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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인보서(庚寅譜序)
庚寅譜序
황씨(黃氏)의 본관(本貫)을 평해(平海)로 정(定)한 역사(歷史)는 오랜 옛날이다. 우리 동방(東方) 명문세가(名門世家)들과 함께
덕업문장(德業文章)이 아름다움을 짝을 하여 빛남이
연면(聯綿)하지 아니치 않으나, 다만 병화(兵火)로 보첩(譜牒)을 실소(失燒)하고 그 증거(證據)할 문적(文籍)이 없어,
금계(錦溪) 선생(先生)같이 학식(學識)이 많고 세상사물(世上事物)에 넓게
통달(通達)하신 어른으로서도 오히려 미상(未詳)하심이 있었고, 또 해월(海月) 선조(先祖)의 초보(草譜)에도 의심(疑心)으로
전(傳)함을 탄식(歎息)하신 바 있어 보첩(譜牒)을 즉시(卽時) 인판(印版)에 붙이지 못한 이유(理由)도 여기 있었다.
그러나 국내(國內)의 제종(諸宗)들이 오직 학사공(學士公)이 비조(鼻祖)가 되는 것 만은 모두들 잘 알고 중간(中間) 세차(世次)를
능히 계승(繼承)치 못하는 고로 각파(各派)에서 수록(修錄)한 것이 자연(自然)히 일가보(一家譜)를 이루는데 불과(不過)하였던 것이다.
이러한 것을 금차(今次) 경인보(庚寅譜)로 완성(完成)한 것은 임진왜란(壬辰倭亂)과 병자호란(丙子胡亂)을 치룬 후(後)로부터
국정(國政)이 바로 서고 민심(民心)이 순화(順和)하여 태평세대(泰平世代)로 계속됨이 이미 오래인 고로 병화(兵火) 중(中) 산실(散失)되고
잠적되었던 문자(文字)를 발견(發見)한 것이 흡사 공자(孔子)께서 전하신 고문(古文)이 큰 뱃머리에서 나온 것 같아
금양(錦陽)에 보소(譜所)를 설치(設置)하고 보학(譜學)에 能通한 主幹 鎰○潤德 兩氏의 많은 信籍을 搜索하여
서로 討論하고 考證하며 參酌하여 드디어 合譜를 이룬 것이다. 이로써 錦溪 先生의
상세하지 못한 바를 그 자세한 것으로 이루고 海月 先生의 疑心으로 傳한 바를 밝히게 된
것이니 主幹의 功이 어떠하다 하겠으며 吾宗의 多幸이 이에 더 할 것이겠는가!
비록 그러하나
무릇 天下의 일을 成就함에 있어 모든 것이 하느님의 뜻으로 되는 것이지 어찌 사람의
능한 바라 할 것인가? 譜事가 完成이
된 처음에 序와 跋이 이미 큰 文章들의 솜씨로 부쳤으니 不足한 나로서야 감히 생각조차
못할 일임을 잘 알고 있는 바인데 譜所 宗議가 平海로서도 無言일 수는 없다하며
권고함으로 不得已 辭避치 못하여 두어 줄 글로 記錄하노라.
歲 庚寅 陽月 裔孫 師夏 謹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