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월선생신도비명략(海月先生神道碑銘畧)
해월선생(海月先生)의 신도비명(神道碑銘)
광해(光海) 2(二)년(서기 1609(一六〇九)) 경신에 나라에서는 중국(中國)에 잘못
전달된 말을 변명해야 할 대사(大事)가 생겨서 조정의 의논(議論)이 적격(適格)한
사신(使臣)을 결정하기가 어려웠는데 백사(白沙) 이공(李公)을 정사(正使)로
월사(月沙) 이공(李公)을 부사(副使)로 해월(海月) 황공(黃公)을 서장관(書狀官)으로
정한 것은 한 시대(時代)의 무거운 명망(名望)이 모두 이 세 분 선생에게
있었으며 국가의 안위(安危)가 매여 있었기 때문이었다.
황공(黃公)의 휘(諱)는 여일(汝一)이요 자(字)는 회원(會元)이며
평해황씨(平海黃氏)인데 해월(海月)은 그의 호(號)이다.
고려 때에 문절공(文節公)이신 휘(諱) 서(瑞)로부터 세계(世系)가 이어져
조선시대(朝鮮時代)에 한성판윤(漢城判尹)을 지낸 옥숭(玉崇)과 생원(生員)이었던
보곤(輔坤)과 목사(牧使)였던 우(瑀)가 즉 공의 고조(高祖)와 증조(曾祖)와
조부(祖父)이다.
아버지의 휘(諱)는 응징(應澄)이니 장예원(掌隷院)의 판결사(判決事) 벼슬을
했으며 어머니는 영덕정씨(盈德鄭氏)이니 사직(司直) 벼슬을 한 창국(昌國)의
따님이다.
명종(明宗) 11(十一)년(서기 1556(一五五六)) 병진에 공이 출생하여 어려서는
중부(仲父)이신 대해공(大海公)의 가르침을 받았으며 총명(聰明)이 특출하여 14(十四)세에
간성(杆城)에서 실시한 향시(鄕試)에서 장원(壯元)하여 한 절구(絶句) 시(詩)를
죽루(竹樓)에 써 붙이니 부사(府使)였던 양봉래(楊逢萊)주1가 크게 놀라 공을
맞아들여 대화를 했다 하며 구봉(龜峯) 김공(金公)이 인품(人品)을 살리는 감각이
있어서 공을 사위로 삼았으며 화부(花府)에서 실시한 도시(道試)에서 한 편(篇)의
글이 장원(壯元)하였으니 치술령부(鵄述嶺賦)가 이것이다.
선조(宣祖) 9(九)년(서기 1576(一五七六)) 병자에 진사시(進士試)에 합격하여
성균관(成均館)에 있을 때에 오현(五賢)을 문묘(文廟)에 배향(配享)하자는 상소(上疏)를
올리고 평상복(平常服)으로 사인(舍人)주2의 연회(宴會)에 나아가니 한 때
명망(名望)이 크게 높았다.
선조(宣祖) 18(十八)년(서기 1585(一五八五)) 을유에 동당(東堂)에서 책문(策問)에
대책(對策)한 결과 을과(乙科)의 제일인(第一人)으로 뽑혀 검열(檢閱) 벼슬이
제수되었으나 휴가(休暇)를 원하여 양친(兩親)을 뵈옵고 예안(禮安)에 들어가서
퇴계선생(退溪先生)의 유고(遺稿)를 편집하는 일에 가담했으며 11(十一)월에
호당(湖堂)주3에서 독서(讀書)할 수 있는 휴가를 받고 대교(待敎) 벼슬에 올라
상감(上監)의 밤 강연(講莚)에 입시(入侍)했을 때에 선비들 마음에 의심이 있어
이반(離叛)하려하니 유공(柳公) 성룡(成龍)을 불러 중용(重用)해야 한다고 청하니
그 시대의 여론(輿論)에 합당한 말이었다.
