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사황경일묘갈명(處士黃慶一墓碣銘)
처사(處士) 황경일(黃慶一)의 묘갈명
곧 기성(箕城縣의 서쪽 호전(虎田) 임방(壬方)을 등진 둔덕에 봉분(封墳)이
우뚝한 것이 있으니 이것은 처사(處士) 황공(黃公)의 무덤인데 비문(碑文)이
불비하여 평생의 이력(履歷)을 증명할 근거가 없으니 그의 10세손(十世孫)인
정영(正英)이 이것을 두려워하여 여러 종중(宗中)사람에게 물어보고 장차 비석(碑石)을
세우기 위해 비명(碑銘)의 글을 잘못 나에게 책임 지우는 지라.
생각해 보니 내가 나이도 많고 정신도 산만하여 감히 이 일을 감당하지 못할
듯하며 세의(世誼)로 보아서도 글이 짧은 것으로 또한 끝내 사양했으나 할 수 없어서
드디어 노혼(老昏)한 것을 무릅쓰고 서술(敍述)해 말하노니 공(公)의 휘(諱)는
경일(慶一)이요 자(字)는 경원(景元)이며 성(姓)은 황씨(黃氏)이니 그의 선대
(先代)는 중국(中國)사람이다.
학사(學士)인 휘(諱) 낙(洛)이 바다를 건너 동쪽으로 와서 평해(平海)에
정박(定泊)하시니 이 분이 관향(貫鄕)의 시조(始祖)이며 고려(高麗) 때에 휘(諱)
서(瑞)는 익대공신(翊戴功臣)으로서 첨의평리시중(僉議評理侍中)의 벼슬을 하고
문절공(文節公)의 시호(諡號)가 내렸기 때문에 평해현(平海縣)을 군(郡)으로
승호(陞號)하게 되었다.
조선조(朝鮮朝)에 들어와서 휘(諱) 옥숭(玉崇)은 한성판윤(漢城判尹)이라.
이로부터 우리나라의 드러난 문벌(門閥)이 되어 혹은 문학(文學)과 행의(行義)가
독실했고 혹은 높은 관작(官爵)과 과거(科擧)에서 장원(壯元)의 영광(榮光)을
누렸으니, 공에게는 증조(曾祖) 이상 6세(世)이다.
조부(祖父)의 휘(諱)는 우(瑀)이니 성주목사(星州牧使)를 지냈고 아버지의 휘
(諱)는 응청(應淸)이니 효행(孝行)으로 조정(朝廷)에 알려져서 정려(旌閭)가
내려졌으며 선비로서 대부(大夫)의 반열(班列)에 올라 통훈대부(通訓大夫)의
품계로 진보현감(眞寶縣監)의 벼슬이 제수(除授)되었으니 이분이 세칭(世稱)
대해선생(大海先生)이시다.
어머니는 울진장씨(蔚珍張氏)이니 강계부사(江界府使)를 지낸 백손(伯孫)의
아들 한보(漢輔)의 따님이며 명종(明宗) 21(二十一)년(서기 1566(一五六六)) 병인에
정명(正明)의 선제(先第)에서 공(公)을 낳으니 기골(氣骨)이 풍만(豐滿)하고 총명과
식견(識見)이 특출하여 겨우 배움에 나아가서 부터 공부를 보살펴 주지 않아도
문의(文義)를 밝게 풀어나갔으며 8~9(八、九)세 때에 선친(先親)이신
대해공(大海公)이 운(韻)을 부르며 부(賦)를 지으라고 명하시면 공(公)이 운(韻)이 입에서
떨어지자 곧 대구(對句)를 말하였는데 글귀(句)를 짓는 법이 놀랍게 절묘하니
대해공(大海公)이 그 글귀를 조카인 해월공(海月公)에게 내어 보이며 말하기를
이 아이와 너의 아이 중윤(中允)이 모두 같은 또래 중에서 재주가 특출하니
후일에 우리 가문(家門)을 크게 넓힐 희망이 이 아이들에게 있다고 말했다.
이로부터 글 재주가 날마다 달라져서 명성(名聲)이 크게 떠들썩 했으며 학문이
성숙한 뒤에 영해(寧海)의 원구(元邱)에 집을 옮겨 사니 영해(寧海)의 선비들이
서로 읍(揖)하며 친교(親交)를 맺기를 원하여 장래가 촉망되는 발걸음이었는데
액운(厄運)을 만나 병이 들어 요절(夭折)했으니 실로 정미년 3(三)월 초3(三)일이며
세상을 산 것이 겨우 22(二十二)년인데 실적(實蹟)이 영해부지(寧海府誌)에
실려있다.
그를 장숙 지낼 때에 원근(遠近)에 사는 선비 벗들이 다투어 만사(挽詞)와
제문(祭文)을 지어 그의 죽음을 애도(哀悼)했으니 공이 남들로부터 존모(尊慕)의
대상이었음이 모두 이러했다.
