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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孝子黃聖一墓碣略 | + | ===효자황성일묘갈략(孝子黃聖一墓碣略)=== |
- | 曰黃君永錫甫袖 高宗朝續修三綱錄及前後儒林狀抵相堯蔌蔌曰此吾高王考孝 | + | <WRAP 33em justify>< |
- | 行顛末而皐鶴未澈滄桑遽燮矧又表阡之文尚闕願惠一言俾闡幽德也相堯亦鄉里 | + | <typo ff:' |
- | 之人聞慕者久遂乃斂祚而按狀則吾家先啣在在其中油然興感不可以非人辭謹撰 | + | \_孝子黃聖一墓碣略\\ |
- | 次而叙之公諱聖一字基賢海隱其自號也箕城之黃自學士諱洛始繁衍于東簪組蟬 | + | 曰黃君永錫甫袖\_高宗朝續修三綱錄及前後儒林狀抵相堯蔌蔌曰此吾高王考孝 |
- | 聯至檢校諱璡典書諱琄是其最著者而日重弼曰萬起曰驗興曰命遜寔公之高曾祖 | + | 行顚末而皐鶴未澈滄桑遽燮矧又表阡之文尙闕願惠一言俾闡幽德也相堯亦鄕里 |
- | 禰也公生于正廟癸卯幼有至性及長敦行孝友左右就養必有酒肉朝脯視膳定省 | + | 之人聞慕者久遂乃斂袵而按狀則吾家先啣在在其中油然興感不可以非人辭謹撰 |
+ | 次而敍之公諱聖一字基賢海隱其自號也箕城之黃自學士諱洛始繁衍于東簪組蟬 | ||
+ | 聯至檢校諱璡典書諱琄是其最著者而曰重弼曰萬起曰驗興曰命遜寔公之高曾祖 | ||
+ | 禰也公生于\_正廟癸卯幼有至性及長敦行孝友左右就養必有酒肉朝脯視膳定省 | ||
不廢父病祈天代命至有氷魚之感廬墓六年一如袒括實根天之誠也以壽陞通政卒 | 不廢父病祈天代命至有氷魚之感廬墓六年一如袒括實根天之誠也以壽陞通政卒 | ||
- | 于癸亥享年八十一葬縣南池品德高峴負庚之原配淑夫人丹陽禹氏光嚇之女有閨 | + | 于癸亥享年八十一葬縣南池品德高峴負庚之原配淑夫人丹陽禹氏光爀之女有閨 |
範男宗郁女適蔚珍張玄默宗郁男仁周義周禮周女盧相經張景萬張相五張奎井曾 | 範男宗郁女適蔚珍張玄默宗郁男仁周義周禮周女盧相經張景萬張相五張奎井曾 | ||
- | 玄以下不盡錄嗚呼公以純孝至行僻在遐陬屢有儒林闡揚之舉而雖未蒙棹楔之典 | + | 玄以下不盡錄嗚呼公以純孝至行僻在遐陬屢有儒林闡揚之擧而雖未蒙棹禊之典 |
- | 但一部三綱錄足以聳觀聽而耀百世矣豈不韙哉遂起敬而為之銘曰 曾養玉感古 | + | 但一部三綱錄足以聳觀聽而耀百世矣豈不韙哉遂起敬而爲之銘曰\_曾養玉感古 |
- | 亦罕觀我銘其遂用警末俗 | + | 亦罕覿我銘其𡑞用警末俗\\ |
- | 坡平尹相堯撰 | + | \_\_坡平尹相堯撰 |
- | + | </ | |
- | 효자 황성일 묘갈략(孝子黃聖一墓碣略) | + | </ |
- | 어느 날 황영석(黃永錫)군이 고종 | + | \\ |
+ | <typo fs: | ||
+ | \_효자 황성일 묘갈략\\ | ||
+ | \_어느 날 황영석(黃永錫)군이 고종(高宗) 조(朝) 때의 속수삼강록(續修三綱錄)과 성일(聖一) | ||
선생 전후에 걸쳐 유림들이 올린 소장(疎章)들을 소매에 넣어 가지고 와서 상요(相堯)에게 | 선생 전후에 걸쳐 유림들이 올린 소장(疎章)들을 소매에 넣어 가지고 와서 상요(相堯)에게 | ||
내어 놓고 눈물을 흘리며 말하기를 「이것은 나의 고조부가 행한 효행(孝行)의 시말(始末)인데 | 내어 놓고 눈물을 흘리며 말하기를 「이것은 나의 고조부가 행한 효행(孝行)의 시말(始末)인데 | ||
