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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은공 황하흠 행장(稼隱公 黃夏欽 行狀)
가은황공행장1)
공의 휘는 극일(克一)이며 자는 복원(復元)으로 평해의 저명한 집안이다. 학사 휘 황락(黃洛)의 후손 개국일등좌명공신 평해부원군2)
양무공(襄武公) 휘 희석(希碩)의 팔대손이다. 증조의 휘는 후만(後萬)이며, 조부는 휘 덕필(德弼)인데 통정대부이다. 아버지 휘는 원기(元奇)인데 예빈시 참봉(禮賓寺參奉)이며, 어머니는 울진장씨 홍원(弘遠)의 따님이다.
숭정 경자년 12월 27일 부치(府治)3)
내 송생리(松生里) 집에서 공이 태어났다. 겨우 일곱 여덟 살부터 놀이하는 것이 범상하지 않고 기개가 뛰어났다. 서사(書史)를 힘써 기억하였고 병서까지 정통하였다. 이에 문(文)을 버리고 무(武)를 취하여 이미 세상에 쓰일 뜻을 품고 있었다. 일찍이 마문연(馬文淵)4)의
과시(裹屍)5)에
대한 설과 윤길보(尹吉甫)6)의
만방위헌(萬邦爲憲)7)에
대한 구절을 읽고는 무릎을 치면서 탄복하며 말하기를, “대장부는 살아도 이처럼 살아야 하고 죽어도 이처럼 죽어야 한다.”고 하였다.
나이가 21살에 경신년 무과에 급제하였으며, 숭정 병자년 겨울에 오랑캐가 노략질을 하자 임금이 남한산성으로 파천을 하여 국가의 위급함이 조석에 달렸다. 공은 강개하여 몸을 떨쳐서 어버이에게 고하기를, “지금 종사가 매우 어려워 임금이 몽진을 하고 있는 상황이므로 신자(臣子)로서 마땅히 적개심을 가질 때입니다. 더구나 무과를 통해 발신하였으니, 개미같은 미미한 정성이라도 다 바치고 나라와 함께 사생을 같이해야 할 때입니다.” 하고는 마침내 칼을 뽑아들고 서쪽으로 가서 상국(相國)8)
이완(李莞)9)을
따라 한 마음으로 보좌하고 계획하여 호휘하는 공로가 매우 많았으므로 조정에서 공에서 선략장군 훈련원권지봉사(宣略將軍 訓鍊院權知奉事)라는 벼슬로 포상하였다.
외로운 성이 위태로움에 빠져서 한 손으로 강을 막을 수 없는 형세와 작은 막대기로 큰 집을 지탱할 수 없는 힘으로 성하지맹(城下之盟)10)을
맺을 지경에 이르러, 공이 통곡하고 성을 나오자, 임금이 채선(綵線 오색실)으로 그의 손을 감싸고, 또 예빈시참봉(禮賓寺參奉)에 제수하여 그 어버이를 영광되게 하였으니 참으로 특별한 은전이었다. 본가에서는 공의 생사를 몰라 가동(家僮) 충립(忠立)이 가보기를 청하여 도중에 서로 만나본 즉 공의 두 발에 모두 행기(行器)11)를
부착한 채 오고 있었다. 그의 충분액완(忠憤扼腕)12)의
통절함이 마음속에 자리잡고 있어서 행기를 밟고 있는 줄 몰랐기 때문이었다.
천계(天啓) 5년(1625년)에 조정에서 공로에 보답하는 은전을 내렸으니, 원종기린제일인(原從麒麟第一人)의 상(賞)을 모두 기록하고, 이미 웅비불아심(熊羆不二心)의 신하로 정봉(定封)되자 이에 비로소 은총이 내려, 공에게 진무원종공신녹권(振武原從功臣錄券)을 내렸다.
경술년 2월 19일 천수를 다하고 침소에서 돌아가시니 수명이 71살이었다. 묘는 부(府)의 소재지 안 북쪽 노래산(老萊山) 자좌(子坐) 언덕이다. 배위는 함안조씨 대익(大益)의 따님으로 공의 묘 왼쪽에 부장(附葬)하였다. 두 아들을 낳았으니 우청(遇淸)은 통정대부이며, 경청(慶淸)은 학생이다. 딸은 권진한(權震漢)에게 시집갔다. 우청의 아들은 광헌(光憲), 광수(光秀), 광혁(光赫)이며, 경청의 아들은 유헌(有憲), 신헌(信憲)이며, 권진한의 아들은 도규(道揆)이다. 증손 현손 이하는 약간의 명수가 있다.
하루는 공의 8세손13)
경한(慶漢)이 그 아들 상룡(相龍)14)을
시켜 녹권과 집안에서 전하는 글을 가지고 와서 나에게 보여주면서 말하기를, “우리 집안이 탕탁(蕩柝)을 겪어 자손이 영락하고, 선조들이 평소에 사용하던 갑옷과 활과 화살을 가묘(家廟)에 보관하던 것이 또 없어져서 보존하지 못하였으니, 하물며 여기 보여드리는 변변찮은 것이야 말할 게 있겠습니까? 선조의 자취가 날로 실추되는 것이 매우 두려워서 (후대에) 전할 수 있는 말씀 한마디를 구하여 후손들에게 보여줄 자료로 삼고 싶습니다.”하였다. 내가 문장에 능하지 못하니 어찌 감히 이 일을 하겠는가만 조상에게 효도하려는 간절함에 감동하여 사양하지 못하였다.
아! 공이 그 직위를 얻고 그 재주를 발휘하였다면 옛날 끝없는 공을 세운 명장일지라도 이 경지를 넘어서지 못한다. 먼 시골구석의 외로운 몸으로 한손으로 어려움을 딛고 정성을 다하여 호가(扈駕)하며 험하고 어려움을 꺼리지 않았으니, 충(忠)이 지극한 것이요, 몸을 온전히 하여 집으로 돌아와서 정성을 다하여 부모를 모시고 처음부터 끝까지 서운함이 없게 하였으니, 효성이 지극한 것이다. 그러니 충과 효를 모두 겸한 것을 신명에게 물어 증명할 수 있다. 전하는 말에, “나무의 기운은 열매에 전하고, 사람의 기운은 후손에 전한다”고 하였으니, 공이 수립한 공은 양무공(襄武公)에게서 배태한 것이 아니라고 어찌 알지 못하겠는가. 세대가 너무 멀어지고 증거 삼을 문헌이 없어져서 공의 행실을 수습한 것이, 솥 안의 고기 한 점15)이나
구포(九苞)16)의
터럭 한 개에 불과한 것이 백세토록 후손들의 유감이니, 반드시 큰 문장가가 나와서 채택하여 옛일을 논할 것이다.
전행청송부사 평산 신관조 근찬
한국고전번역원 노성두 번역, 정책학박사 황병상 수정 (2024.2.19.)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