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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051

대해선생행장략(大海先生行狀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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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大海先生行狀略
先生諱應淸字淸之自號大海高麗僉議評理瑞之後曾祖諱玉崇漢城判官 祖諱輔坤生員考諱瑀通訓星州牧使妣三陟金氏諱鑌之女嘉靖甲申生先 生幼有異質至行餘力學文中壬子司馬庚申赴別擧入試圍見策題語不善 不對而出自是杜門高蹈力學勵行德義著聞甲申 朝廷薦用遺逸徵先生 爲禮賓參奉不赴又除延恩殿參奉始赴命恣賞朴淵而歸甲午 除掌樂院 別坐時 大駕還自義州先生自以分義不安僶 詣 闕疏陳四弊語甚切 中上嘉納因命擢用遂除眞寶縣監招集散亡撫麾瘡殘邑遂以完未幾辭歸 乙巳考終干正寢葬虎田壬坐原鳴呼先生誠孝出天定省之禮甘旨之奉始 終不懈丁內艱血泣啜粥廬干墓下日一至家省嚴府不入內庭逮丁外艱哀 慕如前喪至誠動人地主用一鄕言以聞干方伯累次馳 啓萬曆戊寅 命 旌閭焉先生天分甚高平居律己動以古人爲法坐一室左圖右書俯讀仰思 殆忘寢食甞有詩曰藜羹粟飯養殘軀晨起衣冠讀典謨莫道先生無用處一 身都是一唐虞其自得之樂槩可想見年尊德邵遠近學徒坌集而訓誨不倦 至於冠婚喪祭之禮講解問難如月川趙先生穆大菴朴先生惺書疏往復辨 明歸一行干家而鄕邑從而化遂令海曲變爲禮義之鄕其有功於斯文甚大 鵝溪李相國甞謫居平海慕悅德行問平日用功而獨得於心者先生曰吾非 從事於學但吾粗得動靜得失譬如掃塵隨掃而塵益生不如不掃而塵自熄 譬如治井撓之則水益濁不如不撓而水自淸何莫非靜之力有以制動也鵝 溪歎服著正明村記以自警噫先生其有得於主靜者深矣先生歿後鄕人追 慕立祠以俎豆之云云
  鶴沙金應祖撰


