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용자 도구

사이트 도구


c3-039

문서의 이전 판입니다!


금계선생행장(錦溪先生行狀)

錦溪先生行狀
 성주목사(星州牧使) 황공(黃公)의 휘(諱)는 준량(俊良)이요 자(字)는 중거(仲擧)며 평해인(平海人)이니 고려(高麗) 때에 시중(侍中)을 지낸 휘(諱) 유중(裕中)이라는 분은 그의 먼 조상(祖上)이다. 휘(諱) 유중(裕中)의 손(孫)되는 휘(諱) 근(瑾)이라 하는 분은 고려(高麗) 공민왕(恭愍王) 조정(朝廷)에서 좌헌납(左獻納)이 되어 정언(正言) 김속명(金續命)1)과 함께 상소(上疏)를 하여 지진(地震)에 관(關)한 변(變)에 극론(極論)을 펴다 왕(王)의 뜻에 거슬린 바 되어 옥천(沃川)으로 귀양 갔었고 나중에 풀려 벼슬이 보문각(寶文閣) 제학(提學)에 이르렀다. 그리고 휘(諱) 유정(有定)을 낳으니 이조(李朝) 초엽(初葉)에 벼슬을 하여 공조전서(工曹典書)가 되었으며 생원(生員) 휘(諱) 정(鋌)을 낳았고 이가 곧 공(公)의 고조(高祖)가 되시는 분이시다. 전서(典書)로부터 현(現) 영주(榮州)에서 우거(寓居)하였더니 생원(生員) 정(鋌)이 또다시 풍기(豊基)로 옮겨 드디어 풍기(豊基) 사람이 되었다.
 공(公)의 증조(曾祖)의 휘(諱) 말손(末孫)은 사온서(司醞署) 주부(主簿)요, 조(祖)의 휘(諱)는 효동(孝童)이요, 고(考)의 휘(諱)는 치(觶)이니 모두 은덕(隱德)으로 벼슬을 하지 않았으며, 비(妣)는 창원황씨(昌原黃氏)니 교수(敎授) 한필(漢弼)의 여(女)다. 정덕(正德) 정축(丁丑) 7월(七月)에 공(公)을 낳으셨다. 공(公)이 어릴 때부터 탁이(卓異)한 재질(才質)로 일찍이 문자(文字)를 해득(解得)하고 말을 하면 곧 사람들을 놀라게 함으로 모두 기동(奇童)이라 칭(稱)하더니 나이 18세(十八歲)에 영남(嶺南)의 향시(鄕試)에 나아가니 고시관(考試官)이 공(公)의 책문(策文)(정치(政治)에 관(關)한 답안서(答案書))을 보고 구절(句節)마다 무릎을 치며 가상히 여겨 칭찬(稱讚)하였으니, 이로 말미암아 공(公)의 문학(文學)은 벌써 명성(名聲)이 자자하였다. 그 후(後)로 과거(科擧) 때 마다 항상(恒常) 앞줄에 있어 정유년(丁酉年)에 생원(生員)에 합격(合格)하고 기해년(己亥年) 정시(庭試)에서 회시(會試)에 달리어 경자년(庚子年)에는 을과(乙科)에 제2인(第二人)으로 급제(及第)하여 권지(權知) 성균관(成均館) 학유(學諭)로 성주(星州) 훈도(訓導)에 선임(選任)되었다가 임인년(壬寅年)에는 학유(學諭)로 다시 들어오게 되었다. 그리고 계묘년(癸卯年)에는 학록(學錄) 겸(兼) 양현고(養賢庫) 봉사(奉事)로 승격(昇格)되어 갑진년(甲辰年)에 다시 학정(學正)에 승진(昇進)되고 을사년(乙巳年)에 승문원(承文院) 전고(殿考)로서 다시 외직(外職)으로 나와 상주(尙州) 교관(敎官)이 되었다가 정미년(丁未年) 가을에 내직(內職)으로 도로 들어와서 박사(博士)가 되고 그해 겨울에 전적(典籍)으로 승격(昇格)되고 이듬해에 공조좌랑(工曹佐郞)으로서 외간상(外艱喪)을 당하여 복(服)을 마치고 전적(典籍)으로부터 호조좌랑(戶曹佐郞)으로 옮겨 춘추관(春秋官) 기사관(記事官)을 겸(兼)하여 중종(中宗) 인종(仁宗)의 양조(兩朝) 실록(實錄)을 닦는데 참여(參與)하더니 겨울에 병조좌랑(兵曹佐郞)으로 전직(轉職)되어 벽불소(闢佛疏)를 올렸으며 신해년(辛亥年) 2월(二月)에 왕명(王命)으로 경상도(慶尙道) 감군어사(監軍御史)가 되었다가 다시 승문원(承文院) 검교(檢校)로 바꾸어 차질(差帙)되고 6월(六月)에 추생어사(抽栍御史)가 되었다가 7월(七月)에 예조좌랑(禮曹佐郞)으로 옮겼더니 이에 나가지 않으매 9월(九月)에 사헌부(司憲府) 지평(持平)을 내려 주었다. 