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팔경당황처검행장략(八警堂黃處儉行狀略)
팔경당 황처검 행장략
공의 성은 황(黃)이요 휘는 처검(處儉)이며 자는 중소(仲素)니 계출이 평해라.
중조의 휘는 온인(溫仁)이니 여조에 태자검교요, 7세 후에
휘 희석(希碩)은 태조(太祖)를 도와 개국공신으로 봉 평해군하고 시호를 양무라
이 어른의 자 상(象)은 병조판서에 이르렀으나 소도지난으로
문천에 적거하다 병으로 졸하고, 사직 휘 계조(繼祖)에 이르러 한양으로 귀환하여
서울 이현에 살더니, 자에 휘 자중(子中)이 관이 시정으로,
참의 휘 전(詮)을 생하니 이분이 공의 5대조라, 고조의 휘 세통(世通)은 형조참의로
세거 이현하고 문전에 석교가 있는 바,
참의공이 가교한 고로 지금도 세칭 황(黃)참의교라 한다.
증조의 휘는 창(琩)인데 사과니 백형 감사공 서(瑞)로 더불어 청안에
우거하다. 청안은 조비 유씨(柳氏)의 고향이라, 그래서 군방동에 거처를 정하고
당을 지어 당호를 양한당(養閒堂)이라 편액하다. 여기서 은덕불사하니
당세 고위고관들의 많은 송시가 현판에 게시되었더라, 조고의 휘 경신(敬身)은
중추부사니 청주 청천 무릉동에 이거하여, 강변에 정자를 짓고
호를 침류정(枕流亭)이라 하였다. 이 분도 또한 벼슬에 뜻을 두지 않고
이(李)서계 득윤(得胤)으로 더불어 친교를 두터이하며 강론탁마지락을 가졌다한다.
배위는 (李)이승지 묵재 문건(文楗)의 손녀요, 고위의 휘는 일(逸)이니
통덕랑이요, 배위는 병조좌랑 조휴(趙烋)의 녀이니, 공은 그의 4남으로 계부 증 참의 휘 연(𢌪)에게 출계하고, 연(𢌪)도 또한 계부인 진사 휘 수신(守身)에게
출계하였으며, 배위는 사헌부 감찰 노색(盧穡)의 녀요 판서 직(稙)의 질녀(姪女)라,
참의공의 배위는 선전관 윤순(尹淳)의 녀요 판서
한준(韓準)1)의 외손녀라.
공이 숭정(崇禎) 기사(己巳)(1629) 3월 8일에 출생하니 날 때부터 영민하여
범상한 아희들과 다르더니 부모의 사랑이 격별하더라. 장성함에
미촌(渼村) 윤(尹)공에게 학업을 닦다가 다시 우암(尤菴) 송(宋)선생의
문하에 들어가 성리서를
수학하고 도학의 요건을 듣고. 선기옥형지제(璿磯玉衡之制)
즉 천체를 관측하고 일월운행을 계산하는 기기에 대하여 공이
감여간륜도(堪與間輪圖) 즉 천지방위를 측정하는 패철에 비유하니.
선생이 극구 칭찬하기를 지혜롭다 비유함이여 가히 천도를 말할 수 있도다
하더니, 무기(戊己) 년간에 선생이 침류정(枕流亭)에 와서 우거하니
공이 스스로 스승을 모시고 전에 듣지 못하던 바를 듣고, 사제지간의 의(義)가
더욱 두터웠더라, 공이 만년에 군방촌 양한당 근처에 정사를 지으니,
선생이 손수 팔경당(八警堂) 3글자를 써서 현판을 걸어주고 기문을 지어주니,
대개 8경(八警)이란 뜻은 '신묵완인 경직겸고(愼默緩忍 敬直謙固)'인데
8자로 공을 면려함이라. 그 후에 동춘 송(宋)선생 및 이(李)상공 경억(慶億)으로
더불어 침류정에 회동하고, 공이 또 권(權)수암 선생으로 더불어 함께 이들을 모시니,
원근사람들이 듣고 보는 이가 현인군자들이 모였다하더라.