임금에게 알려지지 못하고 또 나라가 엄청나게 변화해서 망하고 또 묘갈문(墓碣文)이 아직도 | 임금에게 알려지지 못하고 또 나라가 엄청나게 변화해서 망하고 또 묘갈문(墓碣文)이 아직도 | ||
- | 없으니 원컨대 한 말씀을 주셔서 숨겨진 덕을 나타내 주십시오」라고 했다. | + | 없으니 원컨대 한 말씀을 주셔서 숨겨진 덕을 나타내 주십시오」라고 했다.\\ |
- | 상요(相堯) 역시 그 향리(鄉里)의 사람으로 그의 소문을 듣고 사모 한 지가 오래되었다. | + | \_상요(相堯) 역시 그 향리(鄕里)의 사람으로 그의 소문을 듣고 사모한 지가 오래되었다.\\ |
- | 이제 옷깃을 여미고 그 행장(行狀)을 상고 해 보니 우리 가문의 선대 어른의 이름이 | + | \_이제 옷깃을 여미고 그 행장(行狀)을 상고해 보니 우리 가문의 선대 어른의 이름이 |
그 안에 적혀 있었는데 유연하게 감회가 일어났다. 그러니 내가 묘갈문을 쓸 적임자가 | 그 안에 적혀 있었는데 유연하게 감회가 일어났다. 그러니 내가 묘갈문을 쓸 적임자가 | ||
- | 아니라는 이유를 들어 사양할 수가 없다. 삼가 찬술하기를 차례대로 해서 서술한다. | + | 아니라는 이유를 들어 사양할 수가 없다. 삼가 찬술하기를 차례대로 해서 서술한다.\\ |
- | 공(公)의 이름을 성일(聖一)이고 자(字)는 기현(基賢)이요 해은(海隱)은 지은 자호(自號)이다. | + | \_공(公)의 이름을 성일(聖一)이고 자(字)는 기현(基賢)이요 해은(海隱)은 지은 자호(自號)이다.\\ |
- | 평해 황씨(黃氏)는 학사(學士)공 휘(諱) 낙(洛)으로부터 시초하여 동방에 번창하게 되어서 | + | \_평해 황씨(黃氏)는 학사(學士)공 휘(諱) 낙(洛)으로부터 시초하여 동방에 번창하게 되어서 |
벼슬이 빛났는데 검교공(檢校公)인 휘 진(璡)과 전서공(典書公)인 휘 현(琄)이 그 중에서 | 벼슬이 빛났는데 검교공(檢校公)인 휘 진(璡)과 전서공(典書公)인 휘 현(琄)이 그 중에서 | ||
- | 가장 뚜렷하였다. | + | 가장 뚜렷하였다.\\ |
- | 공(公)의 고조는 중필(重弼)이요 증조는 만기(萬起)이며 할아버지는 험흥(驗興)이며 | + | \_공(公)의 고조는 중필(重弼)이요 증조는 만기(萬起)이며 할아버지는 험흥(驗興)이며 |
- | 아버지는 명손(命遜)이다.공은 정조(正祖)때 계묘(癸卯一七八三)년에 태어났다. 어려서부터 | + | 아버지는 명손(命遜)이다. 공은 정조(正祖) 때 계묘(癸卯) 1783(一七八三)년에 태어났다. 어려서부터 |
- | 지극한 성품을 지니고 있었다. 장성함에 이르러 효도와 우애를 돈독하게 실천하여서 이리 | + | 지극한 성품을 지니고 있었다. 장성함에 이르러 효도와 우애를 돈독하게 실천하여서 |
- | + | 이리저리 나아가 부모 봉양(奉養)을 하되 반드시 술과 고기를 장만했으며 아침저녁으로 진지 | |
- | 저리 나아가 부모 봉양(奉養)을 하되 반드시 술과 고기를 장만했으며 아침저녁으로 진지 | + | 상을 보살피고 혼정성신(昏定省晨)하는 것을 잊지 않고 행하였으며 아버지가 병이 들자 |
- | 상을 보살피고 혼정성신(昏定省晨)하는 것을 잊지 않고 행하였으며 아버지가 병이 들자 | + | 하늘에 자기가 대신 죽겠다고 기도를 드렸으며 얼음이 언 겨울에 물고기를 얻는 하늘의 감동을 |
- | 늘에 자기가 대신 죽겠다고 기도를 드렸으며 얼음이 언 겨울에 물고기를 얻는 하늘의 감동을 | + | 받기까지 하였다. 그리고 부모가 돌아가시자 시묘(侍墓)하기를 |
