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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086 [2025/05/30 20:54] ssio2b-086 [2025/06/07 07:07] (현재) ssio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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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동명선생묘갈명략(東溟先生墓碣銘略)=== ===동명선생묘갈명략(東溟先生墓碣銘略)===
 <WRAP 37em justify><hidden \_한문 원문 보기> <WRAP 37em justify><hidden \_한문 원문 보기>
-<typo ff:'한양해서'; fs:1.2em>+<typo ff:'한양해서'; fs:1.2em; lh:1.5em>
 \_**東溟先生墓碣銘略**\\ \_**東溟先生墓碣銘略**\\
 公諱中允字道光號東溟姓黃氏海月先生諱汝一之子也大父應澄號滄洲 公諱中允字道光號東溟姓黃氏海月先生諱汝一之子也大父應澄號滄洲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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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顯祖也妣義城金氏龜峯守一女再妣漢陽崔氏兵使垣之女繼妣全州李氏 顯祖也妣義城金氏龜峯守一女再妣漢陽崔氏兵使垣之女繼妣全州李氏
 德原君樞女成宗大王四世孫公金氏出也\_萬曆丁丑五月七日生于川前 德原君樞女成宗大王四世孫公金氏出也\_萬曆丁丑五月七日生于川前
-外第骨相異凡聞輒不忘滄洲公喜曰家文種不絶及舞象遍讀四子三經+外第骨相異凡聞輒不忘滄洲公喜曰<fc #ff0000>吾</fc>家文種不絶及舞象遍讀四子三經
 先公手書經齋箴心箴與之壬辰避寇虎田適爲散倭所執神色自若老酋異 先公手書經齋箴心箴與之壬辰避寇虎田適爲散倭所執神色自若老酋異
 而釋之丙申聘大菴朴先生惺之門因受業庚子往拜寒岡鄭先生數朔講質 而釋之丙申聘大菴朴先生惺之門因受業庚子往拜寒岡鄭先生數朔講質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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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妃廢主大怒罷黜之即日歸鄕入山課農丁巳凶論復起錮廢西宮時先公自 妃廢主大怒罷黜之即日歸鄕入山課農丁巳凶論復起錮廢西宮時先公自
  
-東萊解歸有工議之召連促不赴奸黨斷斷不己九月除公獻納將試之也+東萊解歸有工議之召連促不赴奸黨斷斷不己九月除公獻納將試之也
 俛就肅以親病呈歸連授佐正郞皆不赴己未以前職促召時北騷甚緊天朝 俛就肅以親病呈歸連授佐正郞皆不赴己未以前職促召時北騷甚緊天朝
 徵兵公曰此非控辭自便之時遂就五月以賚資官赴遼七月復命九月拜持 徵兵公曰此非控辭自便之時遂就五月以賚資官赴遼七月復命九月拜持
 平庚申陞通政僉樞俄拜同副承旨四月差天朝奏聞特使五月赴都適皇上 平庚申陞通政僉樞俄拜同副承旨四月差天朝奏聞特使五月赴都適皇上
 賓天使事無暇九月復命辛酉以同副承旨召還俄遷左副承旨又遷左副承 賓天使事無暇九月復命辛酉以同副承旨召還俄遷左副承旨又遷左副承
-旨兼三字啣八月除龍川府使辭不赴冬胡騎渡江宣川襲天將廢主使備+旨兼三字啣八月除龍川府使辭不赴冬胡騎渡江宣川襲天將廢主使備
 局大臣會議政堂公以該房承旨入參大臣所陳不過羈縻之計而因循之間 局大臣會議政堂公以該房承旨入參大臣所陳不過羈縻之計而因循之間
