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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9-0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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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은공 황하흠 행장(稼隱公 黃夏欽 行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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稼隱黃公行狀
黃氏之貫平海出身自新羅謹學士洛其鼻祖也 本朝有諱希碩以開國功封府院君諡襄武自是珪笏相承中世諱德弼號詠而始居靑鳧生諱元兆號羞菴於公五世以上也高祖曰彩文贈寺正曾祖曰昌大贈參贊祖曰喜鍾贈戶判考曰載坤壽陞中樞妣恩津宋氏秉燮女 哲宗壬戌三月某甲生公于靑雲里第諱應錫字孝若兄弟二人公居秀氣稟淳朴才性寬厚甫受學于萬隱伯公而粗知義方云篤孝父母侍側不離維悅親義爲日用事而日復一日少不解弛和愉之色恍然形於面柔溫之聲翕然發於言語莫非天出而自然也 課農幹務而備供甘而用天之道因地之利溢愼節成就養左右有隱無方臾水而漁費爲度閣之需臾山而樵炊給堂室之溫時累而日蓄月貯而歲積晨昏之奉朝夕之具未嘗忘于己而察諸身少無矯揉造爲之狀言雖分處幷室食不能先於口衣不得先於身自家機杼之出田園之物鎬釜之味一不敢自私而隣比之饋親戚之幣城市之珍必獻其親而藏之待乏自由見信於人而與其兄弟相處一被連業無宿怨而無僞嘉有事則必問於謀成有味則必同於共餐始終無違一於孝悌 聞其古今賢孝子弟嘉言善行則記之以不忘踐之有造言非孝悌則不口行非孝弟則不趍緖其本然之天而覺其良知行其良能物物平繩事事緖度三百閭閻十百童冠咸曰孝子稱言公年〇數十而歲値壬辰某丁內艱哀毁過半踰月求山安厝未定爲請地師曰吉地乃積善人所得而如我喪人則徒爲母氏體魄之便安處取己云云其時所與地師感其言激其誠不得任諸意決之踏山日久誠力至勤山日丁午凶鳥弔其喪子而告吉啞啞而去地師怪其鳥而親其翔下處則可謂地秘之穴瞠然而揖日余多點穴來始有見此云云天必使斯人身在凶疾之中而鑒其誠神及處以示其明徵乎及其襄禮之日役塋等輩弔喪賓明無不悅服而願表其情實于時大人公在其位而止之曰夫烏之啼樂如孝非常何指此子所以乎盛論直爲我而亦誤吾兒〇抑亦家庭之規必由自來矣聞世稱黃處士㶅晩翠翁公之傍先也〇彼青中有黃豈非斯翁之德之始也哉 免闋三年後事其大人公尤致服勤至死不懈口有三問之節而曰安則喜動於面若曰否則憂懣於己夜以禱天晝以祈山請身願代嘗糞自試誠必復其常而止之此乃人子之當爲而世級日降民鮮久矣其能强勉而能之乎 六年丁酉某丁外艱其前日親病差有減勢而公方釋慮擬以出外之意放于洞門則庭狗猝然吠走而報凶天不使斯人己存平易之間而奈其精力逼處以示其閔極乎免經歛襄後父兄諸親願成而方說呈官之議公泫然環願曰前喪之時吾大人之說有若聽信則今此大人之喪又發此論如爲吾而反僖吾親〇自處之道亦由所受也 見述其家狀萬隱公公之伯康也吁嗟乎有時兄有時弟豈非公家之法之刱也哉其後禮成無憾而其畢公自身專力於耕稼而隱迹於雲山之中故而稼隱爲號也 庚戌三月某甲以疾終于居第享四十九葬于南柯村細谷壬向之原配坡平尹氏通政光宗女合祔子悳潤道潤女林永洛林在賢悳潤四男一女觀模復模艮模恒模女幼道潤三男東模西模南模餘幼不錄 鳴呼公以寬朴之姿良知之能自成乎百行之源而有始有終一於孝而以至動天激物所以見於日用之問者無孝出於儒家之模範夫豈無所本而能如是哉 公沒後三十餘載而家狀褒彰稧帖序墓碣銘等券數年編成於是乎忠厚之德著於鄕仁孝之政施於家上有壽〇西樞恩榮溢於泉壤下及慶流後毘蘭玉〇於庭砌則天之所以善人是耶公之長子悳潤甫以感慕之誠屢請余叙次之役辭之不得乃按据遺事而第錄如右以塞孝子之請
甲戌秀葽節完山柳東夔 謹書


가은황공행장1)
공의 휘는 극일(克一)이며 자는 복원(復元)으로 평해의 저명한 집안이다. 학사 휘 황락(黃洛)의 후손 개국일등좌명공신 평해부원군2) 양무공(襄武公) 휘 희석(希碩)의 팔대손이다. 증조의 휘는 후만(後萬)이며, 조부는 휘 덕필(德弼)인데 통정대부이다. 아버지 휘는 원기(元奇)인데 예빈시 참봉(禮賓寺參奉)이며, 어머니는 울진장씨 홍원(弘遠)의 따님이다.

