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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001 [2025/05/19 19:09] ssio2a-001 [2025/06/04 15:45] (현재) ssio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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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평해황씨초간세보서(平海黃氏草刊世譜序)=== ===평해황씨초간세보서(平海黃氏草刊世譜序)===
-<WRAP 35em justify><hidden \_한문 원문 보기> +<WRAP 42em justify><hidden \_한문 원문 보기> 
-<typo ff:'한양해서'>+<typo ff:'한양해서'; fs:1.2em; lh:1,5em>
 \_平海黃氏草刊世譜序\\ \_平海黃氏草刊世譜序\\
-黃之著於東國古矣自新羅始建六姓之後根蔓葉布世爲大姓分係籍如鐵原昌原+黃之著於東國古矣自新羅始建六姓之後根蔓葉布世爲大姓分係籍如鐵原昌原
 長水箕城是其表表者而其中箕城之黃最遠且久未知其初始於何人也諺傳羅代上 長水箕城是其表表者而其中箕城之黃最遠且久未知其初始於何人也諺傳羅代上
 世有黃將軍者與丘將軍同時入來黃則居越松北麓至今有黃將軍址丘則泊丘尾北 世有黃將軍者與丘將軍同時入來黃則居越松北麓至今有黃將軍址丘則泊丘尾北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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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而恬無愧恥此豈非大幸中之大不幸耶黃瑞以翊戴元勳陞郡黃鉉以經明行修稱世 而恬無愧恥此豈非大幸中之大不幸耶黃瑞以翊戴元勳陞郡黃鉉以經明行修稱世
 近代又有黃瑞黃俊良之博洽多聞皆未能詳其-祖而著其同宗遂爲吾子孫無窮之 近代又有黃瑞黃俊良之博洽多聞皆未能詳其-祖而著其同宗遂爲吾子孫無窮之
-痛嗚呼吾僻郡也吾輩孱孫也處僻郡爲孱孫目見世族之流於氓隷子姓之遠於行+痛嗚呼吾僻郡也吾輩孱孫也處僻郡爲孱孫目見世族之流於氓隷子姓之遠於行
 路無窮之痛到此又如何也重以壬癸陽六甚於麗季之蕩盡後日之無徵應甚於今日 路無窮之痛到此又如何也重以壬癸陽六甚於麗季之蕩盡後日之無徵應甚於今日
 之無存氓隸行路之歎亦應益甚於今日之孱孫用是大懼有志裒集而疾病相仍耳目 之無存氓隸行路之歎亦應益甚於今日之孱孫用是大懼有志裒集而疾病相仍耳目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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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hidden> </hidden>
 \\ \\
 +<typo ff:'바탕'; fs:1em; lh:1.5em>
 \_평해황씨 초간 세보서\\ \_평해황씨 초간 세보서\\
 \_황씨가 우리나라에 나타난지 오래되었다. 신라(新羅)가 처음으로 여섯  \_황씨가 우리나라에 나타난지 오래되었다. 신라(新羅)가 처음으로 여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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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어떤 사람인지 몰라서 서로 혼인을 하고도 편안히 여기고 부끄러워함이 없었으니  어떤 사람인지 몰라서 서로 혼인을 하고도 편안히 여기고 부끄러워함이 없었으니 
 이는 어찌 크게 다행 중에 또 큰 불행이 아니겠는가.  이는 어찌 크게 다행 중에 또 큰 불행이 아니겠는가. 