일본(日本) 사신(使臣) 현소(玄蘇)가 와서 통신(通信)을 하자고 청할 때에
선정전(宣政殿)에 불려 가서 공이 항언(抗言)하기를 “통신을 해도 난리가 발생하고
통신을 안해도 발생한다면 통신을 안하는 것이 옳지 않을까” 하니 김학봉(金鶴峯)주4이
그 말을 듣고 시(詩)를 지어 주며 칭찬하기를 동해(東海)에 숨은
노중련(魯仲連)주5이라고 했다.
연달아 예문관(藝文館)의 봉교(奉敎) 벼슬이 배명(拜命)되고 운학(韻學) 책을
내리어 날마다 경연(經筵)이 있을 때에 시강(侍講)하라고 명(命)하고 대학(大學)
책을 하사(下賜)했다.
임진왜란(壬辰倭亂)이 일어나서 상감(上監)의 수레가 서쪽으로 향하고 서울이
함락되었을 때에 공은 그 때에 고산(高山)에 있었으나 길이 막혀 상감의 수레를
호종(扈從)할 수 없었으며 김공(金公) 귀영(貴榮)이 왕자(王子)를 모시고
안변(安邊)에 이르렀을 때에 길을 달려 따라갔는데 절도사(節度使)인 윤공(尹公)
탁연(卓然)이 공이 장래를 내다보는 식견(識見)이 있음을 알고 불러서
종사(從事)케 했다.
마침 국경인(鞠景仁)주151)이 왕자(王子)를 붙잡고
적(賊)에게 투항(投降)하니
진대유(陳大猷)가 여자를 미끼로 적을 꾀어 들판에 불을 놓아서 가로막지 못하게
했을 때에 공이 그 기회를 따라 계책을 세워 신세준(申世俊)과 김수준(金秀俊)을
시켜 차례로 섬멸(殲滅)하고 생포(生捕)하니 윤공(尹公)이 더욱 소중히 생각했다.
선조(宣祖) 26(二十六)년(서기 1592(一五九二)) 계사에 의주(義州)의 행재소(行在所)주6에
도착하여 병조정랑(兵曹正郞)을 배수(拜受)하고 10(十)월에 상감의 수레를 모시고
도성(都城)에 돌아오니 독운사(督運使)인 권율(權慄) 원수(元帥)가 병영(兵營)에
일이 급하다고 장계(狀啓)를 올려 문무관(文武官) 전부에도 황(黃)아모 아니면
안 된다고 하며 불러서 종사관(從事官)이 되어 진주부(晋州府)를 열게 하고
이충무공(李忠武公)과 더불어 왕래하며 상의하여 전공(戰功)을 크게 하였는데 이
일이 이충무공(李忠武公)의 실기(實記)에 실려 있다.
선조(宣祖) 29(二十九)년(서기 1596(一五九六)) 병신에 세자시강원(世子侍講院)의
사어(司禦) 벼슬이 제수되었다가 다시 권율(權慄) 원수(元帥)의 종사관(從事官)으로
뽑혔으며 선조(宣祖) 30(三十)년(서기 1598(一五九八)) 정유에 승문원(承文院)의
교리(校理)를 배명 받았는데 그 때에 정응태(丁應泰)가 나라를 속이는 사건이 있어서
온 조정이 놀라고 두려워하여 조정에서 명망(名望)이 있는 사람을 급히 가려
뽑혔는데 공과 상사(上使)와 부사(副使)가 밤낮으로 길을 재촉하여 명나라
도성(都城)에 도착하여 기해년 4(四)월에 돌아와 복명(復命)했다.
가을에 예천군수(醴泉郡守)로 제수되었을 때에 경상감사(慶尙監司)인 이시발(李時發)이
공과 약속하고 안동부사(安東府使) 모당(慕堂) 홍공(洪公)의 설연(設宴)에
함께 참석하여 사마방회도첩(司馬榜會圖帖)주7을 만들었다.
여름에 열성조(列聖朝)의 실록(實錄)을 닦는 실록청(實錄廳)으로 벼슬이 옮겼을
때에 명나라 사신(使臣) 주지번(朱之蕃)이 와서 당대(當代)의 문사(文士)를 가려
뽑으라고 명하여 함께 한강에서 선유(船遊)를 하였는데 공이 거기에 참석했다.
