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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051 [2025/05/26 20:04] ssio2b-051 [2025/05/30 09:23] (현재) ssio2
줄 1: 줄 1:
-大海先生行狀略+===대해선생행장략(大海先生行狀略)=== 
 +<WRAP 37em justify><hidden \_한문 원문 보기> 
 +<typo ff:'한양해서'; fs:1.2em> 
 +\_大海先生行狀略\\
 先生諱應淸字淸之自號大海高麗僉議評理瑞之後曾祖諱玉崇漢城判官 先生諱應淸字淸之自號大海高麗僉議評理瑞之後曾祖諱玉崇漢城判官
-祖諱輔坤生員考諱通訓星州牧使三陟金氏諱鑌之女嘉靖甲申生先 +祖諱輔坤生員考諱通訓星州牧使三陟金氏諱鑌之女嘉靖甲申生先 
-生幼有異質至行餘力學文中壬子司馬庚申赴別入試圍見策題語不善+生幼有異質至行餘力學文中壬子司馬庚申赴別入試圍見策題語不善
 不對而出自是杜門高蹈力學勵行德義著聞甲申\_朝廷薦用遺逸徵先生 不對而出自是杜門高蹈力學勵行德義著聞甲申\_朝廷薦用遺逸徵先生
 爲禮賓參奉不赴又除延恩殿參奉始赴命恣賞朴淵而歸甲午\_除掌樂院 爲禮賓參奉不赴又除延恩殿參奉始赴命恣賞朴淵而歸甲午\_除掌樂院
-別坐時\_大駕還自義州先生自以分義不安\_詣\_闕疏陳四弊語甚切+別坐時\_大駕還自義州先生自以分義不安\_詣\_闕疏陳四弊語甚切
 中上嘉納因命擢用遂除眞寶縣監招集散亡撫麾瘡殘邑遂以完未幾辭歸 中上嘉納因命擢用遂除眞寶縣監招集散亡撫麾瘡殘邑遂以完未幾辭歸
 乙巳考終干正寢葬虎田壬坐原鳴呼先生誠孝出天定省之禮甘旨之奉始 乙巳考終干正寢葬虎田壬坐原鳴呼先生誠孝出天定省之禮甘旨之奉始
 終不懈丁內艱血泣啜粥廬干墓下日一至家省嚴府不入內庭逮丁外艱哀 終不懈丁內艱血泣啜粥廬干墓下日一至家省嚴府不入內庭逮丁外艱哀
-慕如前喪至誠動人地主用一言以聞干方伯累次馳\_萬曆戊寅\_命 +慕如前喪至誠動人地主用一言以聞干方伯累次馳\_萬曆戊寅\_命 
-旌閭先生天分甚高平居律己動以古人爲法坐一室左圖右書俯讀仰思 +旌閭先生天分甚高平居律己動以古人爲法坐一室左圖右書俯讀仰思 
-殆忘寢食有詩曰藜羹粟飯養殘軀晨起衣冠讀典謨莫道先生無用處一 +殆忘寢食有詩曰藜羹粟飯養殘軀晨起衣冠讀典謨莫道先生無用處一 
-身都是一唐虞其自得之樂可想見年尊德邵遠近學徒坌集而訓誨不倦+身都是一唐虞其自得之樂可想見年尊德邵遠近學徒坌集而訓誨不倦
  
 至於冠婚喪祭之禮講解問難如月川趙先生穆大菴朴先生惺書疏往復辨 至於冠婚喪祭之禮講解問難如月川趙先生穆大菴朴先生惺書疏往復辨
-明歸一行干家而邑從而化遂令海曲變爲禮義之其有功於斯文甚大 +明歸一行干家而邑從而化遂令海曲變爲禮義之其有功於斯文甚大 
-鵝溪李相國謫居平海慕悅德行問平日用功而獨得於心者先生曰吾非+鵝溪李相國謫居平海慕悅德行問平日用功而獨得於心者先生曰吾非
 從事於學但吾粗得動靜得失譬如掃塵隨掃而塵益生不如不掃而塵自熄 從事於學但吾粗得動靜得失譬如掃塵隨掃而塵益生不如不掃而塵自熄
 譬如治井撓之則水益濁不如不撓而水自淸何莫非靜之力有以制動也鵝 譬如治井撓之則水益濁不如不撓而水自淸何莫非靜之力有以制動也鵝
-溪歎服著正明村記以自警噫先生其有得於主靜者深矣先生歿後人追+溪歎服著正明村記以自警噫先生其有得於主靜者深矣先生歿後人追
