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084
차이
문서의 선택한 두 판 사이의 차이를 보여줍니다.
양쪽 이전 판이전 판다음 판 | 이전 판 | ||
b-084 [2025/05/26 12:08] – ssio2 | b-084 [2025/06/07 07:14] (현재) – ssio2 | ||
---|---|---|---|
줄 1: | 줄 1: | ||
- | 처사황경일묘갈명(處士黃慶一墓碣銘) | + | ===처사황경일묘갈명(處士黃慶一墓碣銘)=== |
- | + | <WRAP 37em justify>< | |
- | 處士黃慶一墓碣銘 | + | <typo ff:' |
- | 直箕城縣之西虎田負壬之原有宰如而封者는 寔處士黃公衣潟之藏而 | + | \_**處士黃慶一墓碣銘**\\ |
- | 論撰不備證하야 響無憑하니 其十世孫正英이 爲是之懼하야 詢干諸宇 | + | 直箕城縣之西虎田負壬之原有宰如而封者는 寔處士黃公衣潟之藏而論撰不備證하야 |
- | 宗하고 將伐石謬責으로 懸詩於余하니 顧年耗精散에 有不敢是役而盖 | + | 響無憑하니 其十世孫正英이 爲是之懼하야 詢干諸宇宗하고 |
- | 以契而不以文也요 亦不獲終辭하야 遂強昏而叙之曰公의 諱는 慶一이 | + | 將伐石謬責으로 懸詩於余하니 顧年耗精散에 有不敢是役而盖以契而不以文也요 |
- | 요 字는 景元이요 姓은 黃氏니 其先은 中朝人也라 學士諱는 洛이니 | + | 亦不獲終辭하야 遂強昏而敍之曰公의 諱는 慶一이요 |
- | 桴海以東하야 泊于平海하시니 爲始貫之祖요 東京時에 有諱瑞니 | + | 字는 景元이요 姓은 黃氏니 其先은 中朝人也라 學士諱는 洛이니 |
- | 翊戴勳僉議評理侍中으로 諡를 文節이라 陞縣爲郡하고 入我 朝하야 | + | 桴海以東하야 泊于平海하시니 爲始貫之祖요 東京時에 有諱瑞니 |
- | 有諱玉崇이 漢城判官이라 自是로 爲東土著閥하야 或以文學行義之篤 | + | 以翊戴勳僉議評理侍中으로 諡를 文節이라 陞縣爲郡하고 入我 朝하야 |
- | 이요 或以簪組甲之榮하니 於公에 曾祖以上六世也라 祖諱는 瑀니 星 | + | 有諱玉崇이 漢城判官이라 自是로 爲東土著閥하야 或以文學行義之篤이요 |
- | 州牧使요 考諱는 應淸이니 以孝로 聞於朝하야 命棹楔後로 以弓旌超 | + | 或以簪組甲之榮하니 於公에 曾祖以上六世也라 祖諱는 瑀니 星州牧使요 |
- | 하고 授通訓大夫眞寶縣監하니 即世稱大海先生也라 妣는 蔚珍張氏니 | + | 考諱는 應淸이니 以孝로 聞於朝하야 命棹楔後로 以弓旌超하고 |
- | 江界府使伯孫之子漢輔之女斗 嘉靖丙寅에 擧公于正明先第하야 犀角이 | + | 授通訓大夫眞寶縣監하니 即世稱大海先生也라 妣는 蔚珍張氏니 |
- | 200 豐滿하고 聰識이 | + | 江界府使伯孫之子漢輔之女라 嘉靖丙寅에 擧公于正明先第하야 犀角이 |
- | + | 豐滿하고 聰識이 | |
- | 歲時에 先大海公이 呼韻命賦하시면 公이 應口輒對에 句法이 警絕하니 | + | 八九歲時에 先大海公이 呼韻命賦하시면 公이 應口輒對에 句法이 警絶하니 |