중학교수(中學校授)로써 시험감독관(試驗監督官)에 뽑히고 또 동당(東堂)과
복시(覆試)주8의 시관(試官)으로 뽑혔으며 얼마 안 되어 영천군수(永川郡守)로
제수되어 임고서원(臨皐書院)에서 포은선생문집(圃隱先生文集)을 교정(校正)했다.
7(七)월에는 선무원종이등공신(宣武原從二等功臣)으로 녹선(錄選)되고
철권(鐵券)주9을 받았다.
선조(宣祖) 41(四十一)(서기 1608(一六〇八)) 무신에 선조대왕(宣祖大王)이 돌아가시니
곧 사직서를 올리고 돌아왔는데 연달아 부모상(父母喪)을 당하여 삼년을
여묘(廬墓)살이를 했다.
광해(光海) 4(四)년(서기 1612(一六一二)) 임자에 창원부사(昌原府使)로 제수되었는데
계축년에 벼슬을 버리고 돌아와서 춘추(春秋)주10와 주역(周易)의 연의(演義)주11를 지었다.
광해 7(七)년(서기 1615(一六一五)) 을묘에 동래부사(東萊府使)를 배명받고 백성의
노고(勞苦)를 위로하는 일을 게을리 하지 않았으며 부고(府庫)의 곡물을 나누어
주며 과농(課農)에 힘쓰도록 권했다.
그 때에 조정에서는 당쟁(黨爭)으로 분열(分裂)되어 귀양가는 사람이 잇따라
뒤를 이으므로 사직서(辭職書)를 올리니 동래(東萊) 백성들이 1(一)년만 더
유임(留任)해 주기를 원했었다.
9(九)월에 공조참의(工曹參議)의 벼슬에 부임하기를 재촉했으나 나아가지 않으니
대신(大臣)들이 영남(嶺南)을 다스리는 벼슬에 추천하려 하였으나 더욱 시골에
숨어 세상에 나오지 않으니 그 당시 사람들이 위대(偉大)한 사람이라고 논평했다.
광해(光海) 14(十四)년(서기 1622(一六二二)) 임술에 침소(寢所)에서 세상을 마치니
조정에서 부음(訃音)을 듣고 이조참판(吏曹參判) 겸 홍문관(弘文館)
예문관(藝文館)의 대제학(大提學)의 증직(贈職)을 내렸으며 군(郡)의 서쪽
오대(五台)에 있는 간방(艮方)을 등진 둔덕에 장사지냈다.
배위(配位)는 의성김씨(義城金氏)이니 찰방(察訪)을 지낸 수일(守一)의 따님이며
계배(繼配)는 완산이씨(完山李氏)이니 덕원군(德原君) 추(樞)의 따님이다.
공에게는 아들 여덟이 있으니 맏이는 중윤(中允)이니 벼슬은 승지(承旨)였으며
다음은 중직(中直)과 중민(中敏)과 중헌(中憲)과 중순(中順)과 중경(中敬)과
중원(中遠)과 중량(中亮)이니 모두 음사(蔭仕)로 낭관(郞官)을 지냈으며 손자와
증손 이하는 모두 기록하지 않는다.
공은 타고난 천성으로 재질(才質)이 특출하고 마음에 품은 회포(懷抱)가 넓어
뛰어나고 바른 기량(器量)과 넓고 먼 식견(識見)과 하해(河海)같이 헤아릴 수
없는 문장(文章)은 혼후(渾厚)하여 전혀 세속(世俗)의 티를 살릴 수 없었는데
세상이 어지러운 때를 만나서 비록 임금 앞에서 경서(經書)를 강론(講論)하는
자리에 오래 머물지는 못했으나 군막(軍幕)을 분주하게 다니며 나라를 위해
죽음을 무릅썼으며 황제(皇帝)의 덕화(德化)를 바르게 낱낱이 진술하여 마침내
나라의 기반(基盤)을 다시 안정(安定)되게 하고 잘못 전달된 나라의 억울한
사정을 통쾌하게 씻은 것이 이게 공이 행한 이력(履歷)의 대략이다.