-황서(黃瑞)((황서(黃瑞): 평해황씨 4세. 문절공(文節公). (족보)\\ 고려 후기 경상북도 울진 출신의 문신.\\ 본관은 평해(平海). 할아버지는 금오장군(金吾將軍)ㆍ태자검교(太子檢校)를 지낸 황온인이고, 아버지는 문하시중(門下侍中)을 지낸 황유중(黃裕中)이다. 형제로는 검교군기감(檢校軍器監) 황진(黃璡)과 숭록대부삼중대광보국(崇祿大夫三重大匡輔國) 황용(黃[王庸]) 등이 있다.\\ 충렬왕(忠烈王) 때 세자를 위하여 세 번이나 원나라에 갔다 와서 익대공훈(翼戴功勳)으로 금자광록대부(金紫光祿大夫)의 품계를 받고 첨의평리(僉議評理), 문하시중을 역임하였다. 평해현을 군으로 승격시켜 줄 것을 왕에게 상소하여 평해현이 평해군으로 승격되었다.\\ 묘소는 실전되었다. 제단비가 울진군 평해읍 월송3리 월송정에 있으며, 신도비는 울진군 기성면 척산3리에 있다.\\ 시호는 충절(忠節)이다. 『문헌통고(文獻通考)』에 의하면 첨의(僉議) 주열(朱悅)ㆍ좌정승(左政承) 한종유(韓宗愈)ㆍ지첨의(知僉議) 황서(黃瑞)ㆍ전서(典書) 양사도(梁思道)ㆍ시중 차원부 등 5인이 동시에 문절(文節)의 시호를 받았다고 되어 있어, 충(忠)자가 문(文)자로 바뀌었다고 한다. (한국향토문화전자대전) ))가 익대공신(翊戴功臣)이 됨으로 그 고을이 현(縣)에서 군(郡)으로 승격되었고 황현(黃鉉)((황현(黃鉉): 평해황씨 9세, 검교공파. 신도비가 영주에 있다. (족보)\\ 1372(공민왕 21)∼?. 조선 전기의 문신.\\ 본관은 평해(平海). 고려시대 시중 황유중(黃裕中)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직제학 황근(黃瑾)이고, 아버지는 공조판서 황유정(黃有定)이다.\\ 1393년(태조 2) 춘장문과(春場文科)에 동진사(同進士)로 급제하고, 1407년(태종 7) 성균관직강(成均館直講)으로서 중시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경승부소윤(敬承府少尹)에 초배(超拜)되었다. 태종과 세종대에 대사성을 지냈으며, 1428년(세종 10) 인수부윤(仁壽府尹)을 거쳐 1429년 행성균대사성(行成均大司成)을 겸직하였다. 1430년 변계량(卞季良)과 함께 행성균대사성으로서 문과초시 때 강경(講經) 중 두가지 시제(試題)만을 뽑아 제술(製述)할 것을 건의, 실시하게 하였다. 그러나 유학자들이 여전히 초록집(抄錄集)에만 의존하고 경학(經學)을 경시한다는 건의에 따라 그 뒤 다시 과거에서 경서강독(經書講讀)이 시행되었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 ))이 경서에 밝고 행실이 닦아져서 세상에 칭송을 받았고 근대에 또 황서(黃瑞)((황서(黃瑞): 평해황씨 11세. 충경공파. 생부는 세통(世通). 5촌 숙부 세침(世沉)의 계자(系子) (족보)\\ 생몰년 미상. 조선 중기의 문신.\\ 본관은 평해(平海). 자는 정옥(廷玉). 황자중(黃自中)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황전(黃詮)이고, 아버지는 황세통(黃世通)이며, 어머니는 윤질(尹晊)의 딸이다.\\ 1552년(명종 7) 사과(司果)로서 식년문과에 장원급제하였고, 같은 해 봉상시주부로서 전경(殿經)에 참여하여 뛰어난 학문적 능력을 인정받았다. 1555년(명종 10) 사헌부지평으로서 사부학당(四部學堂)을 비롯한 관학교육의 침체상을 지적하고 시정을 촉구하였다.\\ 예조정랑을 거쳐 다시 지평이 되었으나, 장악원정 심전沈銓이 사사로이 노비를 얻으려는 일이 발생하였을 때 “포고절목(捕告節目)(: 사민(徙民)으로서 도망가는 자에 대한 처벌법)을 엄격하게 이행치 못하였다.”