그때 한(韓)성(姓)을 가진 사람이 사헌부(司憲府)에 있어 몹시 공(公)을 구(求)한 바 있었으나 공(公)이 응(應)하지 않으니 그 부(府)에서 많은 논의(論議)를 하였어도 드디어 친걸(親乞) 즉 어버이 봉양(奉養) 때문에 벼슬을 그만두겠다고 굳이 사양하니 외직(外職)으로 신녕(新寧) 현감(縣監)을 시키는지라 병진년(丙辰年) 겨울에 병(病)으로 인수(印綬)를 풀고 집에 돌아와 있었다. 이듬해 가을에 조정(朝廷)에서 단양군(丹陽郡)이 몹시 피폐함을 알고 특히 공(公)을 이를 치유(治諭)하는 임(任)에 뽑아 단양군수(丹陽郡守)를 제수(除授)하거늘 가솔(家率)을 거느리고 부임(赴任)하여 3년(三年)을 근무(勤務)하고 만기(滿期)가 되어 집에 돌아와 휴양(休養)하더니 다시 병조(兵曹) 예조(禮曹)의 정랑(正郞)으로 제수(除授)하였으나 모두 나아가지 아니하였다. 경신년(庚申年) 가을에 성주(星州) 목사(特使)를 내리니 4년이 지난 계해년(癸亥年) 봄에 신병(身病)을 얻어 사직(辭職)하고 돌아오는 도중 병세(病勢) 더욱 심(甚)하여 3월 11일에 예천(醴泉) 지경(地境)에 다다르자 드디어 졸(卒)하니 향년(享年)이 불과(不過) 47세더라. 공(公)의 사람됨이 영수불범(潁秀不凡)하여 명민(明敏)한 풍표(風標)가 있으며 미목(眉目)이 그림같이 수려(秀麗)하고 재주가 뛰어나 한가지를 들으면 열가지를 이해(理解)하였다. 그러나 높은 벼슬자리를 탐내지 않고 고을살이2)에서 다스린 자취를 살펴보면 그 직무(職務) 수행(遂行)에 조금도 비겁하지 않고 장래(將來) 참고(參考)할 수 있고 또 모범(模範)된 역사(歷史)의 문안(文案)을 정비(整備)하는데 힘쓰며 어떻게 하면 백성(百姓)이 굶주리지 않고 헐벗지 않으며 마음 편히 살 수 있나 하는 민사(民事)에 마음을 다하였다. 그가 신녕(新寧)에 있을 때 흉년(凶年)을 만나 백성(百姓)이 굶주림을 보고 스스로 굶주림을 당함과 같이 여겨 진휼(賑恤)로서 백성(百姓)이 되살게하여 현민(縣民)들의 칭송(稱頌)이 자자하였다. 또 전임자(前任者) 때에 백성(百姓)이 내지 못한 세금(稅金)은 공(公)이 실정(實情)을 조사(調査)하여 알맞도록 혹(或) 면제(免除)하고 혹(或) 줄이고 혹(或) 메워서 수(數)를 충당(充當)하고 문권(文卷)을 폐기(廢棄)하는 등(等)의 적절(適切)한 처리(處理)를 하였다. 그리고 항상(恒常) 백성(百姓) 교육(敎育)에 뜻을 두어 문묘(文廟)를 증축(増築) 또는 신축(新築)하는데 힘써 권도(勸導)를 게을리하지 않았으며, 또 고현(古縣)에 학사(學舍) 1동(一棟)을 새로 세워 백학서원(白鶴書院)이라 현판(懸板)을 걸고 서적(書籍)을 비치(備置)하며 이를 유지토록 전토(田土)를 마련하여 이름 높은 지방(地方)으로 흠모(欽慕)케 하려고 노력(努力)하였다. 또 지방(地方)을 순시(巡視)할 때 수레에서 내려 민정(民情)을 살피니 과세(課稅)가 심하여 백성(百姓)이 살 수 없어 이산(移散)하고 남긴 집들은 폐허가 되어 있고 잔류(殘留)한 백성(百姓)들은 식량(食糧)이 없어 굶주려 늘어져 누워있는 것을 직접(直接)보고 개연(慨然)히 말하기를 나라는 백성(百姓)이 근본(根本)이 되는 것인데 관폐(官弊)로 백성(百姓)이 못 살아서야 될 말이냐 하며 실정(實情)과 적폐(積弊)를 소상(昭詳)하고 눈물겹게 상소(上疏)하니 그 극언(極言)한 조목(條目)이 열 가지가 넘었더라.