숭정 경자년 12월 27일 부치(府治)3) 내 송생리(松生里) 집에서 공이 태어났다. 겨우 일곱 여덟 살부터 놀이하는 것이 범상하지 않고 기개가 뛰어났다. 서사(書史)를 힘써 기억하였고 병서까지 정통하였다. 이에 문(文)을 버리고 무(武)를 취하여 이미 세상에 쓰일 뜻을 품고 있었다. 일찍이 마문연(馬文淵)4)의 과시(裹屍)5)에 대한 설과 윤길보(尹吉甫)6)의 만방위헌(萬邦爲憲)7)에 대한 구절을 읽고는 무릎을 치면서 탄복하며 말하기를, “대장부는 살아도 이처럼 살아야 하고 죽어도 이처럼 죽어야 한다.”고 하였다.

나이가 21살에 경신년 무과에 급제하였으며, 숭정 병자년 겨울에 오랑캐가 노략질을 하자 임금이 남한산성으로 파천을 하여 국가의 위급함이 조석에 달렸다. 공은 강개하여 몸을 떨쳐서 어버이에게 고하기를, “지금 종사가 매우 어려워 임금이 몽진을 하고 있는 상황이므로 신자(臣子)로서 마땅히 적개심을 가질 때입니다. 더구나 무과를 통해 발신하였으니, 개미같은 미미한 정성이라도 다 바치고 나라와 함께 사생을 같이해야 할 때입니다.” 하고는 마침내 칼을 뽑아들고 서쪽으로 가서 상국(相國)8) 이완(李莞)9)을 따라 한 마음으로 보좌하고 계획하여 호휘하는 공로가 매우 많았으므로 조정에서 공에서 선략장군 훈련원권지봉사(宣略將軍 訓鍊院權知奉事)라는 벼슬로 포상하였다.

외로운 성이 위태로움에 빠져서 한 손으로 강을 막을 수 없는 형세와 작은 막대기로 큰 집을 지탱할 수 없는 힘으로 성하지맹(城下之盟)10)을 맺을 지경에 이르러, 공이 통곡하고 성을 나오자, 임금이 채선(綵線 오색실)으로 그의 손을 감싸고, 또 예빈시참봉(禮賓寺參奉)에 제수하여 그 어버이를 영광되게 하였으니 참으로 특별한 은전이었다. 본가에서는 공의 생사를 몰라 가동(家僮) 충립(忠立)이 가보기를 청하여 도중에 서로 만나본 즉 공의 두 발에 모두 행기(行器)11)를 부착한 채 오고 있었다. 그의 충분액완(忠憤扼腕)12)의 통절함이 마음속에 자리잡고 있어서 행기를 밟고 있는 줄 몰랐기 때문이었다.

천계(天啓) 5년(1625년)에 조정에서 공로에 보답하는 은전을 내렸으니, 원종기린제일인(原從麒麟第一人)의 상(賞)을 모두 기록하고, 이미 웅비불아심(熊羆不二心)의 신하로 정봉(定封)되자 이에 비로소 은총이 내려, 공에게 진무원종공신녹권(振武原從功臣錄券)을 내렸다.

경술년 2월 19일 천수를 다하고 침소에서 돌아가시니 수명이 71살이었다. 묘는 부(府)의 소재지 안 북쪽 노래산(老萊山) 자좌(子坐) 언덕이다. 배위는 함안조씨 대익(大益)의 따님으로 공의 묘 왼쪽에 부장(附葬)하였다. 두 아들을 낳았으니 우청(遇淸)은 통정대부이며, 경청(慶淸)은 학생이다. 딸은 권진한(權震漢)에게 시집갔다. 우청의 아들은 광헌(光憲), 광수(光秀), 광혁(光赫)이며, 경청의 아들은 유헌(有憲), 신헌(信憲)이며, 권진한의 아들은 도규(道揆)이다. 증손 현손 이하는 약간의 명수가 있다.

하루는 공의 8세손13) 경한(慶漢)이 그 아들 상룡(相龍)14)을 시켜 녹권과 집안에서 전하는 글을 가지고 와서 나에게 보여주면서 말하기를, “우리 집안이 탕탁(蕩柝)을 겪어 자손이 영락하고, 선조들이 평소에 사용하던 갑옷과 활과 화살을 가묘(家廟)에 보관하던 것이 또 없어져서 보존하지 못하였으니, 하물며 여기 보여드리는 변변찮은 것이야 말할 게 있겠습니까? 선조의 자취가 날로 실추되는 것이 매우 두려워서 (후대에) 전할 수 있는 말씀 한마디를 구하여 후손들에게 보여줄 자료로 삼고 싶습니다.”하였다. 내가 문장에 능하지 못하니 어찌 감히 이 일을 하겠는가만 조상에게 효도하려는 간절함에 감동하여 사양하지 못하였다.