는 탄핵을 받아 파직되었다.\\ 1556년 사간원헌납으로 복직되었으며, 병조정랑, 지평, 홍문관교리ㆍ부응교 등을 두루 역임하였다. 1559년 양남지방에 큰 흉년이 들자 경상도 지역의 어사로 파견되어 수령들의 진휼 활동 여부를 파악하여 중앙에 보고하는 한편 직접 백성들을 구휼하는 데 진력하였다.\\ 홍문관응교, 의정부검상ㆍ사인, 홍문관 전한 등을 거쳐 1564년 직제학이 되었다가 승정원동부승지ㆍ예조참의, 우부승지ㆍ좌부승지, 병조참지 등을 거치고, 1566년(명종 21) 청홍도관찰사(淸洪道觀察使)를 역임하였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 )) 황준량(黃俊良) 등 박학다문한 이가 있었는데 또 그 조상이 하나라는 것 또한 종친이라는 것을 뚜렷이 나타낼 수가 없어서 드디어 우리 자손들에게 끝없이 통탄스러운 일이 되었다.\\+황서(黃瑞)((황서(黃瑞): 평해황씨 4세. 문절공(文節公). (족보)\\ 고려 후기 경상북도 울진 출신의 문신.\\ 본관은 평해(平海). 할아버지는 금오장군(金吾將軍)ㆍ태자검교(太子檢校)를 지낸 황온인이고, 아버지는 문하시중(門下侍中)을 지낸 황유중(黃裕中)이다. 형제로는 검교군기감(檢校軍器監) 황진(黃璡)과 숭록대부삼중대광보국(崇祿大夫三重大匡輔國) 황용(黃𤨭) 등이 있다.\\ 충렬왕(忠烈王) 때 세자를 위하여 세 번이나 원나라에 갔다 와서 익대공훈(翼戴功勳)으로 금자광록대부(金紫光祿大夫)의 품계를 받고 첨의평리(僉議評理), 문하시중을 역임하였다. 평해현을 군으로 승격시켜 줄 것을 왕에게 상소하여 평해현이 평해군으로 승격되었다.\\ 묘소는 실전되었다. 제단비가 울진군 평해읍 월송3리 월송정에 있으며, 신도비는 울진군 기성면 척산3리에 있다.\\ 시호는 충절(忠節)이다. 『문헌통고(文獻通考)』에 의하면 첨의(僉議) 주열(朱悅)ㆍ좌정승(左政承) 한종유(韓宗愈)ㆍ지첨의(知僉議) 황서(黃瑞)ㆍ전서(典書) 양사도(梁思道)ㆍ시중 차원부 등 5인이 동시에 문절(文節)의 시호를 받았다고 되어 있어, 충(忠)자가 문(文)자로 바뀌었다고 한다. (한국향토문화전자대전) ))가 익대공신(翊戴功臣)이 됨으로 그 고을이 현(縣)에서 군(郡)으로 승격되었고 황현(黃鉉)((황현(黃鉉): 평해황씨 9세, 검교공파. 신도비가 영주에 있다. (족보)\\ 1372(공민왕 21)∼?. 조선 전기의 문신.\\ 본관은 평해(平海). 고려시대 시중 황유중(黃裕中)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직제학 황근(黃瑾)이고, 아버지는 공조판서 황유정(黃有定)이다.\\ 1393년(태조 2) 춘장문과(春場文科)에 동진사(同進士)로 급제하고, 1407년(태종 7) 성균관직강(成均館直講)으로서 중시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경승부소윤(敬承府少尹)에 초배(超拜)되었다. 태종과 세종대에 대사성을 지냈으며, 1428년(세종 10) 인수부윤(仁壽府尹)을 거쳐 1429년 행성균대사성(行成均大司成)을 겸직하였다. 1430년 변계량(卞季良)과 함께 행성균대사성으로서 문과초시 때 강경(講經) 중 두가지 시제(試題)만을 뽑아 제술(製述)할 것을 건의, 실시하게 하였다. 그러나 유학자들이 여전히 초록집(抄錄集)에만 의존하고 경학(經學)을 경시한다는 건의에 따라 그 뒤 다시 과거에서 경서강독(經書講讀)이 시행되었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 ))이 경서에 밝고 행실이 닦아져서 세상에 칭송을 받았고 근대에 또 황서(黃瑞)((황서(黃瑞): 평해황씨 11세. 