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곡황여하묘갈명(隱谷黃汝厦墓碣銘)
은곡 황영하 묘갈명
공의 휘는 여하(汝厦)오, 자는 사비(士庇)니 평해인이라. 고려
금오장군으로부터 5, 6대에 연이어 현관이 있었고, 아조에 와서는
개국공신 숭록대부 우의정 봉 평해군 시 양무공 휘 희석(希碩)이라는 분을
위시해서, 판서공 휘 인(麟), 참판공 휘 보조(甫祖),
감사공 휘 건중(建中) 등 여러 어른들은 모두 공의 원조이시다.
망미공 휘 원(瑗)은 오직 덕을 심고 벼슬을 하지 않으며 평해로 퇴거하니,
비록 세상에 크게 이름난 것은 없으나 향리의 독행지사로 구가의 명성을
잃지 아니했고, 공의 고조의 휘는 영종(永宗)이오,
증조의 휘는 희로(禧老)요, 조의 휘는 대(岱)이니 생원 사과요,
선고의 휘는 호량(浩亮)이오 동지중추부사로 학행이 있고 호는 침계(枕溪)라.
비는 학생 영월 엄귀현(嚴貴賢)의 여라.
숙종 정해(丁亥)(1707)에 공을 낳으니, 나면서부터 특이한 바탕에
성품이 순수 화평하며, 개결한 심지와 문예로서 향리에 알려졌더니,
점차 장성함에 훈융한 선비들과 교유하고 강도낙지하여,
주야로 면려 게으르지 아니하니, 인격의 단련함이 점점 더하더라.
그리고 평소에 사람들에게 말하기를, 천작을 닦으면
인작은 스스로 오는 것이어늘 어찌 세속 물욕에 급급하라.
또 사환의 길을 밟는 것은 수기(修己) 정심의도가 못된다 하고
표연히 털고 고향으로 돌아와 전원에 발자취를 감추고,
은곡 간에 남은 여생을 보내니, 이것을 자랑스럽게 생각하더라.
그리고 경학에 뜻을 두고 그 홀로 거처하는 한방에는 소조상쾌하고
성현의 긴요한 말씀을 4벽에 붙혀 놓고, 항상 스스로 경성하며
가훈 10여편을 서술하고, 그 외에 백가 시서를 모르는 것이 없이 통달하고,
시고 30여편이 불행하게도 화재로 소실되어, 공의 수서가 없어지니
슬프고 한스럽다.
공이 또 효성이 출천하여, 친환이 있음에 혈지상분하는 성심을 다하였으며,
또 선조의 제사에는 친집궁찬하는 공경심을 발현하였다.
그리고 항상 말하기를 효라는 것은 사람의 본분이라 하였다.
누차 추천을 받아 동지중추에 제수됨에, 당시 사대부가에서 공을 존경하기를
해동노사라 칭하였다.
무술(戊戌) 9월 29일에 정침에서 고종하니, 향년이 72더라.
평해 군남 곡소 공시산의 자(子)좌원에 장사하였다.
배위는 정부인 창원 황씨(黃氏)니 학생 휘 도참(道叅)의 여라,
갑신(甲申)에 생하고 공보다 먼저 졸하여 부후하다.
4남이 있으니 장남은 해중(海中)이니 경학에 밝고 행검이 높아
세상에 모범이 되었으며, 다음은 해일(海一), 해정(海正), 해오(海五)니
또한 문필과 아사(雅士)로 이름이 높았다.
이외에 증현손 30여인이 있어 다 기록하지 못하노라.
7세손 종혁(宗爀) 근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