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養閒堂墓碣略
先君諱瑁字君玉號養閒堂即開國功臣崇祿大夫 贈右議政諡襄武諱希碩之 六代孫也五代祖諱象 太宗駙馬兵曹判書高祖諱繼祖通訓大夫蔭司直祖諱 詮保功將軍宣傳官 贈通政大夫刑曹參議考諱世通禦侮將軍忠佐衛大護軍 贈嘉善大夫戶曹參判兼同知義禁府事她貞夫人坡平尹氏副正贈領議政昀之 女三陟府使贈左賛成繼興之孫以嘉靖丁亥五月十六日生府君及長天性謹 厚篤信孝友其在閨門動合太和行以順正愷悌雍睦莫有間言宗族歌之其在鄉 黨峻以能容介以能群弘正友道信稱於外厚恤孤弱仁著於內學校敗類躬擅重 修屢有所奏從兄朝天名徹朝著薦奏不一逮至壬辰海寇充斥大駕西巡大
小臣民鳥竄鼠伏之不暇獨我先君與辛靈城君景行糾合義旅先君以留陣將軍 餉不乏時人擬於漢之蕭相國焉官宣略將軍忠佐衛副司果尚州牧不事産業自 甘採釣之樂此先君躐世修已之大祭也 萬曆丁酉季冬癸亥以疾終于枕流亭 享年七十一孤子守身稽首慟哭以銘曰於呼我先不顯其德克開厥後以介景福 萬祀千歲其敢有負琢石記事用圖不朽
양한당묘갈략
선군의 휘는 瑁이요 자는 君玉이며 호는 양한당이라 개국공신 숭록대부 증 우의정 양무공 휘 希碩이라는 분의 六世손
이며 五대조의 휘는 象이신데 太宗의 부마로 병조판서요 고조의 휘는 繼祖이니 통훈대부 음 사직이요 조의 휘는 詮이시
니 보공장군 선전관 증 통정대부 형조참의요 선고의 휘는 世通이니 어모장군 충좌위 대호근 통정대부 형조참의 증 가선
대부 병조참판 겸 동지의금부사요 비는 정부인 파평윤씨니 부정증영의정 晌의 여이며 상척부사증좌찬성 繼興의 손녀라
가정 丁亥(一五二七)五月十六日에 서울 이현에서 출생하사 그 웅장한 모습이 범인같지 않고 자라나며 기이한 재질이
논·맹·시·서를 통달하고 장성하여서는 팔의 힘이 뛰어나 활을 잘쏘고 무예가 놀라우며 또 천성이 근후하고 효심이
지극하야 친우간의 신의가 매우 두터웠다.규문에 있어서는 태화한 동작을 순리와 바른일을 행하고 개재옹목 즉 감동적
이고 애정이 흐르며 화합하고 관용하야 틈있는 말을 들을수 없으며 친척간 찬양은 물론 향당에 있어서도 준엄하며 관용
하는 모습에 모두 존경하고 신뢰함이 컸었다.또 환과 고독과 빈약한자를 불쌍히 여겨 도와주는 온후한 마음이 있었고
학교가 퇴락하자 민부담없이 단독 판출로 누차 수리하였다.백형 휘 瑞는 대사관부제학인바 형님따라 조정에 이르러 중
극조정 인사들에게까지 널리 그 재질과 인품이 알려져 많은 존경을 받으셨다.宣祖 壬辰에 이르러 왜구가 침입하니 국
왕 행차가 서순함에 온나라가 혼란에 빠지고 대소신민이 살길을 찾아 새나 쥐처럼 숨고 굴복하기에 바쁜 지라 선군께서
는 이것을 보시고 의분을 참지 못하야 영성군 辛景行과 더불어 의병을 규합 스스로 유진장으로 군량을 책임져 조금도
부족을 느끼지 않게 하시니 그때 사람들이 이르기를 한나라 蕭何같은이라 하였다. 조정에서 논공하야 시상을 하사하되
사양하고 받지 않은고로 국왕이 듣고 칭찬하야 양한당의 사호를 내리시고 선략장군 충좌위 부사과 상주목사의 벼슬을
제수하였다.선군께서는 가산을 일삼지 아니 하시고 산수를 즐겨 등산과 낚시를 잘다니셨으며 또 집에 있을때에는 친구
들과 시서의 강론과 시회로 항상 즐겨 세월을 보내셨다. 만력 丁酉 十二月 丁巳朔초 七日 계해에 천명으로 침류정에서
향년七十一로 임종하심이라 고자 守身은 계수통곡 銘왈 오! 우리 선고님이시여 높으신 그 덕을 나타내지 아님이시여
후손들의 나아갈 길를 가르치고 큰 복을 받고 누리게 하시니 천년이고 만년이고 어찌 감히 그 큰 은혜를 잊으리오까?
그 사적을 돌비석에 새겨둠은 오래오래 잊지 않으려 함이오이다 여타는 다 기록치 못하노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