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용자 도구

사이트 도구


b-019

차이

문서의 선택한 두 판 사이의 차이를 보여줍니다.

차이 보기로 링크

양쪽 이전 판이전 판
다음 판
이전 판
b-019 [2025/05/25 20:39] ssio2b-019 [2025/06/01 23:31] (현재) ssio2
줄 1: 줄 1:
 ===기해평리공파보서(己亥平理公派譜序) (1959년) - 재우(載宇)=== ===기해평리공파보서(己亥平理公派譜序) (1959년) - 재우(載宇)===
 +<WRAP 37em justify>
 +<typo ff:'한양해서'; fs:1.2em; lh:1.5em>
 +\_**기해평리공파보서(己亥平理公派譜序)**\\
 +\_우리나라는 기자(箕子) 성군(聖君)께서 세운 동방예의지국(東方禮義之國)이라. 그래서 옛날부터 백성(百姓)을 
 +가르치는 방법(方法)이 조선(祖先)을 섬기고 그 은혜(恩惠)에 보답(報答)하는 것보다 더 큰 것이 없다 하였다.
 +그리고 겨레와 친합(親合)하는 것은 곧 선대(先代)를 기쁘게 하는 것이므로 이것을 만세계(萬世界)
 +인간(人間)의 기강(紀綱)으로 세우고 있다.\\
  
