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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술검교공파보(壬戌檢校公派譜)
壬戌檢校公派譜
族譜라는 것은 一家의 歷史이다. 그 記載가 不備하면 文獻으로
考證할 수 없고 根源과 分派가 밝지 못하면 人倫의 次序를 펼칠 수 없는
고로 무릇 世間에 姓氏와 族屬이 있는 이는 族譜를 두지 않는 이가 없고
孝悌하는 道理와 敦睦하는 情誼가 여기에서 일어나는 것이니
그 옛날에도 오히려 이러하였거늘 하물며 兄弟長幼의 秩序가
흐려진 이 世代에는 더욱 重하지 아니하랴.
우리 平海黃氏의 族譜는 처음 始作하기를 錦溪 先祖로 부터 비롯하고
先考의 晩年 壬寅年에 이루어졌으며 中間에 續刊과 重刊이 여러 번 있었다.
그러나 平海로 貫鄕을 쓰는 자가 全國에 퍼져살되 世代가 막히고
멀어져서 서로 한낱 길가는 사람처럼 되어 버렸으며 當時의
所謂 大同譜라 하나 이 역시 評理公 大匡公 兩派에 그치고 말았으며
譜事가 完備되지 않았음을 이로 미루어 알 수 있거늘 지금에도
三十年의 오랜 歲月이 지났고 世態가 變遷하고 人物의 쇠잔하여 없어짐으로
分離되고 떨어진 이들은 根本으로라도 올 希望이 박약하며 支派 사람은
먼 祖上의 根源을 찾으려 하지 아니하니 一族을 合하고 序列을
分別하게 함이 大端히 急하게 되었다. 이런데도 不拘하고 有如弁髦
즉 有能한 사람이나 無能한 사람이 다 같이 서로 바라보기만 하고
남에게 미루기만 하다가 장차 몇 사람이 또 몇 家門이 不知不識間에
他姓과 같이 되어 버릴지 모를 일이라. 永來는 이를 두려워하는 바임으로
近親들과 묻고 議論하여 遠近 各邑에서 收單하도록 하고 檢校公 以下부터
譜系를 다루어 一家의 譜牒을 꾸민 것은 舊譜 中에 있는 他派와
疏遠해져서가 아니라 消息이 멀고 끊기고 또 大同譜事 일이
莫重하고 거창함으로 完成이 쉽지 않음을 두려워함이다. 다음에 내 집 일을
말하고자 하노라. 나의 본 生祖이신 錦澗 할아버지께서는 不幸하게
孫子代에서 宗嗣가 끊겨 지금까지 春秋享祀를 받드는 자가 血族 아닌
사람은 없어서 家乘과 譜牒에 올라있는 자가 모두 傍孫의 항열에 있어서
本家에서 累代로 유감으로 여겨오던 중 聞慶 일가 집에 昭睦이 미치는
사람이 있다는 말을 듣고 그의 九世 以下를 옮겨서 宗孫으로 삼았으니
이번 보사를 닦은 意義가 진실로 여기에 있다 하겠으며 더욱이
醴泉 尙州 咸昌 慶山 等地에 散居하는 宗族이 많고 家乘과 文籍의
考證과 記錄의 來歷이 分明하여 前者에 혹 붙었거나 혹 누락된
줄거리가 있으며 또 舊譜 序文에 후일을 기다려서 處理한다는 말이
있는 사람은 곧 合單하고 붙여서 譜系를 막았으니 이는 곧 范文正公의
말한 바와 같이 내게서 보면 親疏의 差別이 있으나 祖上이 볼 때는
같은 子孫이라 어찌
또 주저하겠는가? 그러나 十世 동안을 決定치 못하고 百年間을 慎重히
다루던 일을 敢히 輕率하게 譜牒에 編入한 것은
後日 地下에서 祖上에 對하여 할 말은 있다하더라 도 참람하다는
꾸지람을 어찌 免하겠는가?
嗚呼라 사람이 누가 姓氏와 宗族이 없으리요마는 族屬을 모으고
譜牒에 올리는 것이 敦睦하는 根本이요 사람이 누가 親疏가
없으리요마는 親함을 미루어 疎遠함에 비치는 것이 倫綱을 두텁게
하는 일이 될 것이니 우리 宗人들은 마땅히 조심하고
힘써서 先世의 남긴 隱德이 있음을 생각하고 後世 子孫에게 祖上을
욕되게 하지 말라는 가르침을 도모하면 나무가지가 繁盛하여
門戶가 더욱 隆盛할 날을 可히 約束할지니라.
大略 譜事가 이루어진 顛末을 敍述하여 冊머리에 쓰노니 後日에 다시
譜牒을 닦는 이가 있으면 내 말에 느낌이 있으리라.
歲 玄黓 閹茂(=壬戌) 仲呂月(=4월) 上澣 後裔孫 永來 謹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