 慕立祠以俎豆之云云\\ 慕立祠以俎豆之云云\\
-鶴沙金應祖撰+\_\_鶴沙金應祖撰 
 +</typo> 
 +</hidden> 
 +\\ 
 +<typo ff:'바탕'; fs:1em; lh:1.5em> 
 +\_\_대해선생 행장략\\ 
 +\_선생(先生)의 휘(諱)는 응청(應淸)이요 자(字)는 청지(淸之)며 자호(自號)를 대해(大海)라 하다. 고려(高麗) 첨의평리(僉議評理) 휘(諱) 서(瑞)의 후손(後孫)이다. 증조(曾祖)의 휘(諱) 옥숭(玉崇)은 한성판관(漢城判官)이요, 조(祖)의 휘(諱) 보곤(輔坤)은 생원(生員)이요, 고(考)의 휘(諱) 우(瑀)는 통훈대부(通訓大夫) 성주목사(星州牧使)이며, 비(妣)는 <fc #ff0000>삼척김씨(三陟金氏)</fc> 휘(諱) 빈(鑌)<fc #87ceeb>(족보: 숙부인 진주김씨)</fc>의 여(女)이다. 가정(嘉靖) 갑신년(甲申年)에 선생(先生)이 나셨으며 
 +어려서부터 특이(特異)한 품질(禀質)이 있어서 학(學)을 좋아하고 힘쓰더니 임자년(壬子年)에 진사시(進士試)에 
 +합격(合格)되었다가 경신년(庚申年)에 별과(別科)에 입시(入試)하여 책문(策文)의 제목(題目)이 착하지 못한 말을 보고
  
-\_\_大海先生行狀 +대답(對答)지 않고 퇴장(退場)하였다 로부터 문(門)을 닫고 학업(學業)에 힘쓰며 덕행(德行)을 닦으니 
-先生의 諱는 應淸이요 字는 淸之며 自號를 大海라하다 高麗僉議評理諱瑞의 後 +원근(遠近) 사람들이 모두 그 고상(高尙)한 인격(人格)에 칭송(稱頌)이 자자(藉藉)하였다 한다. 이로 갑신년(甲申年) 
-孫이다 曾祖의 諱玉崇은 漢城判官요 祖의 諱輔坤은 生員이요 考의 諱瑀는 通 +조정(朝廷)의 천용(薦用)으로 예빈(禮賓) 참봉(參奉)을 삼았으나 이에 부임(赴任)하지 않았으며 다시 연은전(延恩殿) 참봉(參奉)을 
-訓大夫星州牧使며 妣는 陟金氏諱濱의 女이다 嘉靖甲申年에 先生이 으며 +제수(除授)하니 거듭 사퇴(辭退)할 수 없어 부(不得已) 부임(赴任)하였다. 그러므로 위에는 특명(特命)하여  
-려서터 特異한 禀質이 있어서 學을 좋아하고 힘쓰더니 壬子年에 進士試에 +공(公)으로 하여금 박연폭포(朴淵瀑沛) 개성(開城) 일대(一帶)의 관광(觀光)을 임의(任意)로 감상(鑑賞)케 는 특전(特典)을 내렸다.  
-合格되가 庚申年에 別科에 入試하여 策文의 題目이 하지 한 을 +그리고 얼마 후 갑오년(甲午)에 장악원(掌樂院) 별좌(別坐)를 제수(除授)하더니 때마침 임금의 대(大駕)가 의주(義州)로부터  
 +돌아오니 선생(先生)은 스스로 신분(身分)에 맞지 않음을 느껴 억지로 허리를 구부려 
 +궐하(闕下)에 나아가서 사폐어(四弊語)를 글로서 올린 것이 심(甚)히 절중(切中)하여 임금이 이를 즐겁게 
 +받아들이고 드디어 진보현감(眞寶縣監)으로 뽑아 쓰는지라 곧 부임(赴任)여 전란(戰亂)으로 흩어고 
 +도망한 백성(百姓)들을 모아 잘 무마(撫摩)하여 재건(再建)하니 을이 다시 완전(完全)히 회복(回復)되었더라. 
