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0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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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경인대동보서(庚寅大同譜序) (1770년) -윤구(潤九)=== | + | ===경인대동보서(庚寅大同譜序) (1770년) - 윤구(潤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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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_庚寅大同譜序\\ | + | \_**庚寅大同譜序**\\ |
- | 平海之有吾氏肇自東漢建武之年迄千今一千七百四十有餘年海舟之自 | + | 平海之有吾氏肇自東漢建武之年迄于今一千七百四十有餘年海舟之自 |
- | 漢浦松之移越黃將軍之造山流傳為其城古事而皆遠不可稱述也由羅迄 | + | 漢浦松之移越黃將軍之造山流傳爲其城古事而皆遠不可稱述也由羅迄 |
- | 麗圭結聯翩碩士聞人輝映竹帛者前後相望而文籍無徵譜牒不傳各因流 | + | 麗圭絓聯翩碩士聞人輝映竹帛者前後相望而文籍無徵譜牒不傳各因流 |
- | 移隨作貫鄉其不失其城之籍而接派系溯源本者惟以吾金吾公為中祖嘉 | + | 移隨作貫鄕其不失其城之籍而接派系溯源本者惟以吾金吾公爲中祖嘉 |
- | 靖年間吾先祖錦溪先生始裒輯為草譜繼而有海月先生及南塘公所修之 | + | 靖年間吾先祖錦溪先生始裒輯爲草譜繼而有海月先生及南塘公所修之 |
- | 譜近又有曾叔祖處正之收錄三從父尚鐘之繕寫廣搜詳據幾成完譜而猶 | + | 譜近又有曾叔祖處正之收錄三從父尙鐘之繕寫廣搜詳據幾成完譜而猶 |
- | 未遑於刊行也開逢之歲長湍宗人變與外裔孫金汝綱合議為新譜先印襄 | + | 未遑於刊行也閼逢之歲長湍宗人燮與外裔孫金汝綱合議爲新譜先印襄 |
- | 武公派一卷走千里來示之其誠意則勤且摯而所錄系牒多差訛越二年閣 | + | 武公派一卷走千里來示之其誠意則勤且摯而所錄系牒多差訛越二年閹 |
- | 茂議移譜所于豐基之錦陽其明年秋燮以衰服瑜大嶺託宗人鎰幹其事而 | + | 茂議移譜所于豐基之錦陽其明年秋燮以衰服踰大嶺託宗人鎰幹其事而 |
- | 定有司收系單至屠維之夏而始付諸剖劂氏首尾六年譜事粗完此誠為一 | + | 定有司收系單至屠維之夏而始付諸剞劂氏首尾六年譜事粗完此誠爲一 |
- | 宗之大幸也昔日海月先生之為譜不及知為金吾公後孫而一篇遺序之作 | + | 宗之大幸也昔日海月先生之爲譜不及知爲金吾公後孫而一篇遺序之作 |
徒發未詳一祖之歎廼者長湍譜之新成亦不察夫大匡公倫序而堂世博洽 | 徒發未詳一祖之歎廼者長湍譜之新成亦不察夫大匡公倫序而堂世博洽 | ||
- | 之士便起舜禹世系之疑今皆\_互考究昭然釐正既知評理公為金吾公之 | + | 之士便起舜禹世系之疑今皆\_互考究昭然釐正旣知評理公爲金吾公之 |
- | 後而大匡公為評理公之弟三派序次昭穆行第秩然可觀後嗣孱孫於是乎 | + | 後而大匡公爲評理公之弟三派序次昭穆行第秩然可觀後嗣孱孫於是乎 |
無憾此又大幸中最大幸者也其他附錄諸派非無帳籍私譜之可據而旣漏 | 無憾此又大幸中最大幸者也其他附錄諸派非無帳籍私譜之可據而旣漏 | ||
