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간황봉규묘갈략(東澗黃奉奎墓碣略)
동간 황봉규 묘갈략
공의 휘는 봉규(奉奎)요 자는 양언(良彦)이오 호는 동간(東澗)이니, 동해 상에 순수독실한 덕행을 닦는 선비라. 순조(純祖) 임오(壬午)(1822)년에 생이오,
병술(丙戌)에 졸하니, 향년이 66이라. 그 선계는 평해이니,
여조에 유휘 용(𤨭) 삼중대광 시호를 충경(忠敬),
아조에 유휘 천상(天祥)이
니 문하찬성사요, 10세를 지나서 유휘 연(衍)하니 동몽교관은 공의 8대조라,
선고의 휘는 경하(景河)니 가선이요, 선비는 평해 손윤욱(孫允郁)의 여로
부덕이 높아 향리의 칭송이 자자하였다.
공이 어릴 때부터 영민하여 5세에 입학하고, 8세에 대학을 배워
격물치지(格物致知)의 뜻을 능히 해독했으며, 장성함에 지기 고상하여
과거 공부를 버리고 오직 학문에 힘쓰되, 신의(信義) 외에
영리를 부당하게 구하는 마음은 심중에 싹트지 못하게 노력하며,
오로지 부모에게 효도하고 형제간에 우애하며, 몸가짐을 빈 것 같이 하여
사람을 접함에 반드시 겸손하고 공손하였다.
그러나 의(義)와 이(利)를 분변하고 시(是)와 비(非)를 밝힐 때는,
끊는 듯이 연이한 판단으로 추상같은 기상이어서 감히 복종치 않은 이 없었다.
국상을 당해서는 주육을 먹고 마시지 않았고, 양친의 상사와 제사시에는
일체 가례를 준수하여 불소발 불탈질 즉 머리를 빗질 않고,
항상 상복을 입고 3년상을 다 치룬 후에도 매월 삭망에는 성묘를 하되
풍우에도 폐하는 일이 없음으로 향당에서 모두 효자지문에 효자가 났다고
칭송하더라.
기묘(己卯)에 통정에 가자하니 드디어 동파 상에 당을 짓고
동간(東澗)이라 편액,을 걸고 구학임천에 소요하여
스스로 경사를 즐기며 후진들을 교훈하며 깨우쳐 주는 것을
자기의 책임으로 생각하고, 또 일찍이 말하기를 선비로 나서
불능(不能) 주즙대천(舟楫大川) 보불황유(黼黻皇猷),
즉 큰 재능이 있어 큰 사업을 하거나 제왕을 도와 위관충군 못할 바에야
후진을 개도하여 성현의 도에 따라가게 하는 것이 나의 뜻이라 하고,
또 사기를 읽을 때 간당들이 나라를 그르치고 어진 사람을 죽이고
착한 사람들이 지위를 잃고 축출되는 대문을
볼 때는, 주먹을 치고 한숨을 지고하니 그 기절의 고상함이 이 같으며,
자기 개인의 험난과 곤궁은 조금도 근심하지 않을 뿐 아니라
남이 그런 것을 알아주기를 원치 않으며, 오직 권고하며 묵묵히 덕을 심는데만
힘을 쓰니 마땅히 자손이 번창하리로다.
이로 가히 명하노라. 명(銘)왈
孝統百行 효도한 백가지 행실의 근본인데,
公有承受 공이 효의 도를 이어 받았도다.
立志惟早 그 뜻을 세우는데 일찍 깨달았으며,
確乎其守 또한 그것을 지키는데 확고하였도다.
硏窮經史 경전과 사기를 연구하고 실천하여,
翱翔邱園 구원(邱園)에서 진리를 깨달았도다.
樹德于躬 덕을 심고 몸소 행하여 세상에 보이니,
用裕後昆 닦은 덕이 후손에게 넉넉히 끼치리로다.
斵刻斯石 이 돌을 깍아서 명을 새기니,
實昭無窮 행실이 밝게 함이 무궁하도다.
孰不瞻敬 누가 존경하고 우러러 보지 않으리오,
秉彝攸同 인생의 윤리의 근원인 오륜을 그대로 지켰도다.
통훈대부 함열현감 덕은 송주헌(宋胄憲) 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