효자황성일묘갈략(孝子黃聖一墓碣略)
효자 황성일 묘갈략
어느 날 황영석(黃永錫)군이 고종(高宗) 조(朝) 때의 속수삼강록(續修三綱錄)과 성일(聖一)
선생 전후에 걸쳐 유림들이 올린 소장(疎章)들을 소매에 넣어 가지고 와서 상요(相堯)에게
내어 놓고 눈물을 흘리며 말하기를 「이것은 나의 고조부가 행한 효행(孝行)의 시말(始末)인데
임금에게 알려지지 못하고 또 나라가 엄청나게 변화해서 망하고 또 묘갈문(墓碣文)이 아직도
없으니 원컨대 한 말씀을 주셔서 숨겨진 덕을 나타내 주십시오」라고 했다.
상요(相堯) 역시 그 향리(鄕里)의 사람으로 그의 소문을 듣고 사모한 지가 오래되었다.
이제 옷깃을 여미고 그 행장(行狀)을 상고해 보니 우리 가문의 선대 어른의 이름이
그 안에 적혀 있었는데 유연하게 감회가 일어났다. 그러니 내가 묘갈문을 쓸 적임자가
아니라는 이유를 들어 사양할 수가 없다. 삼가 찬술하기를 차례대로 해서 서술한다.
공(公)의 이름을 성일(聖一)이고 자(字)는 기현(基賢)이요 해은(海隱)은 지은 자호(自號)이다.
평해 황씨(黃氏)는 학사(學士)공 휘(諱) 낙(洛)으로부터 시초하여 동방에 번창하게 되어서
벼슬이 빛났는데 검교공(檢校公)인 휘 진(璡)과 전서공(典書公)인 휘 현(琄)이 그 중에서
가장 뚜렷하였다.
공(公)의 고조는 중필(重弼)이요 증조는 만기(萬起)이며 할아버지는 험흥(驗興)이며
아버지는 명손(命遜)이다. 공은 정조(正祖) 때 계묘(癸卯) 1783(一七八三)년에 태어났다. 어려서부터
지극한 성품을 지니고 있었다. 장성함에 이르러 효도와 우애를 돈독하게 실천하여서
이리저리 나아가 부모 봉양(奉養)을 하되 반드시 술과 고기를 장만했으며 아침저녁으로 진지
상을 보살피고 혼정성신(昏定省晨)하는 것을 잊지 않고 행하였으며 아버지가 병이 들자
하늘에 자기가 대신 죽겠다고 기도를 드렸으며 얼음이 언 겨울에 물고기를 얻는 하늘의 감동을
받기까지 하였다. 그리고 부모가 돌아가시자 시묘(侍墓)하기를 6(六)년 동안이나 한결같이
초상(初喪) 때처럼 슬픈 정(情)으로 행했으니 이는 실로 하늘로서 타고난 정성(精誠)이였다.
공(公)은 수(壽)를 누림으로 인해 통정대부(通政大夫)가 되었고 계해(癸亥) 1863(一八六三)년에
향년(享年) 81(八一)세로 세상을 떠났다. 현남지 품덕 고현 경좌원(縣南池品德高峴庚座原)에 장례를 지냈다. 공의 배(配)인 숙부인단양우씨(淑夫人丹陽禹氏)로 광혁(光赫)공의 딸이며
예의 범절이 있었다. 공의 아들의 이름은 종욱(宗郁)이요 딸은 울진(蔚珍) 장씨(張氏)
현묵(玄默)에게 출가하였다. 종욱의 아들은 인주(仁周)이고 종욱의 딸들은
노상경(盧相經)ㆍ장경만(張景萬)ㆍ장상오(張相五)ㆍ장규정(張奎井)에게 각각 시집 갔다. 증손과 현손 이하는
다 기록하지 못한다.
아! 공은 순수함과 지극한 행실로서 궁벽한 먼 곳에 있어서 여러
차례 유림(儒林)들이 천양(闡揚)하는 거사가 있었고 또한 비록 홍살문을 세우는 나라의
은전을 받지는 못했으나 삼강록(三綱錄)에 사람들이 보고 듣게 하여 백세에 빛나게 할 만
하다. 어찌 훌륭하지 않는가! 이에 공경하는 마음으로 명(銘)을 짓노니,
曾養玉感 일찍이 부모 봉양 옥감(玉感)을 했으니
古亦罕覿 옛날에도 또한 보기 드문 일이로다.
我銘其𡑞 내가 무덤에 명을 짓노니
用警末俗 말세의 풍속을 경계하노라.
파평(坡平) 윤상요(尹相堯)는 짓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