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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003 [2026/07/12 08:44] – 만듦 ssio20-003 [2026/07/13 11:07] (현재) ssio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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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後相望爾時未經無一家相傳之譜而中年屢經亂離舊家 後相望爾時未經無一家相傳之譜而中年屢經亂離舊家
 靑氊蕩失於兵燹流𥦻之中其序譜之亡失而無傳無足怪 靑氊蕩失於兵燹流𥦻之中其序譜之亡失而無傳無足怪
-也吾宗人之所痛恨其有亡乎吾再從兄黃晦叔甫慨然 +也吾宗人之所痛恨其有亡乎吾再從兄黃晦叔甫慨然 
-於斯志欲修緝族系以幸其終不至於珉珉也乃轉借他譜+於斯志欲修緝族系以幸其終不至於氓氓也乃轉借他譜
 之連派者而傳寫之尋問古老之流傳者而附錄之至於往 之連派者而傳寫之尋問古老之流傳者而附錄之至於往
 尋籍卿遍訪姓族聞其所未聞見其所未見於是自源而究 尋籍卿遍訪姓族聞其所未聞見其所未見於是自源而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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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其爲一語以序之余辭不獲謹頷之退則鄭重而不敢下筆 其爲一語以序之余辭不獲謹頷之退則鄭重而不敢下筆
 已十有餘朔矣兄之懇至再至三而不已則亦不敢終以不 已十有餘朔矣兄之懇至再至三而不已則亦不敢終以不
-文辭於是乎謹序其成譜之顛末書之卷尾以歸之遂+文辭於是乎謹序其成譜之顛末書之卷尾以歸之遂
 一本莊于家且念先世累代墳塋未能皆有表誌深恐久遠 一本莊于家且念先世累代墳塋未能皆有表誌深恐久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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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_**같은 종인의 족보 서문(同宗人族譜序)**\\ \_**같은 종인의 족보 서문(同宗人族譜序)**\\
-고려 충렬왕이 나라 조정에 들어갔을 때 익대공(翊戴功)이 있어 현(縣)을 승격시켜 평해군(平海郡)로 삼았다.\\+\_옛날에는 씨족에는 반드시 족보가 있었으니, 족보란 그 씨족의 근과 갈래를 기록한 것이다. 족보는 반드시 서문이 있었으니, 서문이란 그 족보가 이루진 전말을 서술한 것이다. 우리 동방의 이름난 큰 성씨들은 족보와 서문이 없는 경우가 없었니, 족보와 서문의 전통이 우리나라에서도 오래되었다.\\
  
-○ 삼가 살피건대, (고려) 충렬왕이 세자로서 나라에 들어갔다가 왕이 된 후 열한 차례 원라에 들어갔으니 +\_우리 황씨는 평해에서 나와 예로부터 나라의 저명한 성씨였으나, 유독 족보와 문만은 빠져 있었다. 자손 된 자들이 겨우 종계(宗系)의 세차(世次)만 잃지 않았을 뿐, 방계와 먼 갈래에 르러서는 상고하여 알 길이 없었다.\\ 
-여기서 말한 익대공은 반드시 덕우(德祐원년에 왕이 원나라 황제의 (제국대장공주)을  + 
-왕비로 맞고 즉위하여 동환(東還, 동쪽으로 돌아옴)한 때일 것이다.  +\_우리 시조 검교공(檢校公인온(仁溫)((금오공 온인(溫仁)을 선조로 확립한 것은 경인보(1770년) 부터임)) 이후로 연이어 5가 모두 관직에 있어 지위와 망이 세상에 뛰어났고, 또 그 아래 4대도 모두 문과에 급제하여 현달한 벼슬에 올라 명공(明)과 거경(鉅卿)이 앞뒤로 이어졌다. 그러나 그때까지 한 집안에 전해 오는 족보가 마련되지 못했고, 그 와중에 여러 차례 난리를 겪으면서 옛집의 청전(靑氈, 대대로 전해 오던 가보)이 병화 속에 흩어져 사라졌다. 유(流離)하는 가운데 그 문과 족보가 없져 전하지 못한 것은 상할 것이 없으나, 우리 종인(宗人)들이 통한스럽게 여기지 않을 수 있겠는가.\\ 
-(이는(지원(至元) 12년(1275년)이다. 지원 12년 (乙亥)부터  + 
