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志士 葛隱 平海黃公昞允之墓
여기 고상능근곡(古上能根谷) 일우(一隅)에 지사(志士)가 잠드셨으니 곧 평해인(平 海人) 휘 병윤(昞允) 자 윤중(允中) 호 같은(葛隱)이다. 시조 휘락(洛) 중국(中國) 한 조(漢朝) 학사공(學士公)이 평해(平海)에 표착(漂着)하였으며 二十九대조 휘 온인(溫 仁) 고려 금오장군(金吾將軍) 태자검교공(太子檢校公)이고 二十六대조 휘용(𤨭)고 려 삼중대광(三重大匡) 시(諡) 충경공(忠敬公)이며 二十二대조 휘 천계(天繼) 경기(京 畿) 전나(全羅) 경상(慶尙) 삼도관찰사(三道觀察使)이고 十四대조 휘 귀성(貴成) 임진 난시(壬辰亂時) 왜적(倭敵)을 대파(大破)한 선무공신(宣武功臣) 정략장군(定略將軍) 호 만휴당(晚休堂)이며 남시곡(納是谷) 입향(入鄉) 八대조 휘 세업(世業) 사헌부집의 공(司憲府執儀公)이고 五대조 휘 복하(復河) 증 통정승정원좌승지(通政承政院左承 旨) 겸 경연참찬관(經筵參贊官)이며 고조 휘 종극(鍾極) 증 가선이조참판(嘉善吏曹參 判) 증조휘 경인(景寅) 수승통정공(壽陞通政公)이고 조휘 여동(麗東) 고휘 척구(巧
九) 비(她)는 안동권씨(安東權氏) 정묵(正默) 여(女)이다. ( 공은 광무(光武) 七년 一九〇三년 계묘(癸卯) 五월 二十五일 백자봉하흠실리제(栢 子峯下欽室里第) 출신으로 성장시 부터 용모단정(容貌端正)하고 재기과인(才器過人) 한데 일찍이 공주이공호익(公州李公浩翼) 문하생으로 경전차사(經傳子史)를 섭렵하 고 향리 호남학원(湖南學院)에서 신문화(新文化)를 연학(研學)하여 문사(文詞)에 조 예(造詣)가 깊고 서예(書藝)에 천명(擅名)하였다 선세지훈(先世之訓)을 받아 봉선치효(奉先致孝)하고 훌빈시혜지정(恤貧施惠之情) 이었으나 한말(韓末) 극력이 약해지자 침략일본은 을사조약(乙巳條約) 경술합방(庚 戌合邦) 등이 늑약(勒約)되어 아민족(我民族)은 왜적(倭賊)에게 유린(蹂躪)당하매 애 국지사들은 국내외로 흩어져 항일독립운동(抗日獨立運動)을 전개할때 공 역시 조국 광복(祖國光復)의 웅지(雄志)를 품고 기회를 기다리는 중 一九二七년 겨울에 김연한 (金璉漢) 황세증(黃世中) 이회직(李會稙) 권병남(權丙南) 김명한(金命漢) 황호중(黃浩 中) 김조한(金朝漢) 김석동(金石東) 권오인(權五寅) 여러 인사와 더불어 신간회안동 지부(新幹會安東支部)를 결성하고 민족정기(民族正氣)를 고취(鼓吹)하다가 一九三〇 년 부터는 호남학우(湖南學友)들과 청년회(青年會)를 조직하고 후진들에게 민족문화 (民族文化)와 자주독립정신(自主獨立精神)을 교도(教導)하여 일경(日警)에게 무수한 질곡(桎梏)을 받다와 오호(嗚呼)라 一九三八년 무인(戊寅) 七월 二十七일 조극광복
(祖國光復)을 못본체 고종(考終)하다. 묘는 능근곡자좌지원(能根谷子坐之原)이요 배(配) 안동김씨(安東金氏) 무진(武鎮) 여(女)는 윤합곤순지도(允合坤順之道)를 닦더니 一九九四년 음(陰) 二월 二十四일 영 면(永眠)하니 묘동원쌍분(墓同原雙墳)이다.정수(庭樹) 二남 -녀인데 장남 석기(錫 起)는 재일교포권익보호지공(在日僑胞權益保護之功)으로 주일대사(駐日大使)와 최 규하(崔圭夏) 외무장관의 포상(褒賞)이 서수(叙受)되었고 차남 학기(鶴起)는 위선사 업(為先事業)과 목족사교(睦族社交)에 돈독(敦篤)하여 정린지인(井勝之人)의 칭송(稱 頌)이 높으며 여는 달성서씨(達城徐氏) 진수(珍洙)이다. 석기(錫起)의 남은 현우(鉉 旭)이고, 현욱(鉉旭)의 남은 상경(相慶)이며 학기(鶴起)의 남은 현찬(鉉贊) 현익(鉉翼) 현재(鉉載) 현부(鉉扶) 현우(鉉佑)이고 이하 다 기록하지 못한다. 오늘도 송모계술(誦慕繼述)한 유잉(儒仍)은 공의 유풍여운(遺風餘韻) 속에 일익번 연(日益繁衍)되고 있다. 어느날 석기(錫起) 학기(鶴起)보가 개갈지성(改碣之誠)으로 나에게 비문(碑文)을 청(請)함으로 부덕천문(不德淺文)으로 지었으나 지사(志士)의 우국정신(憂國精神)과 그 업적(業績)이 금후백세(今後百歲) 날이 갈수록 빛나길 바랄 뿐이다. 檀紀 四三二五년 月일 獨立志士紀念事業會 代表 安東 金乙東謹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