- | 받기까지 하였다.그리고 부모가 돌아가시자 시묘(侍墓)하기를 六년 동안이나 한결같이 | + | 초상(初喪) 때처럼 슬픈 정(情)으로 행했으니 이는 실로 하늘로서 타고난 정성(精誠)이였다.\\ |
- | 초상(初喪)때처럼 슬픈 정(情)으로 행했으니 이는 실로 하늘로서 타고난 정성(精誠)이였다. | + | \_공(公)은 수(壽)를 누림으로 인해 통정대부(通政大夫)가 되었고 계해(癸亥) 1863(一八六三)년에 |
- | 공(公)은 수(壽)를 누림으로 인해 통정대부(通政大夫)가 되었고 계해(癸亥一八六三)년에 | + | 향년(享年) |
- | 향년(享年) 八一세로 세상을 떠났다. 현남지 품덕 고현 경좌원(縣南池品德高峴庚座原)에 장 | + | 예의 범절이 있었다. 공의 아들의 이름은 종욱(宗郁)이요 딸은 울진(蔚珍) 장씨(張氏) |
- | 례를 지냈다.공의 배(配)인 숙부인단양우씨(淑夫人丹陽禹氏)로 광혁(光赫)공의 딸이며 | + | 현묵(玄默)에게 출가하였다. 종욱의 아들은 인주(仁周)이고 종욱의 딸들은 |
- | 예의 범절이 있었다.공의 아들의 이름은 종욱(宗郁)이요 딸은 울진(蔚珍) 장씨(張氏) | + | 노상경(盧相經)ㆍ장경만(張景萬)ㆍ장상오(張相五)ㆍ장규정(張奎井)에게 각각 시집 갔다. 증손과 현손 이하는 |
- | 묵(玄默)에게 출가하였다.종욱의 아들은 인주(仁周)이고 종욱의 딸들은 노상경(盧相經)· | + | 다 기록하지 못한다.\\ |
- | 장경만(張景萬)·장상오(張相五)·장규정(張奎井)에게 각각 시집 갔다. 증손과 현손 이하는 | + | \_아! 공은 순수함과 지극한 행실로서 궁벽한 먼 곳에 있어서 여러 |
- | 다 기록하지 못한다.아! 공은 순수함과 지극한 행실로서 궁벽한 먼 곳에 있어서 여러 | + | |
차례 유림(儒林)들이 천양(闡揚)하는 거사가 있었고 또한 비록 홍살문을 세우는 나라의 | 차례 유림(儒林)들이 천양(闡揚)하는 거사가 있었고 또한 비록 홍살문을 세우는 나라의 | ||
은전을 받지는 못했으나 삼강록(三綱錄)에 사람들이 보고 듣게 하여 백세에 빛나게 할 만 | 은전을 받지는 못했으나 삼강록(三綱錄)에 사람들이 보고 듣게 하여 백세에 빛나게 할 만 | ||
- | 하다. 어찌 훌륭하지 않는가!이에 공경하는 마음으로 명(銘)을 짓노니。 | + | 하다. 어찌 훌륭하지 않는가! 이에 공경하는 마음으로 명(銘)을 짓노니,\\ |
- | 일찍이 부모 봉양 옥감(五感)을 했으니 옛날에도 또한 보기 드문 일이로다. | + | 曾養玉感 |
- | 내가 무덤에 명을 짓노니 말세의 풍속을 경계하노라. | + | 古亦罕覿 |
- | 파평윤 상요(坡平尹相堯)는 짓는다. | + | 我銘其𡑞 |
+ | 用警末俗 | ||
+ | \_\_파평(坡平)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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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113.1747789265.txt.gz · 마지막으로 수정됨: 2025/05/21 10:01 저자 ssio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