 이 상소(上疏)에 대(對)한 임금의 내리신 판비(判批)의 추장(推奬)한 말씀이 임금을 사랑하고 나라를 사랑하고 백성(百姓)을 사랑치 않음이 없으니 내가 심(甚)히 가상히 여기노라 하고 특명(特命)으로 조세(租稅)를 면제(免除)함이 10년을 한정(限定)한 조목(條目)이 무려 20여 조(條)에 달(達)하였으니 공(公)의 유창한 문장(文章)과 정성(精誠)이 하느님을 감동(感動)시키지 아니하였더라면 어찌 전일(前日)에 없는 바의 은전(恩典)이 내려졌을 것이겠는가? 이로 말미암아 유리도망(流離逃亡)하였던 단양(丹陽) 백성(百姓)이 다시 돌아오고 재무족도(才舞足蹈)하는 환희(歡喜)를 가졌다 한다.
 또 향교(鄉校)가 산(山)개골 물가에 있어 왕왕(往往) 홍수(洪水)로 침몰(沈沒)될 우려(憂慮)가 있으므로 공(公)이 명(命)하여 군치(郡治)의 동(東)쪽에 옮겨 세우되 그 위치(位置)와 장엄(壯嚴)한 모습이 지방(地方)을 넉넉히 교화(敎化)시켜 풍화(風化)하는 전당(殿堂)으로 삼는데 충분(充分)케 하였다. 또 군(郡)이 낳은 유현(儒賢)과 우제주탁(禹祭酒卓)의 경학(經學) 충절(忠節)은 모두 세상의 사표(師表)가 될 만함으로 문묘(文廟) 서(西)쪽에 별도(別途)로 한 간 집을 짓고 연년(年年) 제사(祭祀)를 올리게 하였으니 진실(眞實)로 공(公)의 교화(敎化) 치민(治民)하는 도(道)는 대정치가(大政治家)도 미치지 못할 바 있다 하겠다.
 더욱이 성주(星州) 고을은 다스리기 어렵다는 말이 있는데 공(公)은 오히려 이런 곳이 마음에 맞는다 하였다. 지난날 신녕(新寧) 단양(丹陽) 두 고을에 학업(學業)을 일구고 교화치민(敎化治民)하던 일만 보더라도 이 치정(治政)키 어렵다는 성주(星州)에서야 더욱 깊고 지극(至極)하게 노력(努力)을 기울였을 것은 명약관화(明若觀火)한 일이 아니겠는가?
 전일(前日)에 盧牧使 慶麟이 迎鳳書院을 碧珍 옛터에 새로 세움이 있었더니 公이 이것을 規模를 넓히고 壯嚴하고 아름답게 더 꾸몄으며 또 文廟를 重修하여 敎化의 殿堂답게 規模를 開拓하였다. 이때 마침 吳斯文建이 星州敎官으로 赴任할새 서로 뜻이 같으므로 議論을 모아 弟子 몇사람을 가려 四等級으로 나누고 吳敎官으로 하여금 責任을 맡겨 毎月 한차례씩 모여 講을 하되 檢督하고 試驗하며 理解키 困難한 台文은 풀어주고 그 成績에 따라 賞罰을 주니 星州 一郡의 敎化가 크게 振作됨을 넉넉히 느낄너라. 또 星州 東쪽에 孔谷이라는 곳이 있어 이곳 모든 儒生들이 書堂짖기를 願함으로 곧 公이 즐겨 이를 協力하며 세우고 孔谷書堂이라 扁額하여 주었다. 또 八宮縣(지금 칠곡군 기천면 창평동)에 鹿峰精舍를 세워 多方面으로 訓迪하되 그 資質에 따라 크게 成就하는 사람들이 많이 輩出되었다.
