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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WRAP 37em justify> <WRAP 37em justify>
 <typo ff:'한양해서'; fs:1.2em> <typo ff:'한양해서'; fs:1.2em>
-\_노암공 중신 행장(魯庵公中信行狀)\\+\_**노암공 중신 행장(魯庵公中信行狀)**\\
 \_공(公)의 휘(諱)는 중신(中信)이고 자(字)는 자정(子貞)이며 호(號)는  \_공(公)의 휘(諱)는 중신(中信)이고 자(字)는 자정(子貞)이며 호(號)는 
 노암(魯庵)이다. 한학사(漢學士) 휘(諱) 낙(洛)께서 신라(新羅) 유리왕(儒理王)  노암(魯庵)이다. 한학사(漢學士) 휘(諱) 낙(洛)께서 신라(新羅) 유리왕(儒理王) 
-6년(六年)(기원전 52(五二))에 동국(東國) 월송(越松)에 제일 먼저 오시어 살게 되다. 그후+6년(六年)(기원전 52(五二))에 동국(東國) 월송(越松)에 제일 먼저 오시어 살게 되다. 그후
 고려(高麗) 때에 벼슬이 태자검교 금오장군(太子檢校金吾將軍) 휘(諱)  고려(高麗) 때에 벼슬이 태자검교 금오장군(太子檢校金吾將軍) 휘(諱) 
-온인(仁)으로부터 1세(一世)로 하여 평해황씨(平海黃氏)라 했다.\\+온인(仁)으로부터 1세(一世)로 하여 평해황씨(平海黃氏)라 했다.\\
  
-\_3세(三世) 휘(諱) 유(裕中)은 문하시중(門下侍中)이고 그 아들 서(瑞)는  +\_3세(三世) 휘(諱) 유(裕中)은 문하시중(門下侍中)이고 그 아들 서(瑞)는  
-문하시중(門下侍中)인데 시호(諡號)가 문절공(文節公)이으며 그 아들 종량(宗亮)은 +문하시중(門下侍中)인데 시호(諡號)가 문절공(文節公)이으며 그 아들 종량(宗亮)은 
 호부전서(戶部典書)였으며 그 아들 세영(世英)은 예빈시(禮賓寺)의 동정(同正)이고 호부전서(戶部典書)였으며 그 아들 세영(世英)은 예빈시(禮賓寺)의 동정(同正)이고
 그 아들 용기(龍起)는 예빈(禮賓) 정(正)이며 그 아들 길보(吉甫)는 병사(兵使)였다.  그 아들 용기(龍起)는 예빈(禮賓) 정(正)이며 그 아들 길보(吉甫)는 병사(兵使)였다. 
-그 아들 득재(得載)는 현감(縣監)이며 그 아들 옥(玉崇)은 본조(本朝)에 들어와서 +그 아들 득재(得載)는 현감(縣監)이며 그 아들 옥(玉崇)은 본조(本朝)에 들어와서 
 한성판윤(漢城判尹)이다. 그 아들 보곤(輔坤)은 생원(生員)이며 공(公)의  한성판윤(漢城判尹)이다. 그 아들 보곤(輔坤)은 생원(生員)이며 공(公)의 
 고조부(高祖父)가 되신다. 증조(曾祖)의 휘(諱)는 우(瑀)이며 성주목사(星州牧使)였다.  고조부(高祖父)가 되신다. 증조(曾祖)의 휘(諱)는 우(瑀)이며 성주목사(星州牧使)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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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있으며 세상(世上)에서 대해선생(大海先生)이라 부른다. 있으며 세상(世上)에서 대해선생(大海先生)이라 부른다.
  
- +아버지의 휘(諱)는 거일(居一)인대 호(號)는 명계(明溪)이고 공조참의(工曹參議)에  
- +증직(贈職)되었으며 어머니는 숙부인(淑夫人)에 증직(贈職)된 영덕정씨(盈德鄭氏)로서  
 +성균사성(成均司成)을 지낸 자성(自成)의 증손녀(曾孫女)이며 
 +징(澄)의 따님으로서 여사(女史)의 행의(行義)가 있었다. 선조(宣祖) 19년(十九年)  
 +병술(丙戌)(1586(一五八六))에 공(公)이 탄생(誕生)하면서 비범(非凡)하면서  
 +명특하였으며 학문(學文)을 좋아함에 장여헌(張旅軒) 정한강(鄭寒崗)  
 +손묘당(孫墓堂) 문하(門下)에서 부지런히 배워 13~4(十三、四) 나이에 삼경(三經)을 통달(通達)하고 
 +17~8(十七、八) 나이에는 심경근사록(心經近思錄)을 연구(硏究)하여 여러권 창간(創刊)하여  
 +세상(世上)에 전(傳)하고 <fc #ff0000>재 선생</fc>과 같이 나라를 근심할 정도로 학문(學文)이  
 +경지(境地)에 이르렀다. 학당(學堂)을 세워 동방이학(東方理學)을 
 +배워 알았기에 원근(遠近) 선배들이 추앙(推仰)하였다. 광해(光海) 11년(十一年)  
 +무오(戊午)(1619(一六一九))에 성균생원(成均生員) 진사과(進士科)에 합격(合格)하니 
 +유림(儒林)의 선비들이 모두 흠모(欽慕)하였다. 당시 성균관(成均館)에 있을 때 
 +영양사림(永陽士林) 수십여명(數十餘名)이 공(公)을 찾아와 영양(永陽)의 도유사(都有司)를  
 +맡아달라하는 간청(懇請)에 사양(辭讓)치 못하여 관제(館齊)에 
 +나아가 직무수행(職務隨行)할 때 사림(士林)의 논쟁(論爭)이 많았지만 공(公)의 
 +투철(透徹)한 집념(集念)과 성품(性品)으로 좌절(挫折)치 않고 공사(工事)의
  