-우리나라는 箕子聖君께서 세운 東方禮義之國이라 그래서 옛날부터 百姓을 가 +\_대저 사람이 누구나 부조자손(父祖子孫) 관계(關係)가 없는 사람은 없는 것이다. 처음으로 거슬러 
-르치는 方法이 祖先을 섬기고 그 恩惠에 報答하는 것보다 더 큰것이 없다하였다. +올라갈 때 물도 한 가지로 한 근원(根源)에서 나오는 것이오아래로 훑어 볼 때 한 뿌리의 
-그리고 겨례와 親合하는 것은 곧 先代를 기쁘게 하는 것이므로 이것을 萬世界 +나무도 여러 갈래의 가지로 각각(各各는 것과 같이사람도 오늘날 한 조상(祖上)의 
-人間의 紀綱으로 세우고 있다. +자손(子孫)으로 수백만(數百萬)의 겨로 나뉘어진 것이다. 이런 고로 옛날부터 사람들이 종족(宗族)을 
-대저 사람이 누구나 父祖子孫關係가 없는 사람은 없는 것이다. 처음으로 거슬러 +중()하게 여겨 위씨(韋氏) 화수회(花樹會)와 이천(伊川) 월일지규(月一之規)로써 이를 좋아하였느니라.  
-올라갈때 물도 한가지로 한 根源에서 나오는 것이오 아래로 훌터볼때 한뿌리의 +이에 족보(族譜)로 
-나무도 여러갈래의 가지로 各各 나누이는 것과 같이 사람도 오늘날한 祖上의 +조상(祖上)을 밝히고 또 그 종족(宗族)을 연결시켜 왔느니라.\\
-子孫으로 數百萬의 겨로 나뉘어진 것이다. 이런고로 옛날부터 사람들이 宗族을 +
-重하게 여겨 韋氏花樹會와 伊川月一之規로써 이를 좋아하였느니라 이에 族譜로 +
-祖上을 밝히고 또 그 宗族을 연결시켜왔느니라。 +
-우리 黃氏가 이나라에 두루 퍼져 있으나 오직 學士公이 鼻祖가 되는 것마는 모두 +
-잘알고 있는 事實이다그리고 年代가 멀다하나 지금 여기 世系를 考證한다면 +
-平海長水昌原으로 貫鄕을 달리쓰되 그 始祖는 다같다. 平海를 本貫으로 하는 +
-우리들은 金吾公으로 中祖를 삼고 三兄弟분이 나누어져 三派가 되고 所謂大同 +
-이라는 것은 이 三派의 合同을 말하는데 不外한 것이다. +
-甲戌平海大同譜以來 이미 二十六年이 되었다. 그동안 宗中에 德望있는 어른들이 +
-차례로 돌아가시고 只今의 世態는 날로 갈수록 퇴폐하여 祖先의 뜻을 이어 修譜할 +
- +
-길이 막연해 보이므로 지난 丁酉年十月中丁에 月松先壇省掃하는 날 各處宗人들 +
-이 齋室에 모여 奠祀를 올린 後에 修譜할 것을 議論하여 보았으나 意見이 區區 +
-하여 다음 宗會로 미루고 말었다. 그 後다음해 三月에 다시 總會를 열러 三派 +
-大同譜事務條例를 決議하고 成文布告한뒤에 本人과 世元斗星두 族人과 함께 豊 +
-基와 清安 두 宗宅을 訪問하여 決議된 經緯의 전말을 大綱말하고 酬議한 結果 +
-世態의 연고와 經濟의 어려움으로 莫重大事를 치루기 至難하다는 뜻을 앞세워 +
-환영치 않음으로 不得己決裂되고 派譜를 決行키로 마음을 굽힌 後族宗載元과 +
-함께 赤手空拳으로 南部地方을 다녀 七個月만에 收單을 마치고 돌아와 中抄한 +
-것을 正書를 해서 다음해 三月에 完成하였다. 그러나 나의 마음 가운데 느끼 +
-는 바는 이 修譜하는 大義가 先代를 追慕하고 宗族을 護衛하며 同宗間敦睦을 +
-爲主하는 先代로부터 이어오는 뜻을 後世들이 繼承하는 當然之事業인데 여기에 +
-異議를 갖는 宗人들의 心情을 理解할 수 없다. 모름지기 그들의 再考의 餘裕 +
-를 갖는 것을 希求한다. +
-대저 士族之家에 譜牒이 있어야 된다는 것은 한집안에 아름다운 일에만 끝이는 +
-것이 아니라 世道人心에 미치는 영향 또한 크다는 点에도 留意하여야 한다. +
-이러한 說은 程張夫子게서 이미 說罷하여 널리 傳해온 事實이니 다시 附言치 +
-않기로 하노라。 +
- +
-가만히 生覺하니 族祖極英氏와 族弟載元君이 함께 침식을 잊고 凡百事를 담당 +
-하여 先系를 밝히고 世德을 지었으나 大同修譜를 이루지 못하고 派譜에 끝혔음 +
-을 심히 유감으로 생각한다. 나는 元來不足한 사람으로 아는 바 없이 어찌 감 +
-히 無辭로써 先父老의 記述 밑에 序文을 둘 수 있으리요마는 다만 느끼는 바에 +
-지나지 않은 것만을 몇마디 말해둔다. +
-己亥四月上浣裔孫載宇謹序 +
  
 +\_우리 황씨(黃氏)가 이 나라에 두루 퍼져 있으나 오직 학사공(學士公)이 비조(鼻祖)가 되는 것만은 모두
 +잘 알고 있는 사실(事實)이다. 그리고 연대(年代)가 멀다하나 지금 여기 세계(世系)를 고증(考證)한다면
 +평해(平海) 장수(長水) 창원(昌原)으로 관향(貫鄕)을 달리 쓰되 그 시조(始祖)는 다 같다. 
 +평해(平海)를 본관(本貫)으로 하는
 +우리들은 금오공(金吾公)으로 중조(中祖)를 삼고 3형제(三兄弟) 분이 나누어져 3파(三派)가 되고 소위(所謂)
 +대동(大同)이라는 것은 이 3파(三派)의 합동(合同)을 말하는데 불외(不外)한 것이다.\\
  
 +\_갑술(甲戌) 평해대동보(平海大同譜) 이래(以來) 이미 26년(二十六年)이 되었다. 그동안 종중(宗中)에 덕망(德望)있는 
 +어른들이 차례로 돌아가시고 지금(只今)의 세태(世態)는 날로 갈수록 퇴폐하여 조선(祖先)의 뜻을 이어 수보(修譜)할
  