 일찍이 公의 故鄉인 豊基郡守로 就任한 商山 周侯 世鵬과는 後進이 되지마는 信書로 往復할제 그 뜻과 學問에 未及한 点을 잘알면서도 繼續親交를 하는 中 다른 사람들이 이미 그의 見識이 밝아지고 있었다 하였다. 그러나 그가 前에 朝廷에 있을 때 오직 文辭로만 世上에 이름이 높았는데 公과 漸漸師友로 從遊하는 사이에 性理淵源說을 듣고 비로소 學問이란 것은 알아 자랑삼고 남에게 稱讚받는 것으로 그치지 않고 繼續 知行一致하는데 있음을 깨닫고 此學에 뜻을 두어 心經思錄 等의 모든 性理書를 얻어 읽어 이에 깊이 感發하였다 하더니 星州에서 또 이와 같은 사람이 있어 學友로 서로 切磋琢磨하는 도움이 되었으니 그 敎化로서 治民하는 뜻이 더욱 힘차고 그 功이 더욱 깊었었다.
 每樣公事의 餘暇에 吳敎授와 함께 冊床을 맞대고 講讀하는 동안에 밤을 뜬눈으로 새우고 寢食을 잊고 熱心함으로 사람들이 過勞로 病날 것을 근심하여 말리는 이가 많았다. 그러나 恒常 이에 對答이 讀書는 學問의 根本이 되는 것이고 마음을 다스리는 氣運을 기르는 것인데 어찌 讀書로 因하여 病이 날 理致가 있겠는가?
 그 혹시 反對되는 것은 命일 것이요 글의 허물은 아닐 것이라 하고 그가 居處하는 곳을 깨끗하고 조용하고 홀로 하였으며 고요한 온 방안에 聖賢의 要訓을 四壁에 써붙이고 스스로 보아 警誡하며 깨우치고 謹嚴하고 恭遜한 生活로 지내왔으나, 그러나 매양 仕宦으로써 격무에 시달리고 官廳 일에 흔들리어 깊은 病이 되었음을 깨닫고 하루 아침에 벼슬을 가볍게 벗어 버리고 돌아와서 竹嶺 아래 錦溪 위에 몸을 늙고져하여 이미 그곳에 墓地를 占하고 數間의 집을 짓고 命名하기를 錦陽精舎라 지었다. 그리고 그곳에 藏書를 하고 經學을 講道하는 곳으로 삼았으니 大抵篤好하는 뜻으로써 靜養하는 功을 더하게 되었던들 그 뜻한 바의 進就가 있어 그 얻음이 이에 끝나지 않고 더 큰 것이있었을 것인데 哀惜하게도 그 뜻을 다 이룩하지 못한 채 문득 病을 얻어 乘化하였으니 眞實로 可惜하도다.
 비록 그러하나 公의 이름이 弘文館 養才에 選拔되어 戊午年 봄에 公이 丹陽으로 赴任한 것을 보고 朝廷의 臣下들이 議論하고 狀啓로 公을 불러 文翰의 職位에 두려하여 周旋을 하였으나 同進者들과의 뜻이 맞지 않아 나아가는 것을 中止하였다. 그러므로 朝廷 諸公들이 公의 가상한 識見을 잘 알게 되었다. 公인즉 그 能한 才操에도 뜻을 더하여 榮進의 名利를 汲汲히 取하려 하지않고 도리어 生覺을 달리하고 努力을 거듭하여 人生 一生에 求하지 못한 바를 求하며 凡人들이 맞보지 못한 바를 맛보아 웃지 아니할 것을 하여 웃지 아니함을 알지 못하고 禍福이 禍福이 되는 것도 알지 못하는 無我狀態에 潛入하여 날로 부지런히 힘쓰고 있었다. 이러한 일은 人生이 죽은 後에는 그만이지마는 그가 擇한 道가 希望이 넘치는 새로운 人生을 改造하는데는 바른 方法이요 또 이 道를 熱心히 嚮導함은 가상할 노릇이다.