- | 舊譜亦不敢直係異代此則不得不有待於他日也譜旣成諸宗以潤九為錦 | + | 舊譜亦不敢直係異代此則不得不有待於他日也譜旣成諸宗以潤九爲錦 |
- | 溪公宗嗣又居譜所傍得以與聞其始終俾為數行語以叙之既繫宗事亦不 | + | 溪公宗嗣又居譜所傍得以與聞其始終俾爲數行語以敍之旣繫宗事亦不 |
- | 敢以不肖辭嗚呼惟我黃氏之緒遠矣譜中所載勳賢碩德表表著稱皆可為 | + | 敢以不肖辭嗚呼惟我黃氏之緖遠矣譜中所載勳賢碩德表表著稱皆可爲 |
- | 宗族子姓之所可儀法凡我諸宗後嗣之觀於譜者又當交相勅勵以無泰祖 | + | 宗族子姓之所可儀法凡我諸宗後嗣之觀於譜者又當交相勅勵以無忝祖 |
- | 先遺德方能無負於收族合譜之勤意其各勉乎哉苦夫譜役之顛末功費之 | + | 先遺德方能無負於收族合譜之勤意其各勉乎哉苦夫譜役之顚末功費之 |
多寡自有家弟所記付干卷末今不復贅於此云爾\\ | 多寡自有家弟所記付干卷末今不復贅於此云爾\\ | ||
\_\_上之四十六年庚寅孟春後裔孫潤九敬序 | \_\_上之四十六年庚寅孟春後裔孫潤九敬序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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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typo ff:' | + | <typo ff:' |
- | \_경인대동보서\\ | + | \_**경인대동보서**\\ |
- | \_우리 平海黃氏는 建武年代로부터 비롯하여 現在에 이르기까지 一千七百四 | + | \_우리 |
- | 十餘年의 悠久한 歷史를 지니고 있다. 始祖께서 漢나라에서 배를 타시고 우 | + | 송원(松原)을 조성(造成)하시고 계셨다는 말은 오랜 옛날부터 |
- | 리나라 東海岸의 平海越松浦에 上陸하셨다는 말과 黃將軍이라는 어른께서 그곳에 | + | 어른들이 대대(代代)로 연면(聯綿)히 이어 끓기지 않았지만 유감(遺感)스럽게도 그간의 문적(文籍)이 |
- | 松原을 造成하시고 계셨다는 말은 오랜 옛날부터 傳해 내려오는 이야기이니 더 | + | 없어지고 또 보첩(譜牒)마저 소실(燒失)되어 지금(至今) 이를 소상하게 고증(考證)치는 못하나 다만 각자(各者)가 |
- | 말할 것이 없거니와 우리의 祖上들은 저멀리 新羅時代로부터 高麗時代에 이르 | + | 흩어져 산 그곳을 관향(貫鄕)으로 삼았던 것이다.\\ |
- | 기까지 나라에 높은 벼슬과 貴한 所任을 맡으신 어른과 學問과 名望이 높으신 | + | \_기성(箕城)에 본관(本貫)을 둔 자(者)로 파계(派系)를 이은 |
- | 어른들이 代代로 聯綿히 이어 끓기지 않었지만 遺感스럽게도 그 간의 文籍이 | + | 선생(先生)께서 |
- | 없어지고 또 譜牒마저 燒失되어 至今 이를 소상하게 考證치는 못하나 다만 各者가 | + | 수집(蒐集)하여 |
- | 흩어져 산 그곳을 貫鄕으로 삼았던 것이다. | + | 일가사람 |
- | 箕城에 本貫을 둔 者로 派系를 이은 根源을 찾을 수 있는 분은 오직 우리 金 | + | 인쇄(印刷)하여 가지고 |
- | 吾公으로 中祖를 삼으셨는데 李朝中葉에 와서 나의 先祖이신 錦溪先生께서 처 | + | 그 성의(誠意)와 노고(勞苦)는 참으로 대단했으나 그 기록(記錄)한 내용(內容)을 보니 |
