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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087

선교랑황중헌묘갈명(宣敎郞黃中憲墓碣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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宣敎郞黃中憲墓碣銘
公諱中憲字道凝宣敎郞平海人其先自麗歷代洛顯曰溫仁太子檢校曰裕 中門下侍中曰瑞金紫光祿大夫諡文節公曰宗亮戶部典書入我朝曰有甫 中郞將曰玉崇漢城判官曰瑀星州牧使曰應澄判決事號滄州曰汝一文吏 判號海月享明溪書院即公考也妣貞夫人聞韶金氏吏判璡子龜峯守一女 妣貞夫人完山李氏德原都正樞女以萬歷乙巳六月生公公天姿和平樂易 與物无忤孝友尤篤居家寵睦處事恢泰且以科累入晦述丘园自律躬訓子 爲平生樂業至癸巳四月十八日終于正寢享年四十九是年月日葬于郡北 望洋西洞山向坤原配宜人務安朴氏户判武毅公毅長子縣令瑜女溫淑有 令名有五男曰石來通德郞出爲伯考承旨中允嗣曰石平贈司僕正曰石明 曰石寶護軍曰石齡通德郞二女適權德輿李文胤石平有二男曰塾贈承旨 曰一女生員權大觀石朋有一男㙉无后石寶有三男曰堵曰塧曰墺進士 石岭有一男曰埰二女李瑨趙珖其後閱四五代內外孫男數十餘人皆蘭茁 可大其門戶者而修善於身責拙賴於後盖未艾也余以出後有未參者於
門長珩氏請以誌同錄仍而不揆𠒋敢述其大者次如右銘曰海凋山高妥 茲宅不顯其光有屹斯
  石來出後六代孫致文謹識
  上之三十二年壬辰十月日立七代宗孫錫九五代孫琯瑗琳