- | 大海公이 因出示從子海月公曰此哥與而兒中允이 俱以才藝로 迥出同 | + | 大海公이 因出示從子海月公曰此哥與而兒中允이 俱以才藝로 迥出同輩하니 |
- | 輩하니 異日家戶重拓之望이 在若等矣라하더라 自是로 文詞日進하야 | + | 異日家戶重拓之望이 在若等矣라하더라 自是로 文詞日進하야 |
- | 聲譽大噪러라 審에 移居于寧海元邱하니 | + | 聲譽大噪러라 審에 移居于寧海元邱하니 |
- | 以軸으로 遇坎而蹶于하고 霄之木이 觸雷而折하니 實丁亥三月三日이 | + | 遇坎而蹶于하고 霄之木이 觸雷而折하니 實丁亥三月三日이라 |
- | 라 見于世纔二十二라 實蹟이 載寧海府誌하다 其棚也에 遠近士友가 | + | 見于世纔二十二라 實蹟이 載寧海府誌하다 其堋也에 遠近士友가 |
- | 爭執挽謀而悼之하니 公之見慕於人者多類此러라 配務安朴氏參議世淳 | + | 爭執挽謀而悼之하니 公之見慕於人者多類此러라 配務安朴氏參議世淳의 女니 |
- | 의 女니 無育하야 以仲兄子中美로 爲嗣하고 女는 金是相이라 墓는 | + | 無育하야 以仲兄子中美로 爲嗣하고 女는 金是相이라 墓는 |
- | 在虎田先瑩下雙封이라 於乎라 公以篤厚之資와 超邁遇之才로 若久於 | + | 在虎田先塋下雙封이라 於乎라 公以篤厚之資와 超邁遇之才로 若久於世면 |
- | 世면 大可以法宮之賞이요 小可以扶世教淑人心이은마는 而乃瑞草琦 | + | 大可以法宮之賞이요 小可以扶世敎淑人心이은마는 而乃瑞草琦花之朝榮暮悴는 |
- | 花之朝榮暮悴는 又何也오 昔에 王子安李長吉數君은 雖早世하야 爲 | + | 又何也오 昔에 王子安李長吉數君은 雖早世하야 爲可寃이나 |
- | 可寃이나 而膝閣高軒之文으로 膾炙人口하니 寃可洩也라 而公則無零 | + | 而膝閣高軒之文으로 膾炙人口하니 寃可洩也라 而公則無零之瑙句之箱麓하야 |
- | 之瑙句之箱麓하야 無以供球璧之玩하니 是亦重可悲也오 且弟仍이 中 | + | 無以供球璧之玩하니 是亦重可悲也오 且晜仍이 中贊하야 |
- | 賛하야 至八世孫教旭號宿巖이 有誠孝特行하니 邑倅가 使臺로 交章 | + | 至八世孫敎旭號宿巖이 有誠孝特行하니 邑倅가 使臺로 交章褒啓라 |
- | + | 有七子하니 | |
- | 褒啟라 有七子하니 | + | 中英正英喆英極英斗英達英浩英壽英舜英智英德英澤英은 各房子也요 |
- | 者也 中英正英喆英極英斗英達英浩英壽英舜英智英德英澤英은 各房 | + | 十二世孫暾子載塤은 其世嫡也라 遂爲銘하노니 銘曰 敻想黃公은 |
- | 子也요 十二世孫暾子載塤은 其世嫡也라 遂爲銘하노니 銘曰 敻想黃 | + | 麗鮮嘸族이라 海爺賢庭이요 月翁同塾이라 胡門誾侃은 柳氏家法이라 |
- | 公은 麗鮮無族이라 海爺賢庭이요 月翁同塾이라 胡門闊侃은 柳氏家 | + | 三棣交輝에 六經是嚼이라 其來有爲러니 其去何倐고 惟虎之原은 |
- | 法이라 三棣交輝에 六經是嚼이라 其來有爲러니 其去何條고 惟虎之 | + | 瀧崗之麓이라 焰紫淑氣가 繞封不熄이라 我銘玄石하니 永來百世이라\\ |
- | 原은 瀧崗之麓이라 焰紫淑氣가 繞封不熄이라 我銘玄石하니 永來百 | + | \_\_漢陽趙獻基謹撰 |
- | 世이라 | + | </ |
- | 처사(處士) 황경일(黃慶一)의 묘갈명 | + | </ |
