판서유정제단비기사(判書有定祭壇碑記事)
판서 유정 제단비 기사
아! 이는 작고한 공조판서(工曹判書) 황공 휘 유정(有定)의 제단비(祭壇碑)이다.
단의 위에는 하나의 큰 무덤이 있고 그 봉분 위쪽으로 몇 발짝쯤에 조그마한 무덤 하나가
있는데 대대로 전하기를 공의 묘는 영주(榮州)군 동쪽 20(二十)리 애동(艾洞) 을좌원(乙坐原)에
있고 공의 맏아들인 지평공(持平公) 전(銓)의 묘는 그 위에 있다고 하였다. 애동은 한편으로
이름하기를 황분현(黃墳峴)이라고도 하니 이는 대개 공의 묘가 있어서 그렇게 불리워진 것이다.
이제 그 동네의 호칭과 묘소의 모습이 완연히 서로 부합이 되고 있으니 생각컨데 큰 무덤은
공의 묘이고 작은 무덤은 지평공의 무덤일 것이다. 그러나 증거가 될 만한 비갈이 없다.
작은 무덤 위에 또 쌍분이 있는데 이는 외후손 무덤인데 어떤 사람이 의심하기를 원래
비갈이 있었을 텐데 누가 뽑아간 것 같다고 한다.
아! 슬프도다. 너무나 오래된 옛날 일이어서 지금 어떻게 상고 할 수 있으리오.
삼가 상고하건대 공은 평해인이요 고려 태자검교(太子檢校)로 있던 휘 온인(溫仁)이
시조이다. 조부의 휘는 원로(原老)이니 과거에 올라 영해부사가 되었고 부친의 휘는
근(瑾) 이니 급제하여 직제학(直提學)이 되었다. 공은 원(元)나라 지정(至正) 3(三)년 계미년(1343년(一三四三年))생이다. 문과에 합격하여 내직과 외직의 벼슬을 두루 역임하여 한성부윤(漢城府尹)과 예조·형조의 판서가 되었다. 어려서부터 노년에 이를 때까지 논어 일부를 애독하여 세상에서 그를 미균(米囷)이라 칭했고 시문을 지음에 당나라 풍조가 있다고 했다.
공의 족손(族孫) 해월공(海月公) 여일(汝一)이 옛날에 들었던 것을 수습 정리하여 간략히
기술한 것이 있다. 그러나 공이 이전 고려 말기에 과거에 올라 전서(典書)에 이르렀고,
일의 업적과 지은 문장이 틀림없이 후세에 남길 만한 것이 있을 터이나, 여러 차례 병화(兵火)를 겪어서 집안의 세계(世系)를 적은 것이 남아 있는 것이 없다. 고려말에서 조선조
초기에 과거에 급제하였다 하나 분명하지 않고 세상에 전하는 남은 글은 다만 7언(七言)시 일절
뿐이다. (시가 고증편에 나와 있다)
아! 애석하구나, 공이 처음 영천(지금 영주)에서 살았는데 자손들이 집을 풍기로 옮겨
살았다. 공이 이미 조선왕조에서 뚜렷한 벼슬을 했고 맏아들 전(銓)이 학행이 뛰어나 천거되어 지평이 되었다. 둘째 아들 현(鉉)은 문과에 올라 좨주(祭酒)였고 막내 아들 연(鋏)은
생원에 합격 관이 훈도(訓導)였다. 손자와 증손 이하로 과거에 오르고 벼슬한 이가 십여명이나 된다. 금계선생(錦溪先生) 황공 주량(俊良)은 공의 자손이다. 이조 판서 김공 담(淡)은
공의 외손이다. 내외(內外)후손들이 풍기와 영주 두 고을에 퍼져 살고 있는데 세대가 이미
오래 되어서 무덤을 명확하게 알 수 없으니 어찌 깊이 통탄하지 않겠는가!
