 자가 왕왕 떨어져 상하는 일이 있
음에 세상 사람들이 모두 두려워하고 겁이나서 소나 말를 타고 지나지 못했다는 전설이 지금에도 전하고 있다. 자손이
산거 양주 청안등지라 무릇 五세손인 義山・佐山 또는 이거 관북 관북의 黃씨 또한 그 윗조상은 공이시며 자손이 번연
산재일극하니 거리야 멀고 가까움은 고사하고 널리 분포됨이 감회가 무궁합이라 숙종 庚申에 칠세손이신 壩께서 방어사
로 홍원에 재임 삼년중 壬戌에 비를 개수하였고 또 그후 이십칠년 부사직 震聖께서 봉사초 개갈하고 철종 신유에 후손
敬燮과 더불어 청안 제손이 판치 제전하고 재실을 중수니라。
후예손 사흠(思欽) 근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