  대해선생 행장략
 선생(先生)의 휘(諱)는 응청(應淸)이요 자(字)는 청지(淸之)며 자호(自號)를 대해(大海)라 하다. 고려(高麗) 첨의평리(僉議評理) 휘(諱) 서(瑞)의 후손(後孫)이다. 증조(曾祖)의 휘(諱) 옥숭(玉崇)은 한성판관(漢城判官)이요, 조(祖)의 휘(諱) 보곤(輔坤)은 생원(生員)이요, 고(考)의 휘(諱) 우(瑀)는 통훈대부(通訓大夫) 성주목사(星州牧使)이며, 비(妣)는 삼척김씨(三陟金氏) 휘(諱) 빈(鑌)(족보: 숙부인 진주김씨)의 여(女)이다. 가정(嘉靖) 갑신년(甲申年)에 선생(先生)이 나셨으며 어려서부터 특이(特異)한 품질(禀質)이 있어서 학(學)을 좋아하고 힘쓰더니 임자년(壬子年)에 진사시(進士試)에 합격(合格)되었다가 경신년(庚申年)에 별과(別科)에 입시(入試)하여 책문(策文)의 제목(題目)이 착하지 못한 말을 보고 대답(對答)하지 않고 퇴장(退場)하였다 한다. 이로부터 문(門)을 닫고 학업(學業)에 힘쓰며 덕행(德行)을 닦으니 원근(遠近) 사람들이 모두 그 고상(高尙)한 인격(人格)에 칭송(稱頌)이 자자(藉藉)하였다 한다. 이로 갑신년(甲申年)에 조정(朝廷)의 천용(薦用)으로 예빈(禮賓) 참봉(參奉)을 삼았으나 이에 부임(赴任)하지 않았으며 다시 연은전(延恩殿) 참봉(參奉)을 제수(除授)하니 거듭 사퇴(辭退)할 수 없어 부득이(不得已) 부임(赴任)하였다. 그러므로 위에는 특명(特命)하여 공(公)으로 하여금 박연폭포(朴淵瀑沛) 개성(開城) 일대(一帶)의 관광(觀光)을 임의(任意)로 감상(鑑賞)케 하는 특전(特典)을 내렸다. 그리고 얼마 후 갑오년(甲午年)에 장악원(掌樂院) 별좌(別坐)를 제수(除授)하였더니 때마침 임금의 대가(大駕)가 의주(義州)로부터 돌아오니 선생(先生)은 스스로 신분(身分)에 맞지 않음을 느껴 억지로 허리를 구부려 궐하(闕下)에 나아가서 사폐어(四弊語)를 글로서 올린 것이 심(甚)히 절중(切中)하여 임금이 이를 즐겁게 받아들이고 드디어 진보현감(眞寶縣監)으로 뽑아 쓰는지라 곧 부임(赴任)하여 전란(戰亂)으로 흩어지고 도망한 백성(百姓)들을 모아 잘 무마(撫摩)하여 재건(再建)하니 고을이 다시 완전(完全)히 회복(回復)되었더라. 그 후(後) 사직(辭職)하고 돌아와 정침(正寢)에서 고종(考終)하니 호전(虎田) 임좌(壬坐)에 장사(葬事)하였다.
 선생(先生)의 인격(人格)은 충효(忠孝)가 출천(出天)하여 정성지례(定省之禮)와 지감봉양(旨甘奉養)을 처음부터 끝까지 게으르지 않고 평생(平生)을 한결같이 섬기매 원근(遠近) 사람들이 평해(平海) 황문(黃門)에 문증(文曾)이 새로 탄생(誕生)하였다고 칭송(稱頌)이 자자(藉藉)하였다. 내간상(內艱喪)을 당(當)하니 호천통곡(呼天痛哭)하는 중(中) 피를 토(吐)하였으며 묘하(墓下)에서 2년(二年) 동안을 여묘(蘆墓)살이를 하는데 끝 마치는 날까지 죽(粥)으로 생활(生活)하였다. 그러나 부친(父親)의 침소(寢所)에는 하루도 빠짐없이 매일(每日) 새벽 일찍이 문안(問安)드리고 내정(內庭)에 들르는 일이 없이 여막(蘆幕)으로 도로 올라갔다.
 그후(後) 다시 외간상(外艱喪)을 당(當)하니 그 애모(哀慕)함이 전상(前喪)과 조금도 다름이 없어 그 출천(出天)의 지성(至誠)이 관민(官民)을 감동(感動)시켜 드디어 관(官)에서 나라에 그 효성(孝誠)을 장계(狀啓)하여 만력(萬歷) 무인년(戊寅年)에 조정(朝廷)에서 선생(先生)을 효자(孝子)로 정문(旌門)을 세워 표창(表彰)하였다.
 선생(先生)은 천품(天禀)이 신중(愼重)하여 그 언어(言語)와 동작(動作)이 사람으로 하여금 모르는 사이에 머리가 수그러지도록 하는 천만근(千萬斤)의 무게가 있었다. 평소(平素)의 기거(起居)는 옛날 성현(聖賢)들의 참된 인생(人生)의 법도(法度)를 따서 징결(澄潔)한 1실(一室)에 단정(端正)히 앉아 항시 경서(經書)를 탐독(耽讀)하며 그 실천(實踐)에 힘썼다. 실내(室內) 4벽(四壁) 상(上)에는 성구(聖句) 등(等)을 써서 붙여 좌우명(左右銘)으로 삼았다.
 또 시(詩) 짓기를 좋아하였는데 그 중(中)의 한 구절(句節)을 소개(紹介)하면
黎羹粟飯養殘軀 (여갱속반양잔구) 명아주국 조밥에 늙은 몸이 수양(修養)되니
晨起衣冠讀典謨 (신기의관독전모) 새벽녁에 일어나서 의관(衣冠)을 정제하니 나 홀로 옛사람의 모범이 되었은즉
莫道先生無用處 (막도선생무용처) 선생은 나더러 쓸모없다 말을 마소
一身都是一唐虞 (일신도시일당우) 내 한 몸은 도무지 당우(唐虞)와도 같으니
그 자득(自得)의 즐거움은 대개 이것으로서 가(可)히 생각(生覺)해 볼 일이다. 나이 많고 덕(德)이 높음에 원근(遠近) 학도(學徒)들이 많이 모여들어도 훈회(訓誨)에 게으르지 않으며 관혼상제(冠婚喪祭) 4례(四禮)에도 밝아 깨닫기 어려운 대문을 잘 강론(講論)하며 이해(理解)케 하였으며 월천(月川) 조선생(趙先生) 목(穆)과 대암(大庵) 박선생(朴先生) 성(惺)과 같은 명사(名士)들과도 서소(書疏)로 왕복(往復)하여 서로 닦고 행함을 같이하니 향읍(鄕邑)이 모두 따라 변화(變化)함에 사람들이 평해(平海) 고을은 예의(禮儀)의 읍(邑)이라 일컬었더라.
 선생(先生)이 사문(斯文)의 공(功)이 이와 같이 크니 당시(當時)평해(平海)에 귀양살이하던 아계(鵝溪) 이상국(李相國)이 그 덕행(德行)을 크게 모열(慕悅)하고 평상시(平常時) 공(公)의 덕행(德行)에 관(關)한 기록(記錄)을 읽고 얻음이 컸다하니 선생(先生)이 이르기를 나는 학(學)에 종사(從事)한 바 아니나 다만 내가 동정(動靜) 득실(得失)을 대강 얻었음이라 하고 비유하기를 비로 먼지를 요란(撓亂)하게 쓸어 붙이면 먼지가 쓴 것보다 더 일어나는 법이니 이와 같이 부산하게 쓸어서 먼지를 일으키느니 보다 오히려 쓸지 않아 먼지가 일어나지 않는 것만 같지 못한 것이 아니겠는가?
 또 비유하기를 우물을 치는데 요란하게 물을 흔들어 도리어 우물이 더 탁(濁)하여지는 것 보다는 우물을 가만히 두어 스스로 맑아지는 것이 오히려 치는 것보다 낳지 않겠는가?
 이와같이 정(靜)은 동(動)보다 힘이 크다는데 있음을 말하였다. 이에 아계(鵝溪)가 탄복(嘆服)하고 정명촌기(正明村記)를 저술(著述)하여 스스로 깨우침으로 했다. 선생(先生)은 정(靜)으로서 신인합일(神人合一)의 신비경(神 秘境)을 깨달아 인간(人間)의 덕의(德義)의 도(道)를 실천(實踐)하는데 새 힘을 얻었던 것이다. 선생(先生)의 몰(歿)한 뒤에 고을 사람들이 선생(先生)을 추모(追慕)하여 사당(祠堂)을 세우고 조두(俎豆)로써 향기(享祈)하였다 한다.
  학사(鶴沙) 김응조(金應祖) 찬(撰)

b-051.txt · 마지막으로 수정됨: 2025/05/30 09:23 저자 ssio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