갑을(甲乙) 년간에 우암이 흉도들의 모함을 당하여
해도2)
중으로
귀양가게 됨을 보고, 동지제생으로 더불어 상소를 올려 선생의 억울함을
밝히려하더니 그 뜻을 흔들고 말리는 자 있어, 상소를 드리지 못하니
죽을 때까지 유한이 되었으며, 고묘지론 즉 조정에서 불어 전조의
충신을 처형할 때는, 종묘에 고하는 묘의에서 우암(尤菴)에 대한 죄상을
흉도들이 발론하여 그 통문을 각도에 게시하니, 공이 노상에서 그
게시문을 보고 통곡하고 찢어버리니, 흉도들이 더욱 악의를 품고
공의 명자를 팔도에 통문하여 과거를 보지
못하도록 하였다. 기사(己巳)에 선생의 후명지일 즉 왕이 사약 처분이
있을 때에, 공이 90 편모의 병환이 위급하여 집을 떠날 수 없는 고로,
멀리 나아가지는 못하였으나, 스승의 상복을 사제에서 입고 시신이
돌아오는 날 분곡하고, 평생에 지통지한이
되었다 한다.
일찍이 모부인 윤(尹)씨 상중에 있을 때 간혹 잠결에 생시와
같이 여쭘이 생각나서 모부인 침실로 들어가다가 모부인이 계시지 않는
것을 깨닫고 령연에 들어가 실성통곡하는 일이 있었으니, 이것은 공이
어릴 때부터 윤씨의 교훈을 전적으로 받았고, 특히 윤(尹)씨는 시서백가에
능통하여 자녀교육에 전념한 분이었음으로, 공이 평소에도 학문에
의문이 생할 때는 모부인에게 질정했던 연고더라.
공의 천품이 순수하고
돈후하여 엄정하고 화평하며 관대하나, 위엄이 있으며 언론이
신중하고 처사에 면밀하며, 또 의리를 위하여 용감하여 남에게 성의를 다하고, 부모에게는 효성이 극진하고 상제에 있어서는 예제를 엄격히 준수하여,
선조의 제사를 차손에게 돌리지 않고 단독 봉사하며 종족척당을
어루만지며 도와주고 은혜롭게 돌보며, 극박한 재난이 있을 때는 주선을
몸소하며, 상사에 슬픈 일에는 위문과 제문조례같은 정례를 갖추고, 원근간
친구의 부음을 들은 즉시 자리를 펴고 예곡을 하였으며, 비록 늙어서
병환이 있어도 시종 변함이 없고, 항상 일찍 일어나
세수하고 머리 빗고 의관을 정제하고, 책상 앞에 단정히 앉아 고서에
잠심하며, 비루한 폐담은 입밖에 내지 아니하며 태만한
빛을 신상에 두지 아니하며 대인접물에는 훈훈한 봄바람이 감돌듯하고
집에 항상 빈객이 끊이지 않으며, 그 주식공궤를 하루 같이하고,
또 가법이 엄정하여 자제들을 교훈하되 허물이 있으면 조금도 가차가 없으며,
빈자에게는 힘껏 도와주고, 형제간에 우애함이 천성에서 나오는 것인데,
많은 족제족질들을 출생과 같이하고, 종족 중에 빈궁해서 가취를 못하는
자는 공이 반드시 담당해서 때를 넘기지 않게 하고, 항상 여혼의 초례 날에는
술을 마시지 않고 노래소리를 듣지 아니하고,
수연히 가로되 혼례는 선대의 후사를 있게 함이라 대견스러운 마음이
있어야 한다 하고, 근친 중 사상이 있을 때는 역시
영상범절을 힘껏 도와 대사에 유감이 없게 치루게하며,
마음가짐이 공손하고 근엄하며 논리가 정직하여, 선을 좋아하고
악을 미워하는 것이 지극히 공변됨으로, 사람들이 존경하며 어렵게 여겨
감히 함부로 대하지 못하더라. 그리고 손수 일기를 쓰되 당시의 득실과 인륜 상의
선악을 직필로 쓰고, 죽는 날까지 하루도 간단히 없어 마치 야사같았다 하더라.
만년에는 특히 예기를 좋아하여 깊이 의미를 캐서 반드시
익숙한 해석을 얻은 연후에 과정에 옮기니, 공의 공부하는 태도가
늙을수록 더 독실한 편이었더라.
장언적 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