- | 漢陽趙獻基謹撰 | + | \\ |
- | 곧 기성(箕城縣의 서쪽 호전(虎田) 임방(壬方)을 등진 둔덕에 봉분(封墳)이 | + | <typo ff:' |
- | 우뜩한 것이 있으니 이것은 처사(處士) 황공(黃公)의 무덤인데 비문(碑文)이 | + | \_**처사(處士) 황경일(黃慶一)의 묘갈명**\\ |
- | 불비하여 평생의 이력(履歷)을 증명할 근거가 없으니 그의 | + | \_곧 기성(箕城縣의 서쪽 호전(虎田) 임방(壬方)을 등진 둔덕에 봉분(封墳)이 |
- | 정영(正英)이 이것을 두려워하여 여러 종중(宗中)사람에게 물어보고 장차 비 | + | 우뚝한 것이 있으니 이것은 처사(處士) 황공(黃公)의 무덤인데 비문(碑文)이 |
- | 석(碑石)을 세우기 위해 비명(碑銘)의 글을 잘못 나에게 책임지우는 지라. 생 | + | 불비하여 평생의 이력(履歷)을 증명할 근거가 없으니 그의 |
- | + | 정영(正英)이 이것을 두려워하여 여러 종중(宗中)사람에게 물어보고 장차 비석(碑石)을 | |
- | 각해 보니 내가 나이도 많고 정신도 산만하여 감히 이 일을 감당하지 못할 | + | 세우기 위해 비명(碑銘)의 글을 잘못 나에게 책임 지우는 지라. |
- | 하며 세의(世誼)로 보아서도 글이 짧은 것으로 또한 끝내 사양했으나 할 수 없어서 | + | 생각해 보니 내가 나이도 많고 정신도 산만하여 감히 이 일을 감당하지 못할 |
+ | 듯하며 세의(世誼)로 보아서도 글이 짧은 것으로 또한 끝내 사양했으나 할 수 없어서 | ||
드디어 노혼(老昏)한 것을 무릅쓰고 서술(敍述)해 말하노니 공(公)의 휘(諱)는 | 드디어 노혼(老昏)한 것을 무릅쓰고 서술(敍述)해 말하노니 공(公)의 휘(諱)는 | ||
경일(慶一)이요 자(字)는 경원(景元)이며 성(姓)은 황씨(黃氏)이니 그의 선대 | 경일(慶一)이요 자(字)는 경원(景元)이며 성(姓)은 황씨(黃氏)이니 그의 선대 | ||
- | (先代)는 중국(中國)사람이다. | + | (先代)는 중국(中國)사람이다.\\ |
- | 학사(學士)인 휘(諱) | + | |
- | (定泊)하시니 이 분이 관향(貫鄕)의 시조(始祖)이며 고려(高麗) 때에 휘(諱) | + | \_학사(學士)인 휘(諱) |
+ | 정박(定泊)하시니 이 분이 관향(貫鄕)의 시조(始祖)이며 고려(高麗) 때에 휘(諱) | ||
서(瑞)는 익대공신(翊戴功臣)으로서 첨의평리시중(僉議評理侍中)의 벼슬을 하고 | 서(瑞)는 익대공신(翊戴功臣)으로서 첨의평리시중(僉議評理侍中)의 벼슬을 하고 | ||
문절공(文節公)의 시호(諡號)가 내렸기 때문에 평해현(平海縣)을 군(郡)으로 | 문절공(文節公)의 시호(諡號)가 내렸기 때문에 평해현(平海縣)을 군(郡)으로 | ||
- | 승호(陞號)하게 되었다. | + | 승호(陞號)하게 되었다.\\ |
- | 조선조(朝鮮朝)에 들어와서 휘(諱) 옥승(玉崇)은 한성판윤(漢城判尹)이라。 | + | |
- | 이로부터 우리나라의 드러난 문벌(門閥)이 되어 혹은 문학(文學)과 행의(行義)가 | + | \_조선조(朝鮮朝)에 들어와서 휘(諱) 옥숭(玉崇)은 한성판윤(漢城判尹)이라.\\ |