 +그 후(後) 사직(辭職)하고 돌아와 정침(正寢)에서 고종(考終)하니 호전(虎田) 임좌(壬坐)에 장사(葬事)하였다.\\
  
-對答하지 않고 退場하였다 한다 이로부터 門을 닫고 學業에 힘쓰며 德行을 닦으니 +\_선생(先生)의 인격(人格)은 충효(忠孝)가 출천(出天)하여 정성지례(定省之禮)와 지감봉양(旨甘奉養)을 처음부터 끝까지 게으르지 
-遠近사람들이 모두 그 高尙한 人格에 稱頌이 藉藉하였다 한다 이로 甲申年에 +않고 평생(平生)을 한결같이 섬기매 원근(遠近사람들이 평해(平海) 황문(黃門)에 문증(文曾)이 새로 탄생(誕生)하였다고 칭송(稱頌)이 자자(藉藉)하였다. 내간상(內艱喪)을 당()하니 호천통곡(呼天痛哭)하는 중(피를 토()하였으며 
-朝廷의 薦用으로 禮賓參奉을 삼았으나 이에 赴任하지 않았으며 다시 延恩殿參奉을 +묘하(墓下)에서 2년(二年동안을 여묘(蘆墓)살이를 하는데 끝 마치는 날까지 죽()으로 생활(生活)하였다. 
-除授하니 거듭 辞退할 수 없어 不得已赴任하였다 그러므로 위에는 特命하여 公 +그러나 부친(父親)의 침소(寢所)에는 하루도 빠짐없이 매일(每日새벽 일찍이 문안(問安)드리고 내정(內庭)에 
-으로 하여금 朴淵瀑沛開城一帶의 觀光을 任意로 鑑賞케 하는 特典을 나렸다 그 +들르는 일이 없이 여막(蘆幕)으로 도로 올라갔다.\\
-리고 얼마후 甲午年에 掌樂院別坐를 除授하였드니 때마침 임금의 大駕가 義州 +
-로부터 도라오니 先生은 스스로 身分에 맞지 않음을 느껴 억지로 허리를 구부려 +
-関下에 나아가서 四弊語를 글로서 올린 것이 甚히 切中하여 임금이 이를 즐겁게 +
-받어드리고 드디어 眞寶縣監으로 뽑아쓰는지라 곡 赴任하여 戰亂으로 흩어지고 +
-도망한 百姓들을 모아 잘 撫摩하여 再建하니 고을이 다시 完全히 回復되였더라 +
-그 後辭職하고 도라와 正寢에서 考終하니 虎田壬坐에 葬事하였다. +
-先生의 人格은 忠孝가 出天하여 定省之禮와 旨甘奉養을 처음부터 끝까지 게으르지 +
-않고 平生을 한결같이 섬기매 遠近 사람들이 平海黃門에 文曾이 새로 誕生하 +
-였다고 稱頌이 藉藉하였다 內艱喪을 當하니 呼天痛哭하는 中피를 吐하였으며 +
-墓下에서 二年동안을 蘆墓사리를 하는데 끝마치는 날까지 粥으로 生活하였다 +
-그러나 父親의 寢所에는 하루도 빠짐없이 每日 새벽 일찍이 問安드리고 內庭에 +
-들르는 일이 없이 蘆幕으로 도로 올라갔다.+
  
-그後 다시 外艱喪을 當하니 그 哀慕함이 前喪과 조금도 다름이 없어 그 出天의 +\_후(다시 외간상(外艱喪)을 당()하니 그 애모(哀慕)함이 전상(前喪)과 조금도 다름이 없어 그 출천(出天)의 
-至誠이 官民을 感動시켜 드디어 官에서 나라에 그 孝誠을 狀啓하여 萬歷戊寅年 +지성(至誠)이 관민(官民)을 감동(感動)시켜 드디어 관()에서 나라에 그 효성(孝誠)을 장계(狀啓)하여 만력(萬歷) 무인년(戊寅年)에 
-朝廷에서 先生을 孝子로 旌門을 세워 表彰하였다. +조정(朝廷)에서 선생(先生)을 효자(孝子)로 정문(旌門)을 세워 표창(表彰)하였다.\\
-先生은 天禀이 慎重하여 그 言語와 動作이 사람으로 하여금 모르는 사이에 머리가 +
-수그러지도록 하는 千萬斤의 무게가 있었다 平素의 起居는 옛날 聖賢들의 참된 +
