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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121 [2025/05/22 19:03] ssio2a-121 [2025/05/26 10:27] (현재) ssio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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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_욱양단소 이건기(郁陽壇所移建記)\\+\_**욱양단소 이건기(郁陽壇所移建記)**\\
 \_금(今) 욱양단소(郁陽壇所)는 옛 욱양서원(郁陽書院)으로 처음에는  \_금(今) 욱양단소(郁陽壇所)는 옛 욱양서원(郁陽書院)으로 처음에는 
 풍기읍(豊基邑) 욱금리(郁錦里)에 있었는데 이는 현종(顯宗) 3년(三年) 서기(西紀) 풍기읍(豊基邑) 욱금리(郁錦里)에 있었는데 이는 현종(顯宗) 3년(三年) 서기(西紀)
 1663년(一六六三年) 임인(壬寅)에 창건(創建)하여 퇴계(退溪) 이황(李滉) 선생(先生)을 봉안(奉安) 제향(祭享)하여 왔는데 숙종(肅宗) 16년(十六年) 서기(西紀) 1690년(一六九○年) 1663년(一六六三年) 임인(壬寅)에 창건(創建)하여 퇴계(退溪) 이황(李滉) 선생(先生)을 봉안(奉安) 제향(祭享)하여 왔는데 숙종(肅宗) 16년(十六年) 서기(西紀) 1690년(一六九○年)
-경오(庚午)에 퇴계(退溪) 문중(門中)에서도 그 고매(高邁)한 학덕(學德)으로 사군(師君)의 배향(配享)을 해옴을 가상(嘉)하게 여겨 우리 금계(錦溪) 선조(先祖)도 함께 배향(配享)하여 인재(人材)를 양성(養成)해오던 전당(殿堂)이 되었다.\\ +경오(庚午)에 퇴계(退溪) 문중(門中)에서도 그 고매(高邁)한 학덕(學德)으로 사군(師君)의 배향(配享)을 해옴을 가상(嘉)하게 여겨 우리 금계(錦溪) 선조(先祖)도 함께 배향(配享)하여 인재(人材)를 양성(養成)해오던 전당(殿堂)이 되었다.\\ 
-\_그 후(後) 대원군(大院君) 집정(執政) 무렵인 고종(高宗) 5년(五年) 서기(西紀) 1868(一八六八年) 무진(戊辰)에 국령(國令)으로 철폐(撤廢)되어 욱양단소(郁陽壇所)로+ 
 +\_그 후(後) 대원군(大院君) 집정(執政) 무렵인 고종(高宗) 5년(五年) 서기(西紀) 1868(一八六八年) 무진(戊辰)에 국령(國令)으로 철폐(撤廢)되어 욱양단소(郁陽壇所)로
 명칭(名稱)을 바꾸어 다시 종전(從前)대로 제향(祭享)을 받들어 왔는데 또 화재(火災)로 묘우(廟宇)가 소실(燒失)되고 강당(講堂)과 명칭(名稱)을 바꾸어 다시 종전(從前)대로 제향(祭享)을 받들어 왔는데 또 화재(火災)로 묘우(廟宇)가 소실(燒失)되고 강당(講堂)과
 재실(齋室)만 남아 십수년간(十數年間) 향사(享祀)를 치르지 못한 바 모든 백성(百姓)의 사표(師表)가 되는 이 두분 선생(先生)의 향례(享禮)는 폐향(廢享)할 수 없다는 사림(士林)들의 건의(建議)로 강당(講堂) 윗편에 제단(祭壇)을 설립(設立)하고 향사(享祀)를 다시 치러 재실(齋室)만 남아 십수년간(十數年間) 향사(享祀)를 치르지 못한 바 모든 백성(百姓)의 사표(師表)가 되는 이 두분 선생(先生)의 향례(享禮)는 폐향(廢享)할 수 없다는 사림(士林)들의 건의(建議)로 강당(講堂) 윗편에 제단(祭壇)을 설립(設立)하고 향사(享祀)를 다시 치러