 강행(强行)을 목표(目標)에 두고 인조(仁祖) 3년 을축(乙丑) (1625(一六二五))에  강행(强行)을 목표(目標)에 두고 인조(仁祖) 3년 을축(乙丑) (1625(一六二五))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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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의전(儀典)을 펴 후학(後學)들에게 전하니 의전선구자(儀典先驅者)라 추앙(推仰)을  의전(儀典)을 펴 후학(後學)들에게 전하니 의전선구자(儀典先驅者)라 추앙(推仰)을 
 받았으며 그 후 인조(仁祖) 14년(十四年)(1636(一六三六))에 병자호란(丙子胡亂)이  받았으며 그 후 인조(仁祖) 14년(十四年)(1636(一六三六))에 병자호란(丙子胡亂)이 
-일어나자 아들 () 혜(鏸) 정()을 데리고 의병(義兵)을 일으켜 큰 공(功)을 +일어나자 아들 (𨬔) 혜(鏸) 정()을 데리고 의병(義兵)을 일으켜 큰 공(功)을 
-세운업적(業跡)이 영양사난록(永陽四錄)과 창의록(倡義錄)에 기록(記錄)되 +세운 업적(業跡)이 영양사난록(永陽四錄)과 창의록(倡義錄)에 기록(記錄)되어 있다.  
-있다. 공(功)은 인조십육년무인(仁祖十六年戊寅)(一六三八)에 졸(卒)하니 +공(功)은 인조(仁祖) 16년(十六年) 무인(戊寅)(1638(一六三八))에 졸(卒)하니 
-향년 오십삼세(享年五十三世)였으며 묘(墓)는 영천 단호동 노가 곡중봉자좌 +향년(享年) 53세(五十三世)였으며 묘(墓)는 영천(永川) 단호동(丹湖洞) 노가곡(魯柯谷) 중봉(中峯) 자좌(子坐)에 배위(配位)와 합폄(合)이다.\\
-(永川丹湖洞魯柯谷中峯子坐)에 배위(配位)와 합폄(合)이다.\\ +
- +
-\_배 의인 안동권씨(配 宜仁安東權氏)는 동봉(東峯) 극립(克立)의 따님으로서 의 +
-방(義方)의 교훈(敎訓)과 현모양처(賢母良妻)의 덕행(德行)이 돈독(敦篤)하여 +
-원근(遠近) 고을에서 칭송(稱訟)이 자자했다. 공(功)의 빛난 문헌(文獻)은 난+
  
