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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간황봉규묘갈략(東澗黃奉奎墓碣略)
東澗黃奉奎墓碣略
※제24세(第二四世) 광품리 중정(中頂) 묘갈(墓碣)
공(公)의 휘(諱)는 봉규(奉奎)요 자(字)는 양언(良彦)이요 호(號)는 동간(東澗)이니 동해상(東海上)에게 순수독실(純粹篤實)한 덕행(德行)을 닦는 선비라。
순조(純祖) 임오년(壬午年) 생(生)이요 병술(丙戌)에 졸(卒)하니 향년(享年)이 66세(六十六歲)라。기선(其先)은 평해인(平海人)이니 려조(麗朝)에 유휘(有諱) 천상(天祥)하니 문하찬성사(門下贊成事)요 14세(十四世)를 지나서 유휘(有諱) 연(衍)하니 동몽교관(童蒙敎官)이요 공(公)의 8대조(八代祖)라。고(考)의 휘(諱)는 경하(景河)니 가선(嘉善)이요 비(妣)는 평해손씨(平海孫氏) 윤욱(允郁)의 여(女)로 부덕(婦德)이 높아 향리(鄕里)의 칭송(稱頌)이 자자(藉藉)하였다.
공(公)이 어릴 때부터 영민하여 5세(五歲)에 입학(入學)하고 8세(八歲)에 대학(大學)을 배워 격물치지(格物致知)의 의(義)를 능(能)히 해득(解得)하였으며 장성(長成)함에 지기고상(志氣高尚)하여 과거공부(科擧工夫)를 버리고 오직 학문(學問)에 힘쓰되 신의(信義) 외(外)에 영리(營利)를 부당(不當)하게
구(求)하는 마음은 심중(心中)에 싹트지 못하게 노력(勞力)하며 오로지 부모(父母)에게 효도(孝道)하고 형제간(兄弟間)에 우애(友愛)하며 몸가짐을 빈 것같이 하여 사람을 접(接)함에 반드시 겸손하고 공손(恭遜)하였다. 그러나 의(義)와 이(利)를 분변(分辨)하고
시(是)와 비(非)를 밝힐 때는 끊는 듯이 예리(銳利)한 판단(判斷)으로 추상(秋霜)같은 늠연(凜然)이어서 감(敢)히 복종(服從)치 않는 사람이
없었다. 국상(國喪)을 당(當)해서는 주육(酒肉)을 먹고 마시지 않고 양친(兩親)의 상사(喪事)와 제사시(祭祀時)에는 일체(一切) 가례(家禮)를 준수하여 불소발불탈경복(不梳髮不脫經服) 즉 머리를 빗질 않고 항상 상복(喪服)을 입고 3년상(三年喪)을 다 치른 후(後)에도 매월(每月) 삭망(朔望)에는
성묘(省墓)를 하되 풍우(風雨)에도 폐(廢)하는 일이 없음으로 향당(鄉黨)에서 모두 효자지문(孝子之門)에 효자(孝子)가 났다고 칭송(稱頌)하더라.
을묘(乙卯)에 통정(通政)에 수자(受資)하니 드디어 동파상(東坡上)에 당(堂)을 짓고 동간(東澗)이라。편액(扁額)을 걸고 구숙(邱壑) 임천(林泉)에 소요(逍遙)하여 스스로 경사(經史)를 즐기며 후진(後進)들을 교훈(敎訓)하여 깨우쳐주는 것을 자기(自己)의 책임(責任)으로 생각하고 또 일찍이 말하기를 선비로 나서 불능주즙대천보헌황유(不能舟楫大川輔献皇猷) 즉 큰 재능(才能)이 있어 큰 사업을 하거나 제왕(帝王)을 도와
위관충군(爲官忠君) 못할 바에야 후진(後進)을 계도(啓導)하여 성현지도(聖賢之道)에 따라가게 하는 것이 나의 뜻이라 하고 또 사기(史記)를
읽을 때 간당(奸黨)들이 나라를 그르치고 어진 사람을 죽이고 착한 사람들이 지위(地位)를 잃고 축출(逐出)되는 대문을 볼 때는 주먹을 치고 한숨을 짖고 하니 그 늠연(凜然)의 고상(高尚)함이 이 같으며 자기(自己) 개인(個人)의 험난과 곤궁은 조금도 근심하지 않을 뿐 아니라 남이 그런 것을 알아주기를 원(願)치 않으며 오직 권고(勤苦)하며 묵묵(默默)히 덕(德)을 심는데만 힘쓰니 마땅히 자손(子孫)이 번창하리로다. 이로 가(可)히 명(銘)하노라。명왈(銘曰)
孝統百行公有承受 효통백행공유승수 孝道란 백가지 행실의 根本인데 公이 孝의 道를 이어 받
았도다.
立志惟早確乎其守 입지유조확호기수 그 뜻을 세우는데 일찍 깨달았으며 또한 그것을 지키는데
확고하였도다.
研窮經史翱翔邱園 연궁경사고상구원 經傳과 史記를 研究하고 實踐하는데 勞力하여 구원에서
심한 진리를 깨달았도다.
樹德于躬用裕後昆 수덕우궁용유후곤 德을 심고 몸소 행하여 세상에 보이니 닦은 德이 後孫에
게 넉넉히 끼치리로다.
斷刻斯石實昭無窮 착각사석실소무궁 이돌을 깍아서 銘을 새기니 행실이 사적을 밝게 함이 무
궁하도다.
孰不瞻敬秉彝攸同 숙불첩경병이유동 누가 尊敬하고 우러러 보지 않으리요 人生의 倫理의 根
源인 五倫을 그대로 지켰도다.
通訓大夫咸悅縣監德殷宋胄憲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