사림(士林)에서 명계서원(明溪書院)에 제향(祭享)하고 있으며 문집(文集) 일곱
권(券)이 세상에 간행되었다.
아! 공과 나의 선조(先祖) 백사공(白沙公)께서는 같은 해 같은 달에 출생하셨는데
백사선생(白沙先生)이 6(六)일 먼저 출생했으나 졸년(卒年)은 공보다 4(四)년
후이다.
여러 현인(賢人)들이 차례로 영락(零落)해지고 시사(時事)도 벌써 정도(正道)에
어그러졌는데 오직 공이 홀로 고향에 묻혀졌는데 오직 공이 홀로 고향에 묻혀
살았으니 그 지조(志操)와 절의(節義)는 설방(薛方)이 소유(巢由)주12를 본받은 것을
따른 것이며 주역(周易)에서 이른바 '내가 살아서 진퇴(進退)하는 것을 보라'는
말인 것이다.
나 유원(裕元)이 감히 한 말을 아껴서 선대(先代)부터 내려오는 세의(世誼)를
저버릴 수 있겠는가. 드디어 그 명(銘)을 하노니 명(銘)을 말하기를
粤穆陵朝 옛날 선조(宣祖)가 다스린 조정에
有臣海月 해월공(海月公)이란 신하(臣下)가 있었도다.
以箕城黃 평해(平海)를 관향으로 하는 황씨(黃氏)로서
爲國名閥 우리나라의 이름난 문벌(門閥)이었다.
夙著聞望 일찍이 명망(名望)이 널리 알려져
早齡軔發 젊은 나이에 벌써 벼슬에 올랐다.
蘭臺薦峻 난대(蘭臺)에서 공(公)을 높이 추천하여
湖堂讀屹 호당(湖堂)에 휴가 얻어 소리 높이 읽었다.
往在龍蛇 그 옛날 임진년의 왜란(倭亂)때에는
國步脆脆 나라의 운명이 위태로웠다.
王巡于西 왕(王)의 수레 서쪽으로 피난을 가니
宗社一髮 종묘사직(宗廟社稷)이 한 순간 위태로웠다.
握籌佐幕 계략을 짜내어 군막(軍幕)을 도우며
策馬奔闕 말을 달려 4(四)방으로 분주하였다.
開諭民黎 어려운 백성들의 살 길을 열어주고
紀律士卒 사졸(士卒)의 기율(紀律)을 바로잡았다.
竟致恢復 마침내 난리가 회복되어도
有功不伐 공로(功勞)가 있음에도 자랑하지 않았다.
邦誣是雪 나라의 억울한 사정 씻으려 하여
王命若曰 왕명(王命)을 받은 것이 이러하였다.
迺隨北槎 그리하여 북쪽 배를 따라 타고서
夾贊心竭 심력(心力)을 다하여 일을 도왔다.
晩登水部 늦게야 수부(水部)주13의 벼슬에 오르니
士流嗟咄 선비들은 차탄(嵯嘆)하며 혀를 찼었다.
公獨夷然 그래도 공은 홀로 태연했으며
樂哉溟渤 큰바다 고기처럼 즐거웠도다.
築臺種菊 대(臺)를 쌓아 놓고 대나무 심으니
淸風林𣜀 숲 그늘에 부는 바람 맑기도 하다.
軒駟莫搖 고관(高官)의 수레에도 동요되지 않았는데
簧蜩詎訏 매미의 울음이 어찌 들추어 내겠는가.
巖巖之氣 바위처럼 우뚝한 그 기상(氣像)을
瞻彼砊硉 잔 돌이 구르는데서 보겠도다.
叔度汪若 숙도(叔度)와 왕약(汪若)과 같은 무리는
庭堅放厥 고요(皐陶)가 있었다면 내치었으리
詩豪士椎 시(詩)는 호사(豪士)를 치는 방망이였고
書大夫笏 글은 대부(大夫)들의 행동의 홀(笏)이었다.
名碩推重 이름난 석학들이 추증(推重)했는데
邱樊泊歇 산촌(山村)에 머물며 쉬고 있었다.
旣忠且哲 나라에 충성하고 명철(明哲)했으며
節完身歿 절의(節義)는 완전하나 몸은 죽었네.