아! 공이 그 직위를 얻고 그 재주를 발휘하였다면 옛날 끝없는 공을 세운 명장일지라도 이 경지를 넘어서지 못한다. 먼 시골구석의 외로운 몸으로 한손으로 어려움을 딛고 정성을 다하여 호가(扈駕)하며 험하고 어려움을 꺼리지 않았으니, 충(忠)이 지극한 것이요, 몸을 온전히 하여 집으로 돌아와서 정성을 다하여 부모를 모시고 처음부터 끝까지 서운함이 없게 하였으니, 효성이 지극한 것이다. 그러니 충과 효를 모두 겸한 것을 신명에게 물어 증명할 수 있다. 전하는 말에, “나무의 기운은 열매에 전하고, 사람의 기운은 후손에 전한다”고 하였으니, 공이 수립한 공은 양무공(襄武公)에게서 배태한 것이 아니라고 어찌 알지 못하겠는가. 세대가 너무 멀어지고 증거 삼을 문헌이 없어져서 공의 행실을 수습한 것이, 솥 안의 고기 한 점15)이나 구포(九苞)16)의 터럭 한 개에 불과한 것이 백세토록 후손들의 유감이니, 반드시 큰 문장가가 나와서 채택하여 옛일을 논할 것이다.

  전행청송부사 평산 신관조 근찬
한국고전번역원 노성두 번역, 정책학박사 황병상 수정 (2024.2.19.)

1)
이 행장은 청송군 청송읍 송생리에 살던 학남 류동기(鶴南 柳東蘷) 선생이 1934년(갑술년)에 지은 것이다. 한지에 붓글씨로 썼으며, 크기는 가로 109.6㎝, 세로 43.7㎝이다. 주손 황병상이 선대로부터 물려받아 표구하여 소장하고 있다.
2)
실제로는 개국 2등공신이며, 평해군(平海君)이다(황병상 주).
3)
부치(府治) : 부(府)의 소재지.
4)
마문연(馬文淵) : 문연은 후한 때의 장군 마원(馬援, 기원전 14~49)의 자이다(노성두 주).
5)
과시(裹屍) : 마원이 “대장부는 변방 싸움터에서 죽어 말가죽에 시체가 싸여 돌아올 뿐 어찌 병석에 누워 아녀자의 손에서 죽겠는가.”라고 하며 다시 흉노(匈奴)와 오환(烏桓)을 정벌하러 떠났다고 한다(노성두 주). 자치통감(資治通鑑)에 실려 있다(황씨중앙종친회, 1973: 194).
6)
윤길보(尹吉甫) : 주 선왕(周宣王) 때 북벌(北伐)을 담당한 장군이다(노성두 주).
7)
만방위헌(萬邦爲憲) : 《시경(詩經)》 소아(小雅) 유월(六月) 에 “문무를 겸비한 장군 윤길보여, 그야말로 만국의 법도가 되리로다[文武吉甫 萬邦爲憲]” 하였다(노성두 주).
8)
상국(相國) : 영의정, 좌의정, 우의정을 통틀어 이르는 말(표준국어대사전).
9)
행장에 있는 ‘이완(李莞)’이라는 한자 표기는 잘못된 것이다. 이완(李浣)이 맞다(황병상 주). 1602년(선조 35년)에 태어나 1624년(인조 2년) 무과에 급제하였다. 평안도병마절도사를 거쳐 1636년 병자호란이 일어나자 도원수 김자점(金自點)의 별장(別將)으로 출전해 정방산성(正方山城)을 지켰는데, 적을 동선령(洞仙嶺)으로 유인해 복병을 이용해 크게 무찔러 공을 세웠다. 효종이 북벌을 추진하면서 북벌의 선봉부대인 어영청의 대장이 된 후 훈련대장을 겸직하였고, 1674년(현종 15년) 5월에 우의정에 제수되었다가 6월에 별세하였다. 시호는 정익(貞翼)이다(출처: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10)
성하지맹(城下之盟) : 초(楚)나라가 교(絞)나라를 정벌할 때 술책을 써서 대패시킨 다음 교의 성 아래에서 항복의 맹약을 맺은 데서 나온 말로 청나라에 패배하여 조선이 굴욕적인 강화를 맺은 것을 말한다(노성두 주).
11)
행기(行器) : 밖으로 나갈 때 가지고 가는 명기(明器)라는 정보가 있는데 자세한 것을 알 수가 없다(노성두 주).
12)
충분액완(忠憤扼腕) : 충의에 격분하여 주먹을 움켜쥠(노성두 주).
13)
실제로는 9세손이므로 오기(誤記)이다(황병상 주).
14)
황상룡은 1946년에 청송읍 청운마을에 있는 영이정을 이건할 때 영이정상량문(詠而亭上樑文)을 썼으며, 진무공의 10세 주손(胄孫)이다(황병상 주).
15)
솥 안의 고기 한 점 : 원래는 《회남자(淮南子)》〈설림훈(說林訓)〉에, “한 점의 고기를 맛보고서 온 솥의 고기 맛을 안다.[嘗一臠肉, 而知一鑊之味.]”라고 한 데서 나왔다(노성두 주).
16)
구포(九苞) : ‘구포(九苞)’는 봉황의 아홉 가지 특징을 이르는 말로, 봉황의 별칭으로 쓰인다(노성두 주).
c9-025.1790039402.txt.gz · 마지막으로 수정됨: 2026/09/22 10:10 저자 ssio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