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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078 [2025/05/30 06:40] ssio2b-078 [2025/06/01 17:51] (현재) ssio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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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선원전참봉증호조참판모와황공묘갈명(璿源殿參奉贈戶曹參判慕窩黃公墓碣銘)=== ===선원전참봉증호조참판모와황공묘갈명(璿源殿參奉贈戶曹參判慕窩黃公墓碣銘)===
 <WRAP 37em justify><hidden \_한문 원문 보기> <WRAP 37em justify><hidden \_한문 원문 보기>
-<typo ff:'한양해서'; fs:1.2em>+<typo ff:'한양해서'; fs:1.2em; lh:1.5em>
 \_**璿源殿參奉贈戶曹參判慕窩黃公墓碣銘**\\ \_**璿源殿參奉贈戶曹參判慕窩黃公墓碣銘**\\
 公諱德淵字景臨號慕窩姓黃氏平海人也黃之先出自中國唐龍朔間學士 公諱德淵字景臨號慕窩姓黃氏平海人也黃之先出自中國唐龍朔間學士
 公諱洛東桴居平海子孫仍貫而麗朝文節公諱瑞其中祖也李祖宣廟時有 公諱洛東桴居平海子孫仍貫而麗朝文節公諱瑞其中祖也李祖宣廟時有
 諱應淸逸顯監世稱大海先生享明溪院生諱居一贈工議號明溪生諱中信 諱應淸逸顯監世稱大海先生享明溪院生諱居一贈工議號明溪生諱中信
-生員號魯庵以東峯權公克立之婿遂落南爲永人生諱文司諫丙子亂父+生員號魯庵以東峯權公克立之婿遂落南爲永人生諱𨬔文司諫丙子亂父
 子擧義赴暘溪鄭公好仁陣以功贈吏判號竹覽俱遊旅軒張先生門諱永河 子擧義赴暘溪鄭公好仁陣以功贈吏判號竹覽俱遊旅軒張先生門諱永河
 文縣令諱壽吉淸州牧使曾祖曰運東祖曰致寬考曰鯤海皆隱德不仕妣順 文縣令諱壽吉淸州牧使曾祖曰運東祖曰致寬考曰鯤海皆隱德不仕妣順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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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就學便曉解事親之義而左右就養承無違及有大疾湯鑪不撤夜禱北辰露 就學便曉解事親之義而左右就養承無違及有大疾湯鑪不撤夜禱北辰露
 伏達曙割服和藥病乃得差神明之感固如是也聯床共被友于尤篤宗黨有 伏達曙割服和藥病乃得差神明之感固如是也聯床共被友于尤篤宗黨有
-事必禀決於公就玄隱趙公基永講經問禮特蒙奬詡魯竹二公文籍散佚 +事必禀決於公就玄隱趙公基永講經問禮特蒙奬詡魯竹二公文籍散佚 
-公收拾泰毫精寫以藏累世先在於竹林而香火樣公興闔族鳩資拮据+公收拾泰毫精寫以藏累世先在於竹林而香火樣公興闔族鳩資拮据
 買置祭田又以明魯竹三公立祠之意孜孜不倦遭內外艱廬墓三年致哀盡 買置祭田又以明魯竹三公立祠之意孜孜不倦遭內外艱廬墓三年致哀盡
 禮雖當衷餘一如袒括扁其居曰慕窩盖取終身孺慕之義也庚申孝行入鏽 禮雖當衷餘一如袒括扁其居曰慕窩盖取終身孺慕之義也庚申孝行入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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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而安分隐巖穴而好義敦宗以睦交隣以恤不興人爭競不言人過失豈無所 而安分隐巖穴而好義敦宗以睦交隣以恤不興人爭競不言人過失豈無所
 本而然乎名祖之家學難誣也大賢之模範不泯也可不敬歟載圭甫請余銘 本而然乎名祖之家學難誣也大賢之模範不泯也可不敬歟載圭甫請余銘
-其墓乃爲之銘曰行由孝友業專耕讀裕俊必昌省無而仕而贈天褒感+其墓乃爲之銘曰行由孝友業專耕讀裕俊必昌省無而仕而贈天褒感
 祝千秋堪語孝子之宅\\ 祝千秋堪語孝子之宅\\
 \_\_戊辰上元節聞韶金獻周撰 \_\_戊辰上元節聞韶金獻周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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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ypo ff:'바탕'; fs:1em; lh:1.5em> <typo ff:'바탕'; fs:1em; lh:1.5em>
 \_**선원전참봉(璿源殿參奉) 증호조참판(贈戶曹參判) 모와(慕窩) 황공(黃公) 묘갈명(墓碣銘)**\\ \_**선원전참봉(璿源殿參奉) 증호조참판(贈戶曹參判) 모와(慕窩) 황공(黃公) 묘갈명(墓碣銘)**\\
-\_공(公)의 휘(諱)는 덕연(德淵)이고 자(字)는 경(景臨)이며 호(號)는 모와(慕 +\_공(公)의 휘(諱)는 덕연(德淵)이고 자(字)는 경(景臨)이며 호(號)는 모와(慕窩)이다.  
-窩)이다 성(姓)은 평해황씨(平海黃氏)인데 황氏의 선조(先祖)는 중국(中國)에서 +성(姓)은 평해황씨(平海黃氏)인데 황씨(黃)의 선조(先祖)는 중국(中國)에서 
-왔으니 당(唐)나라 용삭(龍削)년간에 학사공 (學士公洛)께서 동쪽으로  +왔으니 당(唐)나라 용삭(龍削)년간에 학사공(學士公) 낙(洛)께서 동쪽으로  
-너와 평해에서 살게되었고 자손(子孫)들이 이어 살아 본관(本貫)을 평해황씨 +너와 평해에서 살게 되었고 자손(子孫)들이 이어 살아 본관(本貫)을  
-(平海黃氏)로하여 살게 되었다 고려(高麗)시대(時代)의 문절공 (文節公+평해황씨(平海黃氏)로하여 살게 되었다고려(高麗) 시대(時代)의 문절공(文節公)  
-는 증시조이시다.\\+서(瑞)는 (中祖)이시다.\\
  