-人生의 法度를 따서 澄潔한 一室에 端正히 앉아 항시 經書를 탐讀하며 그 實踐에 +
-힘썼다 室內 四壁上에는 聖句等을 써서부쳐 左右銘으로 삼았다. +
-또 詩짓기를 좋아하였는데 그 中의 한 句節을 紹介하면 黎羹粟飯養殘軀 晨起 +
-衣冠讀典謨 莫道先生無用處一身都是一唐虞여갱속반양잔구 신기의관독전모 +
-막도선생무용처 일신도시일당우이글의 뜻은 명아주극조밥에 늙은몸이 修養 +
-되니 새벽녁에 일어나서 衣冠을 정제하니 나홀로 옛사람의 모범이 되었은즉 선 +
-생은 나더러 쓸모없다 말을 마소 내한몸은 도무지 唐虞와도 같아서?그 自得의 +
-즐거움은 대개 이것으로서 可히 生覺해볼일이다 나이많고 德이 높음에 遠近學 +
-徒들이 많이 모여들어도 訓誨에 게으르지 않으며 冠婚喪祭四禮에도 밝아 깨닫기 +
-어려운 대문을 잘 講論하며 理解케 하였으며 月川趙先生穆과 大庵朴先生惺과 +
-같은 名士들과도 書疏로 往復하여 서로 닦고 행함을 같이하니 鄕邑이 모두 따라 +
-變化함에 사람들이 平海고을은 禮儀의 邑이라 일커렀더라+
  
-先生이 斯文의 功이 이와같이 크니 當時平海에 귀양살이던 鵝溪李相國이  +\_선생(先生)은 천품(天禀)이 신중(愼重)여 그 언어(言語)와 동작(動作)이 사람으로 여금 모르는 사이에 머리가 
-德行을 크게 慕悅하고 平常時公의 德行에 關한 記錄을 읽고 얻음이 컸다니 +수그러도록 하는 근(千萬斤)의 무게가 있었. 평소(平素)의 기거(起居)는 옛날 성현(聖賢)들의 참된 
-先生이 이기를 나는 에 從事한바 아니나 다만 내가 動靜得失을 대강 얻었 +인생(人生)의 법도(法度)를 서 징결(澄潔)한 1실(室)에 단정(端正)히 앉아 항시 경서(經書)를 탐독(耽讀)하며 그 실천(實踐)에 
-음이라하고 비유하기를 비로문를 撓亂게 쓸어 부치면 먼지가 쓴것보다 더 +. 실내(室內) 4벽(四壁) 상(上)는 성구(聖句) 등(等)을 써서 붙여 명(左右銘)으로 삼았다.\\
-일어나법이니 이와같이 부산하게 쓸어서 먼지를 일으키느니 보아 오히려 쓸지 +
-않아 먼지가 일어나지 않는 것같지 못한 것이 아니겠는가? +
-또 비유키를 우물을 치는데 요란하게 물을 흔들어 도리어 무물이 더 濁하여지는이 +
-보다는 우물을 만히 두어 스스로 맑아지는 것이 오히려 치는 것보다 났지 않 +
-가? +
-이와같이 靜은 動보다 힘이 크다는데 있음을 말하였다 이에 鵝溪가 嘆服하고 +
-正明村記를 著述하여 스스로 깨우침으로 했다 先生은 靜으로서 神人合의 神 +
-秘境을 깨달아 人間의 德義의 道를 實踐하는데 새 을 얻었든 것이다 先生의 +
-殁한 뒤에 을 사람들이 先生을 追慕하여 祠堂을 세고 俎豆써 亭祈하였 +
-다한다. +
-鶴沙金應祖撰+
  
 +\_또 시(詩) 짓기를 좋아하였는데 그 중(中)의 한 구절(句節)을 소개(紹介)하면 \\
 +黎羹粟飯養殘軀 (여갱속반양잔구) 명아주국 조밥에 늙은 몸이 수양(修養)되니\\
 +晨起衣冠讀典謨 (신기의관독전모) 새벽녁에 일어나서 의관(衣冠)을 정제하니 나 홀로 옛사람의 모범이 되었은즉\\
 +莫道先生無用處 (막도선생무용처) 선생은 나더러 쓸모없다 말을 마소\\
 +一身都是一唐虞 (일신도시일당우) 내 한 몸은 도무지 당우(唐虞)와도 같으니\\
 +그 자득(自得)의 즐거움은 대개 이것으로서 가(可)히 생각(生覺)해 볼 일이다. 