 또 公은 友愛篤實하여 좋은 物質은 먼저 慈堂을 받들고 다음에 姉妹弟姪에게 나누어주며 自己가 갖는 것은 적게하였다. 鄕黨故舊에게는 窮한데 賑恤하고 急한데 救濟하되 或 미치지 못할 때는 恒常 마음에 섭섭함을 禁치 못하였다.
 그리고 그 몸이 죽는 날에 이르러서는 홑이불도 갖추지 못하여 남에게 베를 꾸어 감을 하였으며 옷이 棺을 채우지 못한 것을 보고서 남들이 또 그 淸貧함과 嬌慢하고 外飾함이 없이 스스로 世上에 들어나게 된 것을 알았다. 또 아름다운 山水의 맑고 푸르름을 좋아해서 旅行할 때나 고을살이하는 곳에 名山적水가 있으면 반드시 親友들과 함께 놀며 詩를 읊고 討論하며 或 몸을 빼처 홀로 徘徊嘯詠하고 즐겨 집에 돌아오는 것조차 잊을 때가 적지 않았다.
 丹陽의 島潭과 龜潭을 말할 것 같으면 그 主人되는 李隱士의 藩屛으로 그가 방자한 뜻으로 놀고 求景하던 것을 자못 奇異하고 好男兒의 일이라하여 더욱 崇尙하였으며 또 太白山 溪谷에 많이 내린 눈 위와 北漢江 上에 白玉같이 희고 굳게 結晶된 얼음 위에 永江雪馬의 노름을 한껏 즐겨 때로는 李隱士의 집을 지나 고을 끝까지 달리는 것을 快適하게 여기고 그 큰 韻致는 비할 바 없어서 많은 類를 거느리고 한 때를 즐겼다.
 그리고 어느날 公의 病勢 오래도록 快하지 못하고 자리에 누웠을 때 나와 함께 글로써 告訣하던 말뜻이 맑고 새로워 平常時와 다름이 없더니 그 죽음에 임하였다는 것을 듣고 다시 書信을 살펴보니 바로 그 글이 죽기 전날에 쓴 것인데 그 情神이 죽을 때까지 똑똑하고 흩어짐이 없었다는 것을 잘 알았노라.
 公은 禮安人 察訪 李文樑의 女를 娶하였으나 아들이 없어 아우 秀良의 아들 瑛으로써 嗣續을 삼고 이듬해 甲子年 正月에 郡 東 山內谷 坎坐之原 先塋 왼편에 葬事하다.
 察訪은 곧 聾巖先生의 아들이다. 처음 公을 先生의 門下에서 알게되어 서로 함께 從遊한지가 가장 오래이며 또한 密接하였으나 愚陋(退溪先生 自身은 낮추어 말하는 것)는 들은 바가 없었더니 公을 얻어 깨우친 것이 많았다. 公이 先生의 門을 물러가 돌아가서는 實로 往來가 많았고 옛날의 言約을 닦으며 公이 恒常 나를 늙고 病들어 오랫동안 보전치 못할까 근심을 했던 것이 어찌하여 늙고 病든 사람은 世上에 살아있어 도리어 그대의 튼튼하고 꿋꿋한 나이에 울게 될 줄을 알았으리요. 公의 言行을 가히 記錄할제 鄭重해서 敢히 다 하지 못하고 다만 그 큰 것만을 잡았음이 위와 같으니 바라건데 혹시 다음날에 붓대를 잡을 사람의 詳考함이 있게 된다면 拙訥한 글이 피여 밝힐 바 없으리라. 嗚呼라 슬프도다 公의 著述한 바의 文集 二卷과 詩集 두권은 집에 간수하여 두니라.
  明宗 十八年 癸亥 十二月 日 眞城 李滉 謹狀

1)
김속명(金續命): 고려 시대의 문신(?~1386). 감찰집의, 삼사우사로 있으면서 권력에 굴하지 아니하고 잘못을 바로잡는 데 힘써 주위의 미움을 받던 중, 반야(般若)의 사건에 실언하여 불경죄로 문의현(文義縣)에 귀양 가서 죽었다.
2)
고을살이: 고을의 수령(守令)으로 지내는 생활.
c3-039.1747187070.txt.gz · 마지막으로 수정됨: 2025/05/14 10:44 저자 121.166.63.12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