- | 음으로 널리 譜牒을 蒐集하여 草譜를 만들었고 그 뒤를 이어 海月先生과 南塘 | + | 그릇된 |
- | 先生께서 修譜를 내셨던 것이다. 근자에 와서는 또 나의 從曾祖處正어른의 收 | + | 것이 적지 않기에 이것을 바로 잡기 위한 |
- | 錄과 三從叔尚鍾 어른이 手寫한 기록은 勿論이고 史實을 證明할만한 證據를 널리 | + | 걸렸고 |
- | 蒐集하여 完全한 譜冊을 이룩했으나 그를 刊行치 못하고 있던 中 長湍에 사는 | + | 태산준령(泰山峻嶺)을 넘어 |
- | 일가사람 燮이라는 분과 黃氏의 外孫이 되는 金汝綱이 合議하여 襄武公派譜一卷을 | + | 각(各) 유사(有司)를 정(定)하여 |
- | 印刷하여 가지고 千里를 멀다 않고 이 사람을 찾아와 그 譜冊을 提示했었다. | + | 그후(後) 6년(六年)이 지난 |
- | 그 誠意와 | + | 경인년(庚寅年) 맹춘(孟春)에 보책(譜冊)을 인쇄(印刷)에 붙이니 비로소 보사(譜事)가 이루어진 것이다. 참으로 |
- | 것이 적지 않기에 이것을 바로 잡기 위한 考證資料를 蒐集하느라고 二년이나 | + | 종중(宗中)의 경사(慶事)이며 다행(多幸)이 아닐 수 없다.\\ |
- | 걸렸고 譜所를 豊基의 錦陽으로 옮긴 다음해 가을에 燮이 喪服을 입은 채로 | + | |
- | 山峻嶺을 넘어 豊基로 찾아와서 일가 되는 鎰에게 그 譜事를 맡겨 主幹케 하고 | + | |
- | 各有司를 定하여 各地方各派系의 收單을 모아드리게 하였다. 그後 六年이 지난 | + | |
- | 庚寅年孟春에 譜冊을 印刷에 붙이니 비로소 譜事가 이루어진 것이다. 참으로 | + | \_석일(昔日)에 해월(海月) 선생(先生)이 초보(草譜)를 만드실 때 평리공(評理公)이 금오공(金吾公)의 후손(後孫)이 되는 줄을 미처 |
- | 宗中의 慶事이며 多幸이 아닐 수 없다. | + | 알지 못하고 그 서문(序文)에 ' |
- | 昔日에 海月先生이 草譜를 만드실때 評理公이 金吾公의 後孫이 되는 줄을 미처 | + | 자손(子孫)인지 자세히 알 수 없음을 |
- | 알지 못하고 그 序文에 徒發未詳一祖之歎이라고 하여 누가 과언한 할아버지의 | + | 이 또한 |
- | 子孫인지 자세히 알 수 없음을 歎息한것이나 지난번 長湍에서 譜冊이 新成되 | + | 위차(位次)와 세계(世系)에 의심(疑心)을 품고 말해왔었는데 이제야 서로 |
- | 었으되 이 또한 大匡公의 倫序를 不察하여 당시 博識하고 뜻있는 선비들이 그 | + | 밝혀졌으니 즉 평리공(評理公)이 금오공(金吾公)의 후(後)가 되고 |
- | 位次와 世系에 疑心을 품고 말해왔었는데 이제야 서로 參考하고 究明하여 分明히 | + | 없게 되었다. 이야말로 |
- | 밝혀졌으니 즉 評理公이 金吾公의 後가 되고 大匡公이 評理公의 弟가 되는 것 | + | |
- | 이다. 이로서 三派序次와 昭穆行列의 秩序가 分明해졌으니 後世子孫들의 유감이 | + | |
- | 없게 되었다. 이야말로 宗中의 多幸이 아닐 수 없다. | + | |
- | 其他附錄에 있는 諸派는 帳籍에 根據가 없는 것은 아니지만 旣往의 舊譜에 빠전 | + | |