배위(配位)는 무안박씨(務安朴氏)이니 참의(參議) 벼슬을 지낸 세순(世淳)의
따님이나 아들을 두지 못하여 중형(仲兄)의 아들 중미(中美)를 후사(後嗣)로 삼았고
딸은 김시상(金是相)에게 출가했으며 묘(墓)는 호전(虎田)에 있는 선대(先代)의
분영(墳塋) 밑에 공의 묘와 쌍봉(雙封)이다.
아! 공이 독실하고 순후(淳厚)한 자질과 특출한 재주로서 만약 세상을 오래
살 수 있었다면 크게는 가히 조정(朝廷)에 몸을 담을 영예(榮譽)가 있었을 것이요,
작게는 세상의 교회(敎化)를 담당하여 인심(人心)을 선도(善導)했을 것인데
도리어 상서(祥瑞)로운 풀과 아름다운 꽃과 같이 아침에 피었다가 저녁에 시든
것은 무슨 까닭인가.
옛날에 왕발(王勃)과 이장길(李長吉)은 비록 일찍이 죽은 것이 원통한 일이나
왕발이 지은 등왕각(謄王閣) 서문과 이장길이 지은 고헌과(高軒過)라는 글은
널리 세상 사람의 입에 오르내리고 있으니 원한을 가히 풀었다 하겠으나 공은
작은 글귀 하나 책상자에 남은 것이 없어서 구슬같은 글을 감상할 수 없으니 이것이
또한 거듭 슬픈 일이다.
또 후손이 중세(中世)에 쇠체(衰替)하였다가 8세손(八世孫) 교육(敎旭)
호(號)는 수암(宿巖)에 이르러 효성(孝誠)과 특별한 행검(行檢)이 있어서
군수(郡守)가 조정에 포장(褒奬)이 내리도록 장계(狀啓)를 올렸다.
아들이 일곱 사람 있으니 규([氵奎])와 기([氵箕])와 벽([氵壁])과 익(瀷)과 진([氵軫])과 용(溶)과
찬(澯)이요 10세손(十世孫)인 석영(石英)은 문학(文學)으로 그 가문(家門)의
대(代)를 이은 사람이며 중영(中英)과 정영(正英)과 철영(喆英)과 극영(極英)과
두영(斗英)과 달영(達英)과 호영(浩英)과 수영(壽英)과 순영(舜英)과 지영(智英)과
덕영(德英)과 태영(澤英)은 각 집의 아들이요 12세손(十二世孫) 돈(暾)의
아들 재훈(載塤)이 그의 적손(嫡孫)이다.
드디어 명(銘)을 하노니 명(銘)에 가로대
柳氏家法이라
三棣交輝에 六經是嚼이라 其來有爲러니 其去何倐고 惟虎之原은
瀧崗之麓이라 焰紫淑氣가 繞封不熄이라 我銘玄石하니 永來百世이라
敻想黃公은 멀리 생각하오니 황공(黃公)께서는
麗鮮嘸族이라 고려와 조선조(朝鮮朝)에 번성했던 씨족이라.
海爺賢庭이요 대해선생(大海先生)의 어진 아들로 태어나고
月翁同塾이라 해월공(海月公)과 같은 학당에서 글을 배웠다.
胡門誾侃은 호문(胡門)에 화기롭고 강직한 것은
柳氏家法이라 당나라 유비(柳玭)의 가훈(家訓)이었다.
三棣交輝에 삼형제가 서로 배움에 힘쓰니
六經是嚼이라 육경(六經)의 글을 모두 익혔다.
其來有爲러니 타고난 재질(才質)은 세상에 쓰일 것인데
其去何倐고 죽음으로 가는 길은 어이 그리 빨랐던고
惟虎之原은 오직 호전(虎田)의 임좌(壬坐) 둔덕은
瀧崗之麓이라 선대(先代)의 분영(墳塋)이 있는 산록이다.
焰紫淑氣가 붉게 타오르는 맑은 기운이
繞封不熄이라 봉분(封墳)을 둘러 싸고 멈추지 않네
我銘玄石하니 검은 비(碑) 돌에 내가 명(銘)을 하노니
永來百世이라 백세(百世)토록 영원히 전해지리라.
한양(漢陽) 조헌기(趙獻基) 삼가 짓다.
주1. 왕발(王勃): 당대(唐代)의 시인(詩人). 자(字)는 자안(子安). 사조(詞藻)가 기록(奇鹿)하여 4걸(四傑)의 한 사람으로 꼽힌다. 교지(交趾)로 가는 길에 남창(南昌)에 들러 도독(都督) 염백서(閻伯嶼)를 위하여 지은 등왕각서(滕王閣序)가 유명(有名)하다.
주2. 이장길(李長吉): 당(唐)나라 종실(宗室)의 인사(人士) 이하(李賀)의 자(字)이며 시문(詩文)이 특출(特出)하였으나 27(二十七)세로 요절(夭折)했다.
주3. 유비(柳玭)의 가훈(家訓): 당(唐)나라 때의 명문(名門)의 자손(子孫). 소학(小學) 외편(外篇)에 있는 유씨가훈(柳氏家訓)을 지은 사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