- | 독실했고 혹은 높은 관작(官爵)과 과거(科舉擧)에서 장원(壯元)의 영광(榮光)을 | + | |
- | 누렸으니 공에게는 증조(曾祖) 이상 | + | \_이로부터 우리나라의 드러난 문벌(門閥)이 되어 혹은 문학(文學)과 행의(行義)가 |
- | 조부(祖父)의 휘(諱)는 우(瑀)이니 성주목사(星州牧使)를 지냈고 아버지의 휘 | + | 독실했고 혹은 높은 관작(官爵)과 과거(科擧)에서 장원(壯元)의 영광(榮光)을 |
+ | 누렸으니, 공에게는 증조(曾祖) 이상 | ||
+ | |||
+ | \_조부(祖父)의 휘(諱)는 우(瑀)이니 성주목사(星州牧使)를 지냈고 아버지의 휘 | ||
(諱)는 응청(應淸)이니 효행(孝行)으로 조정(朝廷)에 알려져서 정려(旌閭)가 | (諱)는 응청(應淸)이니 효행(孝行)으로 조정(朝廷)에 알려져서 정려(旌閭)가 | ||
내려졌으며 선비로서 대부(大夫)의 반열(班列)에 올라 통훈대부(通訓大夫)의 | 내려졌으며 선비로서 대부(大夫)의 반열(班列)에 올라 통훈대부(通訓大夫)의 | ||
품계로 진보현감(眞寶縣監)의 벼슬이 제수(除授)되었으니 이분이 세칭(世稱) | 품계로 진보현감(眞寶縣監)의 벼슬이 제수(除授)되었으니 이분이 세칭(世稱) | ||
- | 대해선생(大海先生)이시다. | + | 대해선생(大海先生)이시다.\\ |
- | 어머니는 울진장씨(蔚珍張氏)이니 강계부사(江界府使)를 지낸 백손(伯孫)의 | + | |
- | 들 한보(漢輔)의 따님이며 명종(明宗) 二十一년(서기 一五六六) 병인에 정명 | + | \_어머니는 울진장씨(蔚珍張氏)이니 강계부사(江界府使)를 지낸 백손(伯孫)의 |
- | (正明)의 선제(先第)에서 공(公)을 낳으니 기골(氣骨)이 풍만(豐滿)하고 총명과 | + | 아들 한보(漢輔)의 따님이며 명종(明宗) |
- | 식견(識見)이 특출하여 겨우 배움에 나아가서부터 공부를 보살펴 주지 않아도 | + | 정명(正明)의 선제(先第)에서 공(公)을 낳으니 기골(氣骨)이 풍만(豐滿)하고 총명과 |
- | 문의(文義)를 밝게 풀어나갔으며 八、九세 때에 선친(先親)이신 대해공(大海 | + | 식견(識見)이 특출하여 겨우 배움에 나아가서 부터 공부를 보살펴 주지 않아도 |
- | 公)이 운(韻)을 부르며 부(賦)를 지으라고 명하시면 공(公)이 운(韻)이 입에서 | + | 문의(文義)를 밝게 풀어나갔으며 |
- | 떨어지자 곧 대구(對句)를 말하였는데 글구(句)를 짓는 법이 놀랍게 절묘하니 | + | 대해공(大海公)이 운(韻)을 부르며 부(賦)를 지으라고 명하시면 공(公)이 운(韻)이 입에서 |
+ | 떨어지자 곧 대구(對句)를 말하였는데 글귀(句)를 짓는 법이 놀랍게 절묘하니 | ||
대해공(大海公)이 그 글귀를 조카인 해월공(海月公)에게 내어 보이며 말하기를 | 대해공(大海公)이 그 글귀를 조카인 해월공(海月公)에게 내어 보이며 말하기를 | ||