-\_조선선조(朝鮮宣祖)때 현감(縣監)을 지낸 응청(應淸)은 세상에서 대해선생(大 +\_조선(朝鮮) 선조(宣祖) 때 현감(縣監)을 지낸 응청(應淸)은 세상에서  
-해先生)이라 알려졌는데 명계서원(明溪書院)에서 제향(祭享)을 받들고 있다 그의 +대해선생(大해先生)이라 알려졌는데 명계서원(明溪書院)에서 제향(祭享)을 받들고 있다.  
-아들 거일(居一)은 추증공조참의(追贈工曹參議)로서 호(號)는 명계(明溪)이다 +그의 아들 거일(居一)은 추증(追贈) 공조참의(工曹參議)로서 호(號)는 명계(明溪)이다. 
-그의 아들 중신(中信)은 성균생원(成均生員)으로 호(號)는 노암(魯庵)인되 동 +그의 아들 중신(中信)은 성균생원(成均生員)으로 호(號)는 노암(魯庵)인데  
-봉(東峯) 권극립(權克立)의 사위가 되어 남쪽으로 옮겨와 마침내 영천사 +봉(東峯) 권극립(權克立)의 사위가 되어 남쪽으로 옮겨와 마침내 영천  
-이되었다 그의 아들 ()은 문사간(文司諫)을 지냈다 병자호란(丙子胡亂)이 +이 되었다그의 아들 (𨬔)은 문사간(文司諫)을 지냈다병자호란(丙子胡亂)이 
-일어나자 부자가 함께 의병으로 양계(暘溪) 정호인(鄭好仁)의 진영에  +일어나자 부자가 함께 의병으로 양계(暘溪) 정호인(鄭好仁)의 진영에  
-어갔다 이때의 공적으로 이조판서(吏曹判書)에 추증되었으며 호(號)는 죽(竹 +어갔다이때의 공적으로 이조판서(吏曹判書)에 추증되었으며 호(號)는  
-覽)이라 하였고 여헌(旅軒) 장선생(張先生)의 문하(門下)에서 교유하였다.\\+(竹覽)이라 하였고 여헌(旅軒) 장선생(張先生)의 문하(門下)에서 교유하였다.\\
  