-대명(明) 홍무(洪武25년 임신(壬申)에 리 태조께서 나라를 얻어  +\_나의 재종형(再從兄) 황심(黃燖) 회숙(晦叔)((17世父 선갑(善甲)의 2子, 字晦叔 丙午生 墓直長公墓右 艮坐 配順興安氏 墓雙封 父 璐)) 어른께서 를 개연히 여기어, 족계(族系)를 수집(修緝)하여 마침내 완전히 없어져서(泯泯) 사라지지 않도록 하겠다는 뜻을 두셨다. 이에 다른 문중의 족보 데 우리와 연결되는 갈래를 빌려 옮겨 적고옛 노인들에게 전해 오는 이야기를 물어 부록으로 실었. 나아가 여러 문적을 찾아다니고 성족(姓族)을 두루 방문여, 듣지 못했던 것을 듣고 보지 못했던 것을 았다. 이에 근원으로부터 그 갈래를 궁구고 뿌리로부터 가지에 르기까지,(代)의 계통을 나누어 정리하여 한 권으로 합쳤다.\\ 
-즉위시기까를 통틀어 계산하면 119년이 된다.\\ + 
-\\ +\_우리 9대조 판서공(判書公) 유(有定이상은 세대가 하고 문헌으로 증빙할 것이 다만 그 세차와 직명만을 기록였다. (國乘=國史)에 실린 사적과 사람들 입에 회자되는 문장은 듣고 본 대로 차록(剳錄)하여 별록(別錄)으로 만들어 권두에 실었다. 8대조 전(詮) 이하로는 그 내외 근파(根派)를 특히 상세히 기록하였다. 권질(卷帙)은 비록 많지 않으나, 가까운 예닐곱 을의 이름난 성족들이 대개 우리 조상의 후예 아님이 없고, 다른 도()의 먼 고을에 흩어져 사는 이도 많으니, 아! 우리 조상께서 덕을 쌓고 경사를 기르신 여경(餘慶)이 무궁함에 미친 것을 또한 이에서 상상해 볼 수 있다.\\ 
-\_또 살피건대익대(翊戴)의 이 있었다면 반드시 ()에 봉해지고 훈작(勳爵)의 품계가 있었을 것인데,  + 
-만 첨의평리(僉議評理)라 칭하고 을 승격시켜 군으로 삼았다고만 니,  +\_지난해 가을 회숙(晦叔)형께서 이 한 부를 소매에 넣고 오셔서 나에게 보이시며 말씀하시기를, "내가 이 족보에 마음을 둔 지 오래지 않은 것이 아힘을 쏟은 것이 부지런하지 않은 것이 아니로되, 견문이 넓지 못하여 수집하여 기록한 가 매우 적으니 참으로 한스럽다. 그러나 만일 우리 종인들과 우리 자손 된 자들로 하여금 이 일을 폐하지 않고 이어서 닦게 한다면, 혹 이로 말미암아 완전한 족보를 이룰 수 있을 것이다. 이 어찌 나와 그대가 함께 힘쓸 바가 아니겠는가. 그대는 한마디 말을 지어 서문을 써 주게" 하셨다.\\ 
-는 또한 반드시 (조정) 아뢰어 청하고 윤허를 받는 절차가 있었을 것이나,  + 
-다만 "현을 승격시켜 군으로 삼았"고만 하고 (國乘, 국사國史)에 기록지 않고  +\_내가 사양하지 못하고 삼가 응낙하였으나, 물러나서는 정중히 여겨 감히 붓을 대지 못한 지 이미 열 달 남짓이 되었다. 형의 간청이 두 번 세 번에 이르러 그치지 않으시니, 나 또한 끝내 문장이 부족하다는 이유로 사양하지 못하였다. 이에 삼가 이 족보가 이루어진 전말을 서술하여 권말에 적어 돌려드리고, 마침내 한 본을 등사하여 집에 소중히 보관하였다.\\ 
-군지(郡誌)에도 리지 않았으니, 전해 들은 바 없는 이 어떠하겠는가.\\ + 
-\\ +\_또 생각건대 선대 러 대의 분영(墳塋, 묘소)에 아직 모두 표지(表誌)를 세우지 못하여, 오랜 세월이 지난 뒤 자손들이 어느 조상 어느 묘인지 알지 못할까 깊이 염려되었다. 그러므로 삼가 그 묘산(墓山)의 명칭과 소재지 및 좌향(坐向)과 묘의 순서를 열거하여 뒤에 기록해서, 우리 자손들이 참고하여 열람하는 데에 대비하고자 한.\\ 
-\_\_(汝一)이 삼가 다.\\ + 
-\_\_(Claude 번역)+\_\_병신년(1611sus) 윤5월 기망(旣望, 16일) 족말(族末) 성균전적(成均典籍) 황중연 삼가 씀.\\ 
 +\_\_(Claude 번역, Sonnet5, 2026/07/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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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003.1783813477.txt.gz · 마지막으로 수정됨: 2026/07/12 08:44 저자 ssio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