충경공파. 생부는 세통(世通). 5촌 숙부 세침(世沉)의 계자(系子) (족보)\\ 생몰년 미상. 조선 중기의 문신.\\ 본관은 평해(平海). 자는 정옥(廷玉). 황자중(黃自中)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황전(黃詮)이고, 아버지는 황세통(黃世通)이며, 어머니는 윤질(尹晊)의 딸이다.\\ 1552년(명종 7) 사과(司果)로서 식년문과에 장원급제하였고, 같은 해 봉상시주부로서 전경(殿經)에 참여하여 뛰어난 학문적 능력을 인정받았다. 1555년(명종 10) 사헌부지평으로서 사부학당(四部學堂)을 비롯한 관학교육의 침체상을 지적하고 시정을 촉구하였다.\\ 예조정랑을 거쳐 다시 지평이 되었으나, 장악원정 심전沈銓이 사사로이 노비를 얻으려는 일이 발생하였을 때 “포고절목(捕告節目)(: 사민(徙民)으로서 도망가는 자에 대한 처벌법)을 엄격하게 이행치 못하였다.”는 탄핵을 받아 파직되었다.\\ 1556년 사간원헌납으로 복직되었으며, 병조정랑, 지평, 홍문관교리ㆍ부응교 등을 두루 역임하였다. 1559년 양남지방에 큰 흉년이 들자 경상도 지역의 어사로 파견되어 수령들의 진휼 활동 여부를 파악하여 중앙에 보고하는 한편 직접 백성들을 구휼하는 데 진력하였다.\\ 홍문관응교, 의정부검상ㆍ사인, 홍문관 전한 등을 거쳐 1564년 직제학이 되었다가 승정원동부승지ㆍ예조참의, 우부승지ㆍ좌부승지, 병조참지 등을 거치고, 1566년(명종 21) 청홍도관찰사(淸洪道觀察使)를 역임하였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 )) 황준량(黃俊良) 등 박학다문한 이가 있었는데 또 그 조상이 하나라는 것 또한 종친이라는 것을 뚜렷이 나타낼 수가 없어서 드디어 우리 자손들에게 끝없이 통탄스러운 일이 되었다.\\
 \_오호라! 우리 관향은 궁벽진 곳에 있는 고을이요, 우리들은 쇠잔한 자손이다.\\ \_오호라! 우리 관향은 궁벽진 곳에 있는 고을이요, 우리들은 쇠잔한 자손이다.\\
 \_궁벽한 고을에 거처하며 쇠잔한 자손이 되었으니 대대로 벼슬하던 우리 세족이 천민과 노예로 흘러 떨어지고 자손이 길가에서 만난 사람처럼 남보다도 더 멀어진 것을 눈으로 보게 되었으니 끝없이 통탄함이 여기에 이르렀다. 이를 또 어떻게 하겠는가?\\ \_궁벽한 고을에 거처하며 쇠잔한 자손이 되었으니 대대로 벼슬하던 우리 세족이 천민과 노예로 흘러 떨어지고 자손이 길가에서 만난 사람처럼 남보다도 더 멀어진 것을 눈으로 보게 되었으니 끝없이 통탄함이 여기에 이르렀다. 이를 또 어떻게 하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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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_\_황명만력(皇明萬歷) 갑진(甲辰)(: 1604년) 상순(上旬) \_\_황명만력(皇明萬歷) 갑진(甲辰)(: 1604년) 상순(上旬)
  후손 통훈대부 행(行) 예천군수 여일(汝一)은 삼가 쓴다.  후손 통훈대부 행(行) 예천군수 여일(汝一)은 삼가 쓴다.
 +</typo>
 </WRAP> </WRAP>
a-001.1747649358.txt.gz · 마지막으로 수정됨: 2025/05/19 19:09 저자 ssio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