-\_그의 아들 영하(永河)는 문의현령(文義縣令)이고 그의 아들 수길(壽吉)은  +\_그의 아들 영하(永河)는 문의현령(文義縣令)이고 그의 아들 수길(壽吉)은  
-주목사(淸州牧使)이다 공(公)의 증조부(祖父)는 운동(運東)이고 조부(祖父)+주목사(淸州牧使)이공(公)의 증조부(祖父)는 운동(運東)이고 조부(祖父)
  
-치관(致寬)이며 아버지는 곤해(鯤海)이다 이분들은 덕망을 갖추었으나 벼슬하지 +치관(致寬)이며 아버지는 곤해(鯤海)이다이분들은 덕망을 갖추었으나 벼슬하지 
-않았다 어머니는 순천박씨(順天朴氏)인데 석(錫)의 셋째 따님이다 공(公)은  +않았다어머니는 순천박씨(順天朴氏)인데 석(錫)의 셋째 따님이다공(公)은  
-조(正祖)시대 정사년(丁巳年)(1797(一七九七))에 태어났는데 삼형제(三兄弟) 중(中) +조(正祖) 시대 정사년(丁巳年)(1797(一七九七))에 태어났는데 삼형제(三兄弟) 중(中) 
-둘째이다. 어렸을 때부터 자질이 영민한데다 효성(孝誠)이 남달랐다 겨우 배움+둘째이다. 어렸을 때부터 자질이 영민한데다 효성(孝誠)이 남달랐다겨우 배움
 길에 들게 되자 문득 어버이 섬기는 의리를 깨달아 좌우에서 봉양함에 어긋남이 길에 들게 되자 문득 어버이 섬기는 의리를 깨달아 좌우에서 봉양함에 어긋남이
 없었다. 부모님이 병환에 들자 약탕관을 치운 적이 없었고 밤에는 북극성(北極星)에 없었다. 부모님이 병환에 들자 약탕관을 치운 적이 없었고 밤에는 북극성(北極星)에
-기도 드리며 새벽이 될 때까지 노천에서 엎드려 웠다. 또 허벅지 살을 베어 약에 +기도 드리며 새벽이 될 때까지 노천에서 엎드려 웠다. 또 허벅지 살을 베어 약에 
-섞어 올리자 이에 병의 차도를 보게되으니, 신명(神明)이 감동함이 실로 이와+섞어 올리자 이에 병의 차도를 보게되으니, 신명(神明)이 감동함이 실로 이와
 같았다. 밥상을 나란히 하고 이불을 함께 덮는데 형제의 우의는 돈독하였고  같았다. 밥상을 나란히 하고 이불을 함께 덮는데 형제의 우의는 돈독하였고 
 종중(宗中)에 일이 생길 때면 꼭 공(公)에게 여쭙고 난 다음 허락을 얻어 처리하였다. 종중(宗中)에 일이 생길 때면 꼭 공(公)에게 여쭙고 난 다음 허락을 얻어 처리하였다.
줄 67: 줄 67:
 문의하는 가운데 각별한 칭찬과 격려를 받았다.\\ 문의하는 가운데 각별한 칭찬과 격려를 받았다.\\
  