 왔으나 서기(西紀) 1950년(一九五○年) 경인(庚寅)에 625동란(六二五動亂)으로 전략상(戰略上) 욱금(郁錦)마을이 소개(疏開)되어 그 이듬해 천신만고(千辛萬若) 끝에 복구(復舊)는 되었으나 서기(西紀) 1983년(一九八三年) 계해(癸亥)에 또다시 저수지(貯水池) 축조(築造)로 욱금(郁錦)마을이 수난(受難)을 왔으나 서기(西紀) 1950년(一九五○年) 경인(庚寅)에 625동란(六二五動亂)으로 전략상(戰略上) 욱금(郁錦)마을이 소개(疏開)되어 그 이듬해 천신만고(千辛萬若) 끝에 복구(復舊)는 되었으나 서기(西紀) 1983년(一九八三年) 계해(癸亥)에 또다시 저수지(貯水池) 축조(築造)로 욱금(郁錦)마을이 수난(受難)을
-당(當)해 우리 황씨문중(黃氏門中)의 3백여년(三百餘年)의 세거(世居) 터전이 물 속에 잠기게 되어 부득이)不得已) 단소(壇所)를 이건(移建)하게 되었다.\\ +당(當)해 우리 황씨문중(黃氏門中)의 3백여년(三百餘年)의 세거(世居) 터전이 물 속에 잠기게 되어 부득이(不得已) 단소(壇所)를 이건(移建)하게 되었다.\\ 
-\_이 事案으로 여러차례의 門會와 儒林會議를 거쳐 西紀一九九○年 庚午五月十五日宗中 + 
-및 儒林連席會議를 하여 錦陽精舍境로 移建하기로 決議하여 推進은 하였으나 먼저 앞서는 +\_이 사안(事案)으로 여러 차례의 문회(門會)와 유림회의(儒林會議)를 거쳐 서기(西紀) 1990년(一九九○年) 경오(庚午)  5월(五月) 15일(十五日) 종중(宗中) 
-問題가 財力關係로서 白洞의 黃潤圭氏께서 于先 政府의 補助金을 要求하자는 案을 提議하자 +및 유림(儒林) 연석회의(連席會議)를 하여 금양정사(錦陽精舍) 경내(內)로 이건(移建)하기로 결의(決議)하여 추진(推進)은 하였으나 먼저 앞서는 
-黃弼相徐庭學氏가 贊同하여 이에 活躍中 그때 마침 宗人 黃海潤이 榮豐副郡守로 在任中 +문제(問題)가 재력(財力) 관계(關係)로서 백동(白洞)의 황윤규(黃潤圭)씨()께서 우선(于先) 정부(政府)의 보조금(補助金)을 요구(要求)하자는 안()을 제의(提議)하자 
-에 있어 같이 合勢하여 巨金 二千萬원을 받았으며 이어 門會를 열어 柄旭元燮永鳳天燮+황필상(黃弼相), 서정학(徐庭學)씨()가 찬동(贊同)하여 이에 활약(活躍) 중(그때 마침 종인(宗人) 황해윤(黃海潤)이 영풍(榮豐) 부군수(副郡守)로 재임(在任) 중()에 있어 같이 합세(合勢)하여 거금(巨金) 2천만(二千萬)원을 받았으며 이어 문회(門會)를 열어 병욱(柄旭), 원섭(元燮), 영봉(永鳳), 천섭(天燮) 등(等)이 적극(積極) 노력(努力)하여 뜻 있는 많은 분들의 후의(厚意)의 성금(誠金)이 1억2천만(一億二千萬)원이 마련되므로 서둘러 정사(精舍)옆에 단소(壇所) 기공(起工) 역사(役事)를 서기(西紀) 1991년(一九九一年) 신미(辛未)에 착공(着工)하여 퇴계(退溪) 선생(先生)과 금계(錦溪) 선생(先祖) 양위(兩位)의 
 +제단비(祭壇碑)를 세우고 정문(正門)과 원장(垣墻)을 쌓아 만(滿) 2년(二年)만인 서기(西紀) 1993년(一九九三年) 계유(癸酉)에 준공(竣工)되었다.\\ 
 + 
 +\_이 뜻깊은 사업(事業)에 물심양면(物心兩面)으로 협조(協助)해 주시고 한결같은 성원(聲援)을 보내주신 모든 분들에게 
 +충심(衷心)으로 감사(感謝)와 경의(敬意)를 표(表)해 마지 않는 바이다.\\ 
 + 
 +\_그리하여 그해 9월(九月)에 설단(設壇) 고일(告由)를 거행(擧行)함에 있어 도내(道內) 3백여(三百餘) 유림(儒林)이 참석(叅席)하여 성황리(盛況裡)에 
 +마치었다. 이 단소(壇所)의 위치(位置)를 살펴보면 학식(學識)과 덕망(德望)이 높으신 금계(錦溪) 선조(先祖)의 수도지(修道地)로서 이 유서(由緖) 깊은 금양정사(錦陽精舍)의 옆으로서 뒤로는 농암산(籠岩山)자락이 아담하게 휘돌아 감아 양명(陽明)하기를 이를데 