공의 9(九)세손 한천(寒泉)공 중연(中衍)이 공을 위해서 선영도(先塋圖 : 선조들의 무덤 위치도)를 만들기를 앞에서 말한 대로 만들었는데 옛날 노인들이 서로 전하기를 이와 같다고
했다. 그러나 어떤 묘인지를 확실히 지적 할 수 없다고 했다. 지금 한천공까지의 세대가
또 이백년이 가까이 되었으니, 누가 뒤를 이어서 의아한 바를 확실히 단정하여 말할 수
있겠는가! 현재의 세종 임금 육년째 되는 갑진년(1424년(一四二四年)) 윤삼월(潤三月)에 후손 여러 사람이 여러 대 선인들이 남긴 뜻을 받들어 외후손 몇몇 사람들과 더불어 사람을 시켜
공의 무덤이라고 여겨지는 큰 봉분을 파서 징험을 해보기 위해 무덤을 빙 둘러서 그 사방을 둘러 웅덩이를 파고 그 봉분을 흩어 보니 그 평평한 광중(壙中)안에 이르러서도 한조각의 지석(誌石)도 얻지 못했다. 여러 자손들이 서로 울면서 말하기를
아! 슬프도다. 무덤을 높고 크게 분(墳)을 만들었는 걸 보아 품계가 사서인(士庶人)의
무덤은 아님이 틀림없는데 밭가는 농부와 나무하는 아이들과 또 입 있는 이 들이 모두
「황분」이라고 일컫고 있으니 정히 이른바 입에서 입으로 전해져 오고 있는데 어찌 당초에
지석(誌石)을 묻지 않았던가? 우리들의 정성이 얕아서 지석이 있었는데도 그것을 찾지
못했음인가? 그러나 오래된 무덤을 발굴해서 완전히 깨트릴 수는 없었다. 여기에서
지나치면 차마 슬픔이 없을 수 있겠는가! 그리하여 지석 찾는 역사(役事)를 중지하고 다시
묘의 봉분을 봉(封)하고 단을 쌓아서 신위(神位)를 설치하고 정성껏 제사를 지내서 백세의
사모하는 마음을 두게 할 따름이다. 진실로 조상이 옆에 계신 것 같이 여기는 정성을 다한다면 이 땅 속에 있는 영혼(精靈)이 성하게 위에 계실 것이다. 하물며 이 무덤이 우리 선조의 묘소라는 것을 비록 단적으로 증거를 조사하여 증거 할 만한 단서는 댈 수 없겠으나
옛날 문적을 상고하건대 다만 무덤이 이 산 가운데 있을 것이니 단을 설치하여 받들기를
경건히 하는 것이 어찌 의(義)를 일으키는 일이 아니겠는가? 마침내 계단 아래 단을 쌓고
제물을 갖추어 올리고 정부인(貞夫人) 봉화정씨(奉化鄭氏)를 부(祔) 하고 지평공을 그 아래
함께 모시어 제사를 지내고 또 여러 자손이 차례로 서서 행사를 예(禮)로서 하게 했다.
이미 이렇게 일을 마치자 또 서로 말하기를 지금 이후로 해마다 제사를 한 차례씩 올리는 것은 예의에 마땅한 것이다 라고 하고 불가불 돌을 세워 그 유래를 기록해야 한다고
했다. 15(一五)년이 지난 기미년(1919(一九一九)) 여름에 돌을 깎아서 곧 글을 새기게 됨에 나 김약련(金若鍊)에게 음기(陰記)를 지을 것을 위촉 해왔다.
나는 이조판서 김공의 후손으로서 또한 일찍이 묘소를 파서 징험을 하고 단소(壇所)를
구축하는 의논에 참여해 들은 적이 있었으니 이제 이번 제단비 설립 역사(役事)에 어찌 내
문장이 짧다고 하여 감히 사양할 수 있으리오.
드디어 간략하게 일의 시종(始終)을 이와 같이 쓰는 바이다.
외 후손 좌부승지 선성(宣城) 김약연(金若鍊) 삼가 짓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