- | 이 아이와 너의 아이 중윤(中允)이 모두 같은 또래 중에서 재주가 특출하니 | + | 이 아이와 너의 아이 중윤(中允)이 모두 같은 또래 중에서 재주가 특출하니 |
- | 일에 우리 가문(家門)을 크게 넓힐 희망이 이 아이들에게 있다고 말했다. | + | 후일에 우리 가문(家門)을 크게 넓힐 희망이 이 아이들에게 있다고 말했다. |
- | 로부터 글재주가 날마다 달라져서 명성(名聲)이 크게 떠들석 했으며 학문이 | + | 이로부터 글 재주가 날마다 달라져서 명성(名聲)이 크게 떠들썩 했으며 학문이 |
- | 수한 뒤에 영해(寧海)의 원구(元邱)에 집을 옮겨 사니 영해(寧海)의 선비들이 | + | 성숙한 뒤에 영해(寧海)의 원구(元邱)에 집을 옮겨 사니 영해(寧海)의 선비들이 |
- | 서로 읍(揖)하며 친교(親交)를 맺기를 원하여 장래가 촉망되는 발걸음이었는 | + | 서로 읍(揖)하며 친교(親交)를 맺기를 원하여 장래가 촉망되는 발걸음이었는데 |
- | 데 액운(厄運)을 만나 병이 들어 요절(夭折)했으니 실로 정미년 三월 초三일 | + | 액운(厄運)을 만나 병이 들어 요절(夭折)했으니 실로 정미년 |
- | 이며 세상을 산 것이 겨우 二十二년인데 실적(實蹟)이 영해부지(寧海府誌)에 | + | 세상을 산 것이 겨우 |
- | 실려있다. | + | 실려있다.\\ |
- | 그를 장사 지낼 때에 원근(遠近)에 사는 선비벗들이 다투어 만사(挽詞)와 | + | |
- | 문(祭文)을 지어 그의 죽음을 애도(哀悼)했으니 공이 남들로부터 존모(尊慕)의 | + | \_그를 장숙 지낼 때에 원근(遠近)에 사는 선비 벗들이 다투어 만사(挽詞)와 |
- | 대상이었음이 모두 이러했다. | + | 제문(祭文)을 지어 그의 죽음을 애도(哀悼)했으니 공이 남들로부터 존모(尊慕)의 |
- | 배위(配位)는 무안박씨(務安朴氏)이니 참의(參議)벼슬을 지낸 세순(世淳)의 | + | 대상이었음이 모두 이러했다.\\ |
- | 님이나 아들을 두지 못하여 중형(仲兄)의 아들 중미(中美)를 후사(後嗣)로 삼았고 | + | |
+ | \_배위(配位)는 무안박씨(務安朴氏)이니 참의(參議) 벼슬을 지낸 세순(世淳)의 | ||
+ | 따님이나 아들을 두지 못하여 중형(仲兄)의 아들 중미(中美)를 후사(後嗣)로 삼았고 | ||
딸은 김시상(金是相)에게 출가했으며 묘(墓)는 호전(虎田)에 있는 선대(先代)의 | 딸은 김시상(金是相)에게 출가했으며 묘(墓)는 호전(虎田)에 있는 선대(先代)의 | ||
- | 분영(墳塋) 밑에 공의 묘와 쌍봉(雙封)이다. | + | 분영(墳塋) 밑에 공의 묘와 쌍봉(雙封)이다.\\ |
- | 아! 공이 독실하고 순후(淳厚)한 자질과 특출한 재주로서 만약 세상을 오래 | + | |
- | 살 수 있었다면 크게는 가히 조정(朝廷)에 몸을 담을 영예(榮譽)가 있었을 것이요 | + | \_아! 공이 독실하고 순후(淳厚)한 자질과 특출한 재주로서 만약 세상을 오래 |