 +없으며 앞은 금계(錦溪) 선조(先祖)의 빛나는 업적(業蹟)을 말해주듯 수백년(數百年) 묵은 송림(松林)이 울창(鬱蒼)하고 기암괴석(奇岩怪石)이 
 +즐비하여 사시(四時)에 옥(玉)이 굴러가는 듯한 계곡의 물소리가 들려오는 절경(絶景) 금선정(錦仙亭)을 굽어보는 
 +참으로 아름다운 명승(名勝) 중(中)의 명승지(名勝地)이다.\\ 
 + 
 +\_이러한 이 금양정사(錦陽精舍)는 금계(錦溪) 선조(先祖)께서 은퇴(隱退) 후(後) 평소(平素) 소장(所藏)하고 계시던 서적(書籍)을 비치(備置)하고 후생(後生)을 
 +강도(講道)하는 곳으로 마련된 곳이다.\\ 
 + 
 +\_그럼에도 불구(不拘)하고 초창기(草創期) 한때 정사(精舍)의 수호(守護)가 어려움에 처(處)한 것을 퇴계(退溪) 선생(先生)께서 알고 
 +이 고을 수령(守令)에게 통문(通文)을 보내 일절(一切) 잡역(雜役)을 면제(免除)하도록 당부하여 그 당시(當時) 조완벽(趙完璧) 군수(郡守)가 
 +이 말씀을 잘 이행(履行)했다.\\ 
 + 
 +\_이것을 보더라도 금계(錦溪) 선생(先生)께서는 재임(在任) 당시(當時) 오로지 백성(百姓)을 위(爲)한 정치(政治)를 했을 뿐 사리사욕(私利私慾)에 치우치지 않았음을 잘 알게 되도다.\\ 
 + 
 +\_그리고 선조(宣祖) 28년(二八年) 서기(西紀) 1595년(一五九五年) 임진(壬辰)에  
 +유운룡(柳雲龍)((유운룡(柳雲龍): 조선(朝鮮) 선조(宣祖) 때의 목사(牧使)(1539~1601). 자(字)는 응견(應見). 호(號)는 겸암(謙庵). 유성룡(柳成龍)의 형(兄)으로, 선조(宣祖) 5년(年)(1572)에 전함사(典艦司) 별좌(別坐)를 지냈으며, 임진왜란(壬辰倭亂) 때 사복시(司僕寺) 첨정(僉正)을 거쳐 풍기(豐基) 군수(郡守)ㆍ원주(原州) 목사(牧使)를 지냈다. 저서(著書)에 ≪겸암집(謙庵集)≫ 따위가 있다.)) 군수(郡守)가 부임(赴任)하여 금양정사(錦陽精舍)를 돌아보고 
 +이 정사(精舍)가 부실함이 있게되면 이는 관민(官民) 모두가 부끄러운 일이라 하며 향사당(鄕射堂)((향사당(鄕射堂): 봄과 가을에 고을 사람들이 모여 향사음례(鄕射飮禮), 즉 활쏘기와 함께 잔치를 베풀던 곳이다. 여기서 ‘사(射)’는 공자가 “확상(矍相)의 들판에서 활을 쏘아 현인을 얻는다.”고 말한 것에서 유래하였다. 즉 옛날 어진 임금들이 몸소 인의(仁義)를 실행하여 백성을 인도한 것을 모방한 것이다.)) 벽상(壁上)에 기문(記文)을 
 +새겨 붙인 바도 있으며 또 인조(仁祖)조(朝) 서기(西紀) 1636년(一六三六年) 병자(丙子) 난리로 소실(燒失)되었고 숙종(肅宗) 27년(二七年) 서기(西紀) 1701년(一七○一年) 신사(辛巳)에 홍경렴(洪景濂) 군수(郡守)에게 금계(錦溪) 선조(先祖)의 6대(六代) 사손(嗣孫)인 성(垶)이 정사(精舍) 복원(復元)을 간절(懇切)하게 원(願)함을 
 +가상(嘉尙)하게 생각하여 힘을 도와 중건(重建)을 하니 재액(災厄)을 당(當)한지 60년(六十年)만이었다.\\ 
 + 
 +\_이렇듯 금양정사(錦陽精舍)야 말로 대대(代代)로 우여곡절(迂餘曲折)의 연속(連續)이었다.\\ 
 +\_이렇듯 맥(脈)을 이어온 정사(精舍)가 이제 만대불변(萬代不變)할 자리에 또 석각(石刻)을 하여 세워 놓으니 산천(山川)도 
 +빛을 더하고 연하(烟霞)도 오색(五色)의 빛을 더하는 듯 하며 연작(燕雀)도 하례(賀禮)하도다. 이렇듯이 정사(精舍)야 말로 
 +우리 황씨(黃氏)는 물론(勿論) 전국(全國) 유림(儒林)들까지도 숭배(崇拜)하리라 믿어 의심치 않는 바이다.\\
  