肖孫講世 초손(肖孫)은 나와는 세의(世誼)가 있는 사람
達銘來謁 나를 찾아와서 비명(碑銘)을 청하므로
銘詩載詠 비명(碑銘)의 시를 읊어 돌에 실으니
歸然一碣 신도비(神道碑) 한 돌이 우뚝하도다.
귤상(橘相) 이유원(李裕元) 짓다.
주1. 양봉래(楊蓬萊): 양사언(楊士彦)의 호(號). 명종(明宗) 때에 문과급제(文科及第)하여 외직(外職)을 두루 거쳤으며 금강산(金剛山) 만폭동(萬瀑洞)에 봉래풍악(蓬萊楓岳)이란 글씨가 남아있고 '태산(泰山)이 높다 하되 하늘 아래 뫼이로다'의 시조(時調)로 유명하다.
주2. 사인(舍人): 조선(朝鮮) 때에 의정부(議政府)의 정4품(正四品) 벼슬
주3. 호당(湖堂): 조선(朝鮮) 때에 독서당(讀書堂)의 딴 이름. 문관(文官) 중(中)에 특(特)히 문학(文學)에 뛰어난 사람에게 후가(休暇)를 주어 오로지 학업(學業)을 닦게 한 서재(書齋)
주4. 김학봉(金鶴峯): 김성일(金誠一)의 호(號). 선조(宣祖) 때에 문과급제(文科及第)하여 정언(正言), 장금부제학(掌今副提學), 목사(牧使)를 거쳐 경상도관찰사(慶尙道觀察使)를 역임하고 임진왜란(壬辰倭亂)에 위훈(偉勳)을 세워 선무1등공신(宣武一等功臣)에 오르고 이판(吏判)에 추증(追贈). 안동(安東)의 호계서원(虎溪書院)에 제향됨.
주5. 노중련(魯仲連): 중국(中國) 전국시대(戰國時代) 제(齊)나라 사람. 고답적(高蹈的)인 선비로서 벼슬하지 않고 동해상(東海上)에 숨어 살았다 함.
주6. 행재소(行在所): 임금이 순행(巡行) 증 임시 머무는 곳. 행궁(行宮).
주7. 사마방회도(司馬榜會圖): 안동부사(安東府使)인 모당(慕堂) 홍이상(洪履祥) 외(外) 14인(十四人)이 계유사마방회첩(癸酉司馬榜會帖)을 만들어 경상감사(慶尙監司) 이시발(李時發)이 서문(序文)을 지은 도첩(圖帖).
주8. 복시(覆試): 초시(初試)에 합격(合格)한 사람이 다시 보던 과거(科擧).
주9. 철권(鐵券): 공신(功臣)을 봉(封)할 때 주던 부신(符信). 표면(表面)에 금문자(金文字)로 공적(功績)을 새기고 반을 갈라 왼쪽 것은 공신(功臣)에게 주고 오른쪽 것은 내부(內府)에 간직했다.
주10. 춘추(春秋): 5경(五經)의 하나. 노(魯)의 은공(隱公)에서 애공(哀公)까지 242년간(二四二年間)의 사적(事跡)을 노(魯)의 사관(史官)이 편년체(編年体)로 기록(記錄)한 것을 공자(孔子)가 필삭(筆削)한 역사(歷史) 책.
주11. 연의(演義): 도리와 사실(事實)을 자세히 설명(說明)함.
주12. 소유(巢由): 소부(巢父)와 허유(許由)를 말하며 둘 다 요(堯) 임금 때의 고사(高士)였다.
주13. 난대(蘭臺): 상방(上券)의 일을 맡아보던 벼슬.
주14. 수부(水部): 관명(官名)으로 상서(尙書)에 수부랑(水部郞)을 두었다.(중국(中國)).
주15. 국경인(鞠景仁): 임란(壬亂) 당시 회령(會寧) 현리(縣吏)로서 그곳에 피란(避亂) 중(中)인 왕자(王子)를 잡아 왜군(倭軍)에 바치고 현령(縣令)이 된 사람 </wrap> </typ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