선교랑(宣敎浪) 평해황공(平海黃公) 중헌(中憲)의 묘갈명(墓碣銘)
 공(公)의 휘(諱)는 중헌(中憲)이요 자(字)는 도응(道凝)이며 벼슬은 선교랑(宣敎浪)이니 평해인(平海人)이다.
 그의 선대(先代)는 고려 때에 휘(諱) 낙(洛)으로부터 비롯되었으며 현조(顯祖)의 휘(諱)는 온인(溫仁)이니 벼슬은 태자검교(太子檢校)였고 휘(諱) 유중(裕中)은 벼슬이 문하시중(門下侍中)이었고 휘(諱) 서(瑞)는 벼슬이 금자광록대부(金紫光祿大夫)였으며 시호(諡號)는 문절공(文節公)이다.
 휘(諱) 종량(宗亮)은 벼슬이 호부상서(戶部尙書)였으며 조선조(朝鮮朝)에 들어와서 휘(諱) 유보(有甫)는 벼슬이 중랑장(中郞將)이며 휘 옥숭(玉崇)은 벼슬이 한성판윤(漢城判尹)이었고 휘(諱) 우(瑀)는 벼슬이 성주목사(星州牧使)였다. 휘(諱) 응징(應澄)은 벼슬이 판결사(判決事)였으며 호(號)를 창주(滄州)라 했고 휘(諱) 여일(汝一)은 문과급제(文科及第)하여 이조판서(吏曹判書)를 지내고 호(號)는 해월(海月)이며 명계서원(明溪書院)에 제향(祭享)되고 있으니 곧 공(公)의 아버지이시다.
 어머니 정부인(貞夫人)은 의성김씨(義城金氏)로서 이조판서(吏曹判書)를 지낸 진(璡)의 아들이며 호(號)가 구봉(龜峯)인 수일(守一)의 따님이며 또 어머니 정부인(貞夫人)은 완산이씨(完山李氏)로서 덕원군(德原君)이며 도정(都正) 벼슬을 한 추(樞)의 따님이다.
 선조(宣祖) 38(三十八)년 을사(乙巳)(서기 1605(一六〇五)) 6(六)월에 공(公)이 출생하였는데 천품(天稟)이 화평(和平)하고 쾌활하며 온화하며 모든 사물(事物)을 대함에도 법도에 어긋남이 없었으며 효도와 우애(友愛)가 더욱 독실하여 집에 거처할 때에는 가정이 화목하고 일을 처리함에 있어서는 관대히 처리했다.
 또 과업(科業)이 여의(如意)치 못하니 고향에 돌아와 자취를 감추고 스스로 몸을 다스리고 자식을 가르치는 것으로 평생의 즐거운 사업으로 삼았다.
 효종(孝宗) 4(四)년 계사(癸巳)(서기 1653(一六五三)) 4(四)월 18(十八)일에 정침(正寢)에서 세상을 마치니 향년이 49(四十九)세였으며 이 해 월 일에 군(郡)의 북쪽 망양(望洋)의 서동산(西洞山) 곤향(坤向)의 둔덕에 장사지냈다.
 배위(配位)는 의인(宜人)인 무안박씨(務安朴氏)이니 호조판서(戶曹判書)를 지낸 무의공(武毅公) 의(毅)의 장자(長子)로서 현령(縣令)을 지낸 유(瑜)의 따님이며 온순(溫順)하고 정숙(貞淑)하여 명망(名望)이 있었다.
 아들 다섯이 있으니 석래(石來)는 통덕랑(通德郞)인데 백부(伯父)이신 승지공(承旨公) 중윤(中允)의 계자(系子)가 되었고 석평(石平)은 증직(贈職)으로 사복정(司僕正)이었으며 다음은 석봉(石朋)이며 다음은 석보(石寶)이니 호군(護軍)을 지냈으며 다음 석령(石齡)은 통덕랑(通德郞)이었고 두 딸은 권덕여(權德輿)와 이문윤(李文胤)에게 출가했다.
 석평(石平)은 아들 둘이 있으니 숙(熟)은 승지(承旨)에 증직(贈職)되었고 다음은 옥([沃/土])이며 딸은 권대관(權大觀)에게 출가했고 석봉(石朋)의 아들 전(琠)은 후사(後嗣)가 없고 석보(石寶)는 아들 셋을 두었으니 도(堵)와 애(塧)과 오(墺)인데 오(墺)는 진사(進士)를 했으며 석령(石齡)은 아들 하나를 두었으니 채(埰)이며 두 딸은 이진(李瑨)과 조광(趙珖)에게 출가했다.
 그 후로 4~5대를 내려오며 내외손(內外孫)이 수십인(數十人)이나 되는데 모두 지란(芝蘭)같이 자라서 가히 문호(門戶)를 크게 할 사람으로서 자신이 선행(善行)을 닦아 후생(後生)들을 책임지니 대체로 가운(家運)이 끊어지지 않음이라. 내가 출계(出系)하여서 자손록(子孫錄)에 들어가지 못했는데 문장(門長)이신 형(珩)씨가 묘갈명(墓碣銘)을 지으라고 청(請)하므로 글이 거칠고 졸함을 무릅쓰고 감히 대체적인 사실을 기술(記述)하여 오른쪽과 같이 짓는다.

 명(銘)을 말하노니
海凋山高 바다는 넓고 산이 높은 곳에
妥茲幽宅 여기에 유택(幽宅)으로 편안하셨다.
不顯其光 그 어른의 빛은 나타나지 않았으나
有屹斯 이 비석(碑石)이 우뚝하게 서있네.

  출계(出系)한 석래(石來)의 6(大)대손 치문(致文)이 삼가 짓다.
  상감(上監)의 32(三十二)년 임진(壬辰) 10(十)월 일
    세운 사람 7(七)대 종손 석구(錫九)
          5(五)대손 형(珩), 관(琯), 원(瑗), 임(琳)

b-087.txt · 마지막으로 수정됨: 2025/06/02 10:40 저자 ssio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