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수재황영국행장략(特秀齋黃永國行狀畧)
특수재 황영국 행장략
공의 성은 황(黃)이요 휘는 영국(永國)이오 자는 숙좌(叔佐)라, 호를 가정에서
명한 바로는 혜사(蕙史)였더니
의암 유인석(柳麟錫)1) 선생께서
명한 바 특수재(特秀齋)라. 선계의 본관은 평해라. 황씨(黃氏)는 신라 때로부터
동방에 들어난 사족으로서 누누세세 존망을 받아왔으며 고려 충렬조에
휘 용(𤨭) 어른은 관이 삼중대광보국 시호가 충경(忠敬)이니
일인지하 만민지상이라, 이조 초에 휘 희석(希碩) 어른은 개국원훈으로
봉 평해군하야 시호가 양무(襄武)오 즉 공의 19대조니라.
18대조의 휘는 인(麟) 예조판서요, 17대조의 휘는 치조(致祖) 공조참의요,
16대조의 휘는 길원(吉源) 선공감정이요, 15대조의 휘는 곤(坤)이신데 예조참의요,
조의 휘는 기언(基彦)이고, 조비는 진사 선산 김창수(金昌洙)의 따님이시온데
붕성지통하야 절사하심에 종부지절의 소풍이 나라에 까지 전파되니
정려를 내림이라. 선고의 휘는 교진(敎鎭)이시니 통사랑 선공감 가감역이오,
선비는 남양 홍관섭(洪寬燮)의 따님이다.
고종(高宗) 을축(乙丑)(1864) 4월 25일
유(酉)시에 춘천 반송 구댁에서 공을 생하시니, 자질과 기품이 단숙하며 지조가 고결터니,
생후 8삭에 걸음을 디디고 10삭에 이르러 뛰어다님이 능하며,
돐이 다가옴에 말을 듣고 함이 서툼이 없으며, 3세를 당하여는 크고 작음은 물론 장유지서며 효도와 우애를 능히 분변하니 실로 천성이 본이로다.
5~6세에 글공부에 들어가니 총명하고 지혜로우며 또는 깨우침에 빼어나
가히 신동이라 아니 할 수 없다. 잠시도 형들의 곁을 떠남이 없고,
또는 언제나 글 친구들과 서로 놀며 동유를 사귐에 있어서는
서로이 실례됨이 없으며, 동문 학도들과 절대 다투거나 난잡함이 없으니,
이와 같음은 지각이 있음이라. 글 공부에 부지런하며 벗들과 돈독하니
부형들께서 기특히 여길 뿐 더러 종족 또는 원근의 모두가 칭찬이었고,
어려서부터 장년에 이르도록 주막이 측근이나 드나들지 아니하고,
시장이 불원이나 구경함이 없나니, 말미암아 고로 인근 향리 노유의 찬양에
들램이오, 가정에 있음에도 종아리를 맞음에도 마음 상하여 흩어짐이 없음에,
그럼으로 부모를 섬김에 예절인 즉 새벽 어둠에 게으르지 않고
심신의 지극한 정성과 효도였으니, 거상을 당함에 6년 시묘에 질대를
벗지 않으며 말을 삼가 묻지 않으며, 기제를 당함에
삼일 재계함이 선세의 추원에 깊은 효이며 또는 즐거움을 즐기는 바,
사당을 매 새벽 알묘인 즉 80여세토록 궐한 바 없음이라.
가정을 다스림에 근면검소함을 주로 사치를 경계나, 용처인 즉 비록 과다나 아끼지 않으며, 남용 즉 비록 극소나 허치 않음이라, 혹은 종족의 혼상사에는 마땅한 양의 부조를 하며, 만약 이웃집 기제 있어 그의 능한 바 없는 이는
되쌀을 반드시 주었으며, 상을 당함에 장을 치름이 궁하면 반드시
말쌀로써 부조함이라. 또는 관혼상제가 있음인 즉 대체로 세전예를 받음이나
혹 개정도 있음이라.
학문을 수업인 즉 일찍이 가정 훈학지도로 효를 이으며
능참봉의 서사였든 바, 세상이 더불어 뒤바뀜에 시작이 늦어짐을 돌이킬 수는 없으나,
사문 성리학에 굳은 결심으로 을사(乙巳)년 봄 남면(南面) 가정리의
의암 유인석(柳麟錫)선생을 뵙고 수업을 청하였으니 공은 이미 41세요,
장석의 누년을 배알이나 수업의 시작이 늦어 자탄함은 경서를 깨우침에
늦었도다 함이라. 그후 선생께서 서책 잠개문과 더불어 호를 명하심이 특수재라,
가로되 네가 반송에 사는 즉, 네의 지절이 솔과 같음이 특별히 빼어남에
원인이 있음이라 하시고, 나아가 절을 올리고 분변을 들음이라.
그후 몇 해 안되어 선생은 바다를 건너니 따름이 못되어 독신으로 산곡 방에 살며
검소히 무릎 꿇고 앉아 오직
육경지문(六經之文)2),
송문지서(宋文之書) 즉 송나라의 글과,
화·중·성·의(華重省毅)3) 4선생의 글로 종사함이라. 본성을 곧게 하나로 참고 또 참는 마음을 정성을 다하여야
할 것이며, 선세를 이어 효우지도를 다할 것이며, 종족 간에는 돈목과 후의로 편안함이 있어야 하며, 거동에 있어는 용모와 행신에 예도를 지켜야 하며, 엄함에 있어서는 화목과 훈교로서 자세한 기술을 가르침이 있어야 함이라, 가정이 번거롭지 않으며 외롭지도 아니함에, 드디어 훈계로서 역시 많은 후학을 진출시켰다.
을유(乙酉) 8월 1일 인시(寅時)에 천명을 마치니 향년이 81이요,
우금토록 수심함이나 하루도 끊임없이 일찍 세수하고 머리 빗어 관을 정제하고,
요대 단정하여 안상을 대하여 꿇어앉아 예경에 깊이 잠김이었노라.
이 모두는 공의 호학의 지성이오 노후에 이르러 더욱 돈독을 더함이라.
공의 행적이 이러 하오니 어떠하리까? 나는 크나큰 깨달음이 많아 어진 마음으로
도움의 깊은 인연이 있음이요, 또는 겸하여 후하신 의리로 가르침을 얻음이요.
불원천리로 내방, 공의 행장을 맞기니, 슬프도다! 공이 가시고 아니 계시니
정사가 거칠고 서늘하노라. 그의 장남 성근(誠根)이 성묘를 함에
눈·콧물이 옷깃을 적시니 무릇 금세기 사람이런가 하노라. 누가 나의 마음
상함을 알리오. 감히 적은 정성이나 다하여 공의 행장으로써 기술함이나
가히 다 기록하지 못하노라.
경기도 부평군 동문 제 이철의(李哲儀) 근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