-이 積極努力하여 뜻 있는 많은 분들의 厚意의 誠金이 一億二千萬원이 마련 되므로 서둘 +\_이러한 금양정사(錦陽精舍)의 내력(來歷)을 금반(今般) 발간(發刊)되는 보첩(譜牒)의 서두(序頭) 한 편(篇)에 등재(登載)여 이 어른의 훌륭한 「얼」을 이어받아 앞으로 우리 문중(門)의 후예(後裔)들이 끊임없이 훌륭한 자손(子孫)이 태생(胎生)기를 기원(祈願)하는 바 크므로 (頭序)없이 우(右)와 같이 기술(記述)는 바이다.\\
-러 精舍옆에 壇所起工 役事를 西紀一九九一年 辛未에 着工하여 退溪先生과 錦溪先祖兩位 +
-祭壇碑를 세우고 正門과 垣墻을 쌓아 滿二年만인 西紀一九九三年 癸酉에 竣工었다. +
-이 뜻깊은 事業에 物心兩面으로 協助해 주시고 한결같은 聲援을 보내주신 모든 분들에게 +
-衷心으로 感謝와 敬意를 表해 마지 않는 바이다. +
-그리하여 그해 九月에 設壇 告由를 擧行함에 있어 道内 三百餘儒林이 叅席하여 盛況裡에 +
-마치었다.이 壇所의 位置를 살펴면 學識과 德望이 높으신 錦溪先祖의 修道地로서 이 由 +
-緒길은 錦陽精舍의 옆으로서 뒤로는 籠岩山자락이 아담게 휘돌아 감아 陽明하기를 를데 +
-없으며 앞은 錦溪先祖의 빛나는 業蹟을 말해주듯 數百年 묵은 松林이 鬱蒼하고 奇岩怪石이 +
-즐비하여 四時에 玉이 굴러가는 듯한 계곡의 물소리가 들려오는 絶景 錦仙亭을 굽보는 +
-으로 아름다운 名勝中의 名勝地다. +
-한 이 錦陽精舍는 錦溪先祖께서 隱退後 平素 所藏고 계시던 書籍을 備置하고 後生을 +
-講道하는 곳으로 마련된 곳이다. +
-그럼에도 不拘하고 草創期 한때 精舍의 守護가 어려움에 處한 것을 退溪先生께서 알고 +
-고을 守숙에게 通文을 보내 一切雜役을 免除도록 당부하여 그 當時 趙完璧 郡守가 +
-이 말씀을 잘 履行했다. +
-이것을 보더라도 錦溪先生께서는 在任當時 오로지 百姓을 爲한 政治를 했을 뿐 私利私 +
-慾에 치우치지 않았음을 잘 알게되도다.+
  
-그리고 宣祖二八年西紀一五九五年 壬辰에 柳雲龍郡守가 赴任하여 錦陽精舍를 돌아보고 +\_\_단군원(檀君紀元) 4333년(四千三百三十三年)(서기(西紀) 2천년(二千年)) 경진년(庚辰年) 월() 
-이 精舍가 부실함이 있게되면 이는 官民 모두가 부끄러운 일이라 하며 鄕射堂壁上에 記文을 +후예손(後裔孫) 영종(永宗) 근서(謹敍)
-새겨 붙인바도 있으며 또 仁祖朝西紀一六三六年丙子난리로 燒失되었고 肅宗二七年 西紀一 +
-七○一年辛巳에 洪景濂郡守에게 錦溪先祖의 六代嗣孫인 坪이 精舍復元을 懇切하게 願함을 +
-嘉尚하게 생각하여 힘을 도와 重建을 하니 災尼을 當한지 六十年만이었다. +
-이렇듯 錦陽精舍야 말로 代代로 迂餘曲折의 連續이었다. +
-이렇듯 脈을 이어온 精舍가 이제 萬代不變할 자리에 또 石刻을 하여 세워 놓으니 山川도 +
-빛을 더하고 烟霞도 五色의 빛을 더하는 듯 하며 燕雀도 賀禮하도다 이렇듯이 精舍야 말로 +
-우리 黃氏는 勿論 全國儒林들까지도 崇拜하리라 믿어 의심치 않는 바이다. +
-이러한 錦陽精舍의 來歷을 今般 發刊되는 譜牒의 序頭 한 篇에 登載하여 이 어른의 훌륭 +
-한 「얼」을 이어받아 앞으로 우리 門中의 後裔들이 끊임없이 훌륭한 子孫이 胎生하를 祈 +
-願하는 바 크므로 頭序없이 右와 같이 記述하는 바이다. +
-檀君紀元四千三百三十三年(西紀二千年)庚辰年 月 +
-後裔孫永宗謹敍+
 </typo> </typo>
 </WRAP> </WRAP>
a-121.1747908201.txt.gz · 마지막으로 수정됨: 2025/05/22 19:03 저자 ssio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