 +나이 많고 덕(德)이 높음에 원근(遠近) 학도(學徒)들이 많이 모여들어도 훈회(訓誨)에 게으르지 않으며 
 +관혼상제(冠婚喪祭) 4례(四禮)에도 밝아 깨닫기
 +어려운 대문을 잘 강론(講論)하며 이해(理解)케 하였으며 월천(月川) 조선생(趙先生) 목(穆)과 대암(大庵) 박선생(朴先生) 성(惺)과
 +같은 명사(名士)들과도 서소(書疏)로 왕복(往復)하여 서로 닦고 행함을 같이하니 향읍(鄕邑)이 모두 따라
 +변화(變化)함에 사람들이 평해(平海) 고을은 예의(禮儀)의 읍(邑)이라 일컬었더라.\\
 +
 +\_선생(先生)이 사문(斯文)의 공(功)이 이와 같이 크니 당시(當時)평해(平海)에 귀양살이하던 아계(鵝溪) 이상국(李相國)이 그
 +덕행(德行)을 크게 모열(慕悅)하고 평상시(平常時) 공(公)의 덕행(德行)에 관(關)한 기록(記錄)을 읽고 얻음이 컸다하니
 +선생(先生)이 이르기를 나는 학(學)에 종사(從事)한 바 아니나 다만 내가 동정(動靜) 득실(得失)을 대강 얻었음이라 하고 
 +비유하기를 비로 먼지를 요란(撓亂)하게 쓸어 붙이면 먼지가 쓴 것보다 더
 +일어나는 법이니 이와 같이 부산하게 쓸어서 먼지를 일으키느니 보다 오히려 쓸지
 +않아 먼지가 일어나지 않는 것만 같지 못한 것이 아니겠는가?\\
 +
 +\_또 비유하기를 우물을 치는데 요란하게 물을 흔들어 도리어 우물이 더 탁(濁)하여지는 것
 +보다는 우물을 가만히 두어 스스로 맑아지는 것이 오히려 치는 것보다 낳지 않겠는가?\\
 +
 +\_이와같이 정(靜)은 동(動)보다 힘이 크다는데 있음을 말하였다. 이에 아계(鵝溪)가 탄복(嘆服)하고
 +정명촌기(正明村記)를 저술(著述)하여 스스로 깨우침으로 했다. 선생(先生)은 정(靜)으로서 신인합일(神人合一)의 신비경(神
 +秘境)을 깨달아 인간(人間)의 덕의(德義)의 도(道)를 실천(實踐)하는데 새 힘을 얻었던 것이다. 선생(先生)의
 +몰(歿)한 뒤에 고을 사람들이 선생(先生)을 추모(追慕)하여 사당(祠堂)을 세우고 조두(俎豆)로써 향기(享祈)하였다 한다.\\
 +\_\_학사(鶴沙) 김응조(金應祖) 찬(撰)
 +</typo>
 +</WRAP>
b-051.1748257472.txt.gz · 마지막으로 수정됨: 2025/05/26 20:04 저자 ssio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