- | 작게는 세상의 교회(敎化)를 담당하여 인심(人心)을 선도(善導)했을 것인데 | + | 살 수 있었다면 크게는 가히 조정(朝廷)에 몸을 담을 영예(榮譽)가 있었을 것이요, |
- | 리어 상서(祥瑞)로운 풀과 아름다운 꽃과 같이 아침에 피었다가 저녁에 시든 | + | 작게는 세상의 교회(敎化)를 담당하여 인심(人心)을 선도(善導)했을 것인데 |
- | 것은 무슨 까닭인가. | + | 도리어 상서(祥瑞)로운 풀과 아름다운 꽃과 같이 아침에 피었다가 저녁에 시든 |
- | 옛날에 왕발(王勃)과 이장길(李長吉)은 비록 일찍이 죽은 것이 원통한 일이나 | + | 것은 무슨 까닭인가.\\ |
+ | |||
+ | \_옛날에 왕발(王勃)과 이장길(李長吉)은 비록 일찍이 죽은 것이 원통한 일이나 | ||
왕발이 지은 등왕각(謄王閣) 서문과 이장길이 지은 고헌과(高軒過)라는 글은 | 왕발이 지은 등왕각(謄王閣) 서문과 이장길이 지은 고헌과(高軒過)라는 글은 | ||
- | 널리 세상 사람의 입에 오르내리고 있으니 원한을가히 풀었다 하겠으나 공은 | + | 널리 세상 사람의 입에 오르내리고 있으니 원한을 가히 풀었다 하겠으나 공은 |
- | 작은 글귀하나 책상자에 남은 것이 없어서 구슬같은 글을 감상할 수 없으니 이것이 | + | 작은 글귀 하나 책상자에 남은 것이 없어서 구슬같은 글을 감상할 수 없으니 이것이 |
+ | |||
+ | 또한 거듭 슬픈 일이다.\\ | ||
+ | |||
+ | \_또 후손이 중세(中世)에 쇠체(衰替)하였다가 8세손(八世孫) 교육(敎旭) | ||
+ | 호(號)는 수암(宿巖)에 이르러 효성(孝誠)과 특별한 행검(行檢)이 있어서 | ||
+ | 군수(郡守)가 조정에 포장(褒奬)이 내리도록 장계(狀啓)를 올렸다.\\ | ||
+ | |||
+ | \_아들이 일곱 사람 있으니 규([氵奎])와 기([氵箕])와 벽([氵壁])과 익(瀷)과 진([氵軫])과 용(溶)과 | ||
+ | 찬(澯)이요 10세손(十世孫)인 석영(石英)은 문학(文學)으로 그 가문(家門)의 | ||
+ | 대(代)를 이은 사람이며 중영(中英)과 정영(正英)과 철영(喆英)과 극영(極英)과 | ||
+ | 두영(斗英)과 달영(達英)과 호영(浩英)과 수영(壽英)과 순영(舜英)과 지영(智英)과 | ||
+ | 덕영(德英)과 태영(澤英)은 각 집의 아들이요 12세손(十二世孫) 돈(暾)의 | ||
+ | 아들 재훈(載塤)이 그의 적손(嫡孫)이다.\\ | ||
- | 또한 거듭 슬픈 일이다. | + | \_드디어 명(銘)을 하노니 명(銘)에 가로대 \\ |
- | 또 후손이 중세(中世)에 쇠체(衰替)하였다가 팔세손(八世孫) 교육(敎旭) 호 | + | 柳氏家法이라 |
- | (號)는 수암(宿巖)에 | + | 三棣交輝에 六經是嚼이라 其來有爲러니 其去何倐고 惟虎之原은 |
- | (郡守)가 조정에 포장(褒獎)이 내리도록 장계(狀啓)를 올렸다. | + | 瀧崗之麓이라 焰紫淑氣가 繞封不熄이라 我銘玄石하니 永來百世이라\\ |
- | 아들이 일곱사람 있으니 규(漆)와 기(漢)와 벽(瀅)과 익(瀷)과 진(황)과 용(溶)과 | + | \\ |