-\_노암(魯庵) 죽람(竹覽) 두 분의 문집(文集)이 흩어지고 없어감에 공은 이를  +\_노암(魯庵) 죽람(竹覽) 두 분의 문집(文集)이 흩어지고 없어 감에 공은 이를  
-수습하여 알뜰이 베껴서 간수하였다. 여러대 이어온 선영(先)이 죽림(竹林)에 +수습하여 알뜰이 베껴서 간수하였다. 여러대 이어온 선영(先)이 죽림(竹林)에 
-있었으나 그 제향(祭享)이 잘 이어지지 않자 공은 일족과 더불어 힘써 자금을 +있었으나 그 제향(祭享)이 잘 이어지지 않자공은 일족과 더불어 힘써 자금을 
-모아 제전(祭田)을 사 두게 되었다. 또 명로죽(明魯竹)을 세분의 사당을 건립할+모아 제전(祭田)을 사 두게 되었다. 또 명로죽(明魯竹)(명계(明溪), 노암(魯庵), 죽람(竹覽)) 세 분의 사당을 건립할
 뜻을 세워 힘을 기울임에 게을리 하지 않았다. 부모님의 상을 당하자 여막을 짓고 뜻을 세워 힘을 기울임에 게을리 하지 않았다. 부모님의 상을 당하자 여막을 짓고
  
줄 76: 줄 76:
 지냈다. 거처하는 집의 현판을 모와(慕窩)라 하였으니 이는 종신(終身)토록 깊이 지냈다. 거처하는 집의 현판을 모와(慕窩)라 하였으니 이는 종신(終身)토록 깊이
 사모한다는 의리에서 취한 것이다. 경신(庚申)년에 효행(孝行)으로 천거되니  사모한다는 의리에서 취한 것이다. 경신(庚申)년에 효행(孝行)으로 천거되니 
-선원전참봉(璿源殿參奉)에 제수되었다. 공(公)은 고종(高宗) +선원전(璿源殿) 참봉(參奉)에 제수되었다. 공(公)은 고종(高宗) 
 기묘(己卯)년(1880(一八八〇) 10월(十月) 25일(二十五日)에 질환으로 모와(慕窩)에서  기묘(己卯)년(1880(一八八〇) 10월(十月) 25일(二十五日)에 질환으로 모와(慕窩)에서 
 돌아가시니 수(壽) 83(八十三)세였다. 돌아가시니 수(壽) 83(八十三)세였다.
줄 83: 줄 83:
  
 \_그의 아내는 나주임씨(羅州林氏) 한백(漢伯)의 따님으로 공(公)보다 앞서 세상을 \_그의 아내는 나주임씨(羅州林氏) 한백(漢伯)의 따님으로 공(公)보다 앞서 세상을
-떠났고 정부인(貞夫人)에 추증(追贈)되었는데 묘(墓)는 나중에 합폄(合)되었다.  +떠났고 정부인(貞夫人)에 추증(追贈)되었는데 묘(墓)는 나중에 합폄(合)되었다.  
-아들이 셋인데 상춘(相春)은 백부의 후사로 들어갔고 벼슬은 수통정대부(通政大夫)이다.  +아들이 셋인데 상춘(相春)은 백부의 후사로 들어갔고 벼슬은 수(壽) 통정대부(通政大夫)이다.  
-상호(相鎬) 상섭(相燮)도 수통정대부(通政大夫)이다.\\+상호(相鎬) 상섭(相燮)도 수(壽) 통정대부(通政大夫)이다.\\
  
-\_상호(相鎬)의 아들은 병두(炳斗)와 병권(炳權)이고 사위는 이복(李云ト)이다. +\_상호(相鎬)의 아들은 병두(炳斗)와 병권(炳權)이고 사위는 이복(李云ト)이다. 
-상섭(相燮)의 아들은 병근(炳根) 병성(炳成) 병현(炳賢)이고 사위는 조규환(曺 +상섭(相燮)의 아들은 병근(炳根) 병성(炳成) 병현(炳賢)이고 사위는  
-奎煥) 정봉헌(鄭奉憲) 강대준(姜大俊)이다. 상춘(相春)의 아들은 병표(炳杓)  +조규환(曺奎煥) 정봉헌(鄭奉憲) 강대준(姜大俊)이다. 상춘(相春)의 아들은 병표(炳杓)  
-기(炳基)이다. 병두(炳斗)의 아들은 재규(載圭) 재섭(載奭) 재호(載好)인데  +기(炳基)이다. 병두(炳斗)의 아들은 재규(載圭) 재섭(載奭) 재호(載好)인데  
-호(載好)는 병권(炳權)의 양자로 들어갔다. 병근(炳根)의 아들은 재학(載鶴)이고+호(載好)는 병권(炳權)의 양자로 들어갔다. 병근(炳根)의 아들은 재학(載鶴)이고
 사위는 이수희(李壽熙) 조용운(趙鏞沄)이다. 병성(炳星)의 아들은 재영(載榮) 사위는 이수희(李壽熙) 조용운(趙鏞沄)이다. 병성(炳星)의 아들은 재영(載榮)
  