-시(<fc #ff0000>視</fc>)에 소실(消失)되으나 동봉공(東峯公) 장여헌공(張旅軒公)의 문집(文 +\_배(配) 의인(宜仁) 안동권씨(安東權氏)는 동봉(東峯) 극립(克立)의 따님으로서  
-集)에 기록(記錄)되여 있으며 영양구읍지(永陽舊邑誌)에도 기록(記錄)되여 있 +의방(義方)의 교훈(敎訓)과 현모양처(賢母良妻)의 덕행(德行)이 돈독(敦篤)하여 
-다. 사간원사간(司諫院司諫)으로 있던 초휘(初諱) 흠(欽) 개명(改名)은 +원근(遠近) 고을에서 칭송(稱訟)이 자자했다. 공(功)의 빛난 문헌(文獻)은  
-공(公)의 병자호란(丙子胡亂時)의 공훈(功勳)으로 숙종육년경신(肅宗六年庚 +시(亂)에 소실(消失)되으나 동봉공(東峯公) 장여헌공(張旅軒公)의 문집(文集)에  
-申)(一六八〇)에 증 이조판서(贈 吏曹判書)에 제수(除授)되으며 배위 전주 +기록(記錄)되어 있으며 영양(永陽) 구읍지(舊邑誌)에도 기록(記錄)되어  
-최씨(配位 全州崔氏)는 정부인(貞夫人)으로 추증(追贈)되다. 의 손자(孫 +다. 사간원사간(司諫院司諫)으로 있던 초휘(初諱) 흠(欽) 개명(改名) 연(𨬔)은 
-)계하(啓河) 개명영하(改名永河)는 숙종 십오년 기사년(肅宗十五年 己巳) +공(公)의 병자호란(丙子胡亂) 시(時)의 공훈(功勳)으로 숙종(肅宗) 6년(六年) 경신(庚申)(1680(一六八〇))에  
-(一六八九)과시(科試)에 합격(合格)하여 문의현령(文義縣令)을 지냈고 공(公) +(贈) 이조판서(吏曹判書)에 제수(除授)되으며  
-의 증손(曾孫)일(鎰) 개명수길(改名壽吉)은 영조 칠년 신해(英祖七年辛亥)(一 +배위(配位) 전주최씨(全州崔氏)는 정부인(貞夫人)으로 추증(追贈)되다. 공(公)의  
-七三一)에 급제(及第)하여 청주목사(淸州牧使)를 지냈으며 이하는 기록지  +손자(孫) 계하(啓河) 개명(改名) 영하(永河)는 숙종(肅宗) 15년(十五年)  
-는다. 오! 공(公)의 효(孝)와 학문(學文)은 하늘에 이루였고 청념결백(淸廉 +기사(己巳)(1689)(一六八九)) 과시(科試)에 합격(合格)하여 문의현령(文義縣令)을 지냈고  
-潔白)한 선비의 성품(性品)과 고귀(高貴)한 업적(業跡)을 볼때 아쉬움을 남긴채 +공(公)의 증손(曾孫) 일(鎰) 개명(改名) 수길(壽吉)은 영조(英祖) 7년(七年)  
-세상을 떠났음을 누대앙모(累代仰慕) 코져 후손(後孫) 화석 무석씨(和錫 武錫 +신해(辛亥)(1731(一七三一))에 급제(及第)하여 청주목사(淸州牧使)를 지냈으며  
-氏)가 교지(敎旨)와 호적(戶籍)을 갔고와 공(公)의 행장(行狀)을 수차 간청(懇 +이하는 기록치 않는다. \\
-請)하기에 공(公)의 행장(行狀)을 감당하기가 어려워 사양(辭讓)하였지만 공 +
-(公)의 행적(行跡)은 하늘에 닫는 것과 같아 향내(鄕內)살면서 간혹 중남정(竹 +
-覽亭)에 올라 공(公)의 옛날 자취를 염상(儼想)함에 화풍(和風)은 순응(順應)+
  
-하고 일기(日氣)는 청명(淸明)하며 산천(山川)은 고금(古今)과 다를바없이 유 +\_오! 공(公)의 효(孝)와 학문(學文)은 하늘에 이르렀고  
-유(流流)하옵고 일월(日月)은 빛을 더하는듯 하와 곳곳에 흐터있는 문헌(文獻)을 +청렴결백(淸廉潔白)한 선비의 성품(性品)과 고귀(高貴)한 업적(業跡)을 볼 때 아쉬움을 남긴 채 
-종합(綜合)하여 우(右)와 추니 후일 재 채택를 바라노라.\\ +세상을 떠났음을 누대앙모(累代仰慕)코져 후손(後孫) 화석(和錫) 무석(武錫) 씨(氏)가  
-\_\_문소(文韶) 김주(金獻周) 삼가 쓰다.+교지(敎旨)와 호적(戶籍)을 갖고 와 공(公)의 행장(行狀)을 수차 간청(懇請)하기에  
 +공(公)의 행장(行狀)을 감당하기가 어려워 사양(辭讓)하였지만 공(公)의 행적(行跡)은  
 +하늘에 닿는 것과 같아 향내(鄕內)살면서 간혹 죽람정(竹覽亭)에 올라 공(公)의 옛날 자취를  
 +엄상(儼想)함에 화풍(和風)은 순응(順應)하고 일기(日氣)는 청명(淸明)하며  
 +산천(山川)은 고금(古今)과 다를 바 없이 유유(流流)하옵고 일월(日月)은 빛을 더하는 듯 하와  
 +곳곳에 흩어있는 문헌(文獻)을 
 +종합(綜合)하여 우(右)와 추니 후일 재 채택를 바라노라.\\ 
 +\_\_문소(文韶) 김주(金獻周) 삼가 쓰다.
 </typo> </typo>
 </WRAP> </WRAP>
b-052.1748428202.txt.gz · 마지막으로 수정됨: 2025/05/28 19:30 저자 ssio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