 +길이 막연해 보이므로 지난 정유년(丁酉年) 10월(十月) 중정(中丁)에 월송(月松) 선단(先壇) 성소(省掃)하는 날 각처(各處) 종인(宗人)들이 재실(齋室)에 모여 전사(奠祀)를 올린 후(後)에 수보(修譜)할 것을 의논(議論)하여 보았으나 의견(意見)이 구구(區區)하여 다음 종회(宗會)로 미루고 말았다. 그 후(後) 다음해 3월(三月)에 다시 총회(總會)를 열어 3파(三派)
 +대동보(大同譜) 사무조례(事務條例)를 결의(決議)하고 성문(成文) 포고(布告)한 뒤에 본인(本人)과 세원(世元) 두성(斗星) 두 족인(族人)과 함께 풍기(豊基)와 청안(淸安) 두 종택(宗宅)을 방문(訪問)하여 결의(決議)된 경위(經緯)의 전말을 대강(大綱) 말하고 수의(酬議)한 결과(結果)
 +세태(世態)의 연고와 경제(經濟)의 어려움으로 막중대사(莫重大事)를 치루기 지난(至難)하다는 뜻을 앞세워
 +환영치 않음으로 부득이(不得已) 결렬(決裂)되고 파보(派譜)를 결행(決行)키로 마음을 굳힌 후(後) 족종(族宗) 재원(載元)과
 +함께 적수공권(赤手空拳)으로 남부지방(南部地方)을 다녀 7개월(七個月)만에 수단(收單)을 마치고 돌아와 중초(中抄)한
 +것을 정서(正書)를 해서 다음해 3월(三月)에 완성(完成)하였다. 그러나 나의 마음 가운데 느끼는 바는 이 수보(修譜)하는 대의(大義)가 선대(先代)를 추모(追慕)하고 종족(宗族)을 호위(護衛)하며 동종간(同宗間) 돈목(敦睦)을
 +위주(爲主)하는 선대(先代)로부터 이어오는 뜻을 후세(後世)들이 계승(繼承)하는 당연지사업(當然之事業)인데 여기에
 +이의(異議)를 갖는 종인(宗人)들의 심정(心情)을 이해(理解)할 수 없다. 모름지기 그들의 재고(再考)의 여유(餘裕)를 갖는 것을 희구(希求)한다.\\
  
 +\_대저 사족지가(士族之家)에 보첩(譜牒)이 있어야 된다는 것은 한 집안에 아름다운 일에만 그치는
 +것이 아니라 세도인심(世道人心)에 미치는 영향 또한 크다는 점(点)에도 유의(留意)하여야 한다.
 +이러한 설(說)은 정장부자(程張夫子)((정ㆍ장(程張): 송나라 때의 학자인 정호(程顥)와 장재(張載).))께서 이미 설파(說罷)하여 널리 전(傳)해온 사실(事實)이니 다시 부언(附言)치 않기로 하노라.\\
  
 +\_가만히 생각(生覺)하니 족조(族祖) 극영(極英)씨(氏)와 족제(族弟) 재원(載元)군(君)이 함께 침식을 잊고 범백사(凡百事)를 담당하여 선계9先系)를 밝히고 세덕(世德)을 지었으나 대동수보(大同修譜)를 이루지 못하고 파보(派譜)에 그쳤음을 심히 유감으로 생각한다. 나는 원래(元來) 부족(不足)한 사람으로 아는 바 없이 어찌 감히 무사(無辭)로써 선부로(先父老)의 기술(記述) 밑에 서문(序文)을 둘 수 있으리오마는 다만 느끼는 바에
 +지나지 않은 것 만을 몇 마디 말해둔다.\\
 +\_\_기해(己亥) 4월(四月) 상완(上浣) 예손(裔孫) 재우(載宇) 근서(謹序)
 +</typo>
 +</WRAP>
b-019.1748173164.txt.gz · 마지막으로 수정됨: 2025/05/25 20:39 저자 ssio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