- | 것을 구태어 今番에 編入할 수 없기로 이는 後日을 기다릴 수 밖에 없다. | + | |
- | 譜事가 다 이루어짐에 諸宗들이 潤九가 錦溪公의 宗孫이며 또 譜事에 參與하여 | + | |
- | 始終을 들은바 있으리라 하여 몇줄의 序文을 쓰라하니 宗事에 關한 일임에 敢히 | + | |
- | 不肖한 핑계로 辭退할 수 없어 이 글을 쓰는 것이다. 鳴呼라 우리 黃氏의 由緒가 | + | |
- | 오랜 歷史를 가진 宗族으로서 譜冊중에 실려 있는 先祖들 중에는 많은 분들이 | + | |
- | 勳業과 功德이 뛰어나 世人의 稱頌이 자자하니 宗族後孫들은 이를 본떠 딸아야 | + | |
- | 할 것이다. 凡我諸宗과 後嗣들은 譜牒을 봄에 있어서 마땅히 서로 勉勵하여 | + | \_기타(其他) 부록(附錄)에 있는 제파(諸派)는 장적(帳籍)에 근거(根據)가 없는 것은 아니지만 기왕(旣往)의 구보(舊譜)에 빠진 |
- | 祖上의 遺德을 욕되게 하지 말것이며 또 이렇게 하는 것이 譜牒을 完成한 同宗들의 | + | 것을 구태여 금번(今番)에 편입(編入)할 수 없기로 이는 후일(後日)을 기다릴 수 밖에 없다.\\ |
- | 힘쓴 功德에 보답하는 길 일것이니 각자 노력하기 바란다. 그리고 譜事進行과 | + | |
- | 經費의 多寡등에 대하여는 나의 아우가 기록한 바를 卷末에 첨부하였으니 다시 | + | \_보사(譜事)가 다 이루어짐에 제종(諸宗)들이 윤구(潤九)가 금계공(錦溪公)의 종손(宗孫)이며 또 보사(譜事)에 참여(參與)하여 |
- | 附言치 않겠다.\\ | + | 시종(始終)을 들은 바 있으리라 하여 몇 줄의 서문(序文)을 쓰라하니 종사(宗事)에 관(關)한 일임에 감(敢)히 |
- | \_\_上之(英祖)四十六年庚寅孟春後裔孫潤九敬序 | + | 불초(不肖)한 핑계로 사퇴(辭退)할 수 없어 이 글을 쓰는 |
+ | 오랜 역사(歷史)를 가진 종족(宗族)으로서 보책(譜冊) 중에 실려 있는 선조(先祖)들 중에는 많은 분들이 | ||
+ | 훈업(勳業)과 공덕(功德)이 뛰어나 세인(世人)의 칭송(稱頌)이 자자하니 종족(宗族) 후손(後孫)들은 이를 본떠 따라야 | ||
+ | 할 것이다. \\ | ||
+ | |||
+ | \_범아(凡我) 제종(諸宗)과 후사(後嗣)들은 | ||
+ | 조상(祖上)의 유덕(遺德)을 욕되게 하지 말 것이며 또 이렇게 하는 것이 | ||
+ | 힘쓴 | ||
+ | 경비(經費)의 다과(多寡) 등에 대하여는 나의 아우가 기록한 바를 | ||
+ | 부언(附言)치 않겠다.\\ | ||
+ | \_\_상지(上之)(: 영조(英祖)) 46년(四十六年) 경인(庚寅) 맹춘(孟春) 후예손(後裔孫) 윤구(潤九) 경서(敬序)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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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002.1748057501.txt.gz · 마지막으로 수정됨: 2025/05/24 12:31 저자 ssio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