줄 100: 줄 100:
 못한다. \\ 못한다. \\
  
-\_아아! 공(公)은 아름다운 자질에다 효행과 우애를 함께 행하였으며 시골에 +\_아아! 공(公)은 아름다운 자질에다 효행과 우애를 함께 행하였으며시골에 
-살면서도 편안한 마음으로 분수를 지켰고 산속에 은거하면서도 의리를 좋아하였다. +살면서도 편안한 마음으로 분수를 지켰고산속에 은거하면서도 의리를 좋아하였다. 
-화목(和睦)으로 중중간(宗中間)의 돈독함을 다졌고 규율로서 이웃과 사귀다.+화목(和睦)으로 중중간(宗中間)의 돈독함을 다졌고 규율로서 이웃과 사귀다.
 남과 다투는 일이 없었고 남의 과실을 말하지 않았다. 어찌 그 근본이 없고서야 남과 다투는 일이 없었고 남의 과실을 말하지 않았다. 어찌 그 근본이 없고서야
 이러할 수가 있겠는가. 이름있는 조상(祖上)을 가진 집안의 가르침에 속임이 어찌 이러할 수가 있겠는가. 이름있는 조상(祖上)을 가진 집안의 가르침에 속임이 어찌
 있을 것이며 대현(大賢)의 모범이 민멸(泯滅)될리 있으랴고 한다면 오히려  있을 것이며 대현(大賢)의 모범이 민멸(泯滅)될리 있으랴고 한다면 오히려 
 분쟁스러운 짓이 되지나 않은지. 재규(載圭)가 비로소 나에게 묘비문(墓碑文)을 분쟁스러운 짓이 되지나 않은지. 재규(載圭)가 비로소 나에게 묘비문(墓碑文)을
-부탁함에 나는 다음과 같이 갈명(碣銘)을 부치고자 한다. +부탁함에 나는 다음과 같이 갈명(碣銘)을 붙이고자 한다.\\ 
-효와 우애를 행하는데 오로지 글읽기를 가는 것과 같아야 일에 반듯이 창 +\\ 
-성함이니 도리쳐보건데 부끄럼이 없도록 반성함이 하늘이 나에게 줄것이니  +行由孝友 효와 우애를 행하는데 \\ 
-사하게 여기면서 오래도록 말을 으로서 그로인하여 효자의 이되느니라 +業專耕讀 오로지 글읽기를 밭 가는 것과 같아야 \\ 
-행유효우업전경독유후필창반성무작이사이증천포감축천추감언효자지택(行由孝 +裕俊必昌 후일에 반듯이 창성함이니 \\ 
-友業專耕讀裕後必昌反省無作而仕而贈天褒感祝千秋堪語孝子之宅\\ +反省無怍 돌이켜보건데 부끄럼이 없도록 반성함이 \\ 
 +而仕而贈 하늘이 나에게 줄 것이니 \\ 
 +天褒感祝 감사하게 여기면서 \\ 
 +千秋堪語 오래도록 말을 으로서 \\ 
 +孝子之宅 그로인하여 효자의 이 되느니라\\ 
 +\\
 \_무진(戊辰) 상원절(上元節) 문소(聞韶) 김헌주(金獻周) 찬(撰)하다. \_무진(戊辰) 상원절(上元節) 문소(聞韶) 김헌주(金獻周) 찬(撰)하다.
 </typo> </typo>
 </WRAP> </WRAP>
b-078.1748554812.txt.gz · 마지막으로 수정됨: 2025/05/30 06:40 저자 ssio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