- | 찬(涤)이요 십세손(十世孫)인 석영(石英)은 문학(文學)으로 그 가문(家門)의 | + | 敻想黃公은\_ 멀리 생각하오니 황공(黃公)께서는\\ |
- | 대(代)를 | + | 麗鮮嘸族이라 |
- | 영(斗英)과 달영(達英)과 호영(浩英)과 수영(壽英)과 순영(舜英)과 지영(智英) | + | 海爺賢庭이요 |
- | 과 덕영(德英)과 태영(澤英)은 각집의 아들이요 십이세손(十二世孫) 돈(暾)의 | + | 月翁同塾이라 |
- | 아들 재훈(載塤)이 그의 적손(嫡孫)이다. | + | 胡門誾侃은\_ |
- | 드디어 명(銘)을 하노니 명(銘)에 가로대 | + | 柳氏家法이라 |
- | 고려와 조선조(朝鮮朝)에 번성했던 씨족이라. 대해선생(大海先生)의 어진 아 | + | 三棣交輝에\_ |
- | 들로 태어나고 해월공(海月公)과 같은 학당에서 글을 배웠다. | + | 六經是嚼이라 |
- | 호문(胡門)에 화기롭고 강직한 것은 당나라 | + | 其來有爲러니 |
- | 삼형제가 서로 배움에 힘쓰니 육경(六經)의 글을 모두 익혔다. | + | 其去何倐고\_ |
- | 타고난 재질(質)은 세상에 쓰일 것인데 죽음으로 가는 길은 어이 그리 빨랐던 고 | + | 惟虎之原은\_ |
- | 오직 호전(虎田)의 임좌(壬坐) 둔덕은 선대(先代)의 분영(墳塋)이 있는 산록 | + | 瀧崗之麓이라 |
+ | 焰紫淑氣가\_ 붉게 타오르는 맑은 기운이 \\ | ||
+ | 繞封不熄이라 봉분(封墳)을 둘러 싸고 멈추지 않네 \\ | ||
+ | 我銘玄石하니 검은 비(碑) 돌에 내가 명(銘)을 하노니 \\ | ||
+ | 永來百世이라 백세(百世)토록 영원히 전해지리라.\\ | ||
+ | \\ | ||
+ | \_\_한양(漢陽) 조헌기(趙獻基) 삼가 짓다.\\ | ||
+ | \\ | ||
+ | <WRAP subnote> | ||
+ | 주1. 왕발(王勃): | ||
- | 이다. | + | 주2. 이장길(李長吉): 당(唐)나라 |
- | 붉게 타오르는 맑은 기운이 봉분(封墳)을 둘러 싸고 멈추지 않네 검은 비(碑) | + | |
- | 돌에 내가 명(銘)을 하노니 백세(百世)토록 영원히 전해지리라。 | + | |
- | 한양(漢陽) 조헌기(趙獻基) 삼가 짓다. | + | |
- | 註一。王 勃: | + | |
- | 길에 南昌에 들러 都督閻伯嶼를 위하여 지은 滕王閣序는 有名하다. | + | |
- | 二。李長吉: 唐나라 宗室의 人士李賀의 字이며 詩文이 特出하였으나 二十七歲로 夭折했다. | + | |
- | 三。柳北의 家訓: 唐나라 때의 名門의 子孫。小學外篇에 있는 柳氏家訓을 지은 사람。 | + | |
+ | 주3. 유비(柳玭)의 가훈(家訓): | ||
+ | </ | ||
+ | </ | ||
+ | </ |
b-084.1748228920.txt.gz · 마지막으로 수정됨: 2025/05/26 12:08 저자 ssio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