 賊勢益急公引漢唐己事啓之承宗大唱曰黃某主和即呈辭歸壬戌遭先公 賊勢益急公引漢唐己事啓之承宗大唱曰黃某主和即呈辭歸壬戌遭先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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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善護及至讀書爲事孤山尹公善道常論討遣其從弟善進善一受學焉乙丑 善護及至讀書爲事孤山尹公善道常論討遣其從弟善進善一受學焉乙丑
 自上察其寃命量移瑞山庚午因桐溪疏請癸酉始蒙宥還鄕甲戌蕩滌還授 自上察其寃命量移瑞山庚午因桐溪疏請癸酉始蒙宥還鄕甲戌蕩滌還授
-職帖乙亥築水月堂日垸究書史然自適丁丑聞南漢下城之報悲憤不自+職帖乙亥築水月堂日垸究書史然自適丁丑聞南漢下城之報悲憤不自
 勝逐流寓山峽居無定處有詩曰當日魯連眞可想蹈東大義不虛言與內弟 勝逐流寓山峽居無定處有詩曰當日魯連眞可想蹈東大義不虛言與內弟
  
-瓢隱金公乘暇敍懷戊子三月二十九日考終于寢年七十二葬郡北墨防 +瓢隱金公乘暇敍懷戊子三月二十九日考終于寢年七十二葬郡北墨防 
-辛原配淑夫人密陽朴氏無子以叔弟中憲子石來爲嗣二女郡守曺挺融 +辛原配淑夫人密陽朴氏無子以叔弟中憲子石來爲嗣二女郡守曺挺融 
-參奉鄭基德石來三男圭基四女李厚載護軍徐翰振鄭錫圭朴泰厚圭三 +參奉鄭基德石來三男圭基四女李厚載護軍徐翰振鄭錫圭朴泰厚圭三 
-男世重世恒世泰二女孫命杰權大成同樞基二男世世鍾一女朴時漸玄+男世重世恒世泰二女孫命杰權大成同樞基二男世世鍾一女朴時漸玄
 孫十三人相夏憲夏景夏師夏受夏鼎夏呂夏鍾夏胤夏仁夏弼夏宇夏宙夏 孫十三人相夏憲夏景夏師夏受夏鼎夏呂夏鍾夏胤夏仁夏弼夏宇夏宙夏
 以下不盡錄嗚呼公以英邁之資遠大之志幼而染襲於海月之庭長而薰灸 以下不盡錄嗚呼公以英邁之資遠大之志幼而染襲於海月之庭長而薰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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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乎世不樂成人之美者每以廢朝之出膺召命院啓之苟陳羈縻爲口實噫其 乎世不樂成人之美者每以廢朝之出膺召命院啓之苟陳羈縻爲口實噫其
 甚矣向使公低徊於召命則陰中之禍將及於病親爲人子者當如何而處此 甚矣向使公低徊於召命則陰中之禍將及於病親爲人子者當如何而處此
-也桐溪先生分揀之請一出於公正而天日不燭渙霈旋降則公之墨之恨+也桐溪先生分揀之請一出於公正而天日不燭渙霈旋降則公之墨之恨
 始可以白於天下矣尙何恨哉逐撮其槩而爲之銘曰名父之子宗儒之弟行 始可以白於天下矣尙何恨哉逐撮其槩而爲之銘曰名父之子宗儒之弟行
 全忠孝學兼德藝有本如是何用不宜涉險專對扶倫有啓彼何人斯貝錦成 全忠孝學兼德藝有本如是何用不宜涉險專對扶倫有啓彼何人斯貝錦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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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typo ff:'바탕'; fs:1em; lh:1.5em> <typo ff:'바탕'; fs:1em; lh:1.5em>
-\_**동명선생(東溟先生)의 묘갈명(墓碣銘)을 기(略記)함**\\+\_**동명선생(東溟先生)의 묘갈명(墓碣銘)을 기(略記)함**\\
 \_공(公)의 휘(諱)는 중윤(中允)이요 자(字)는 도광(道光)이며 호(號)는  \_공(公)의 휘(諱)는 중윤(中允)이요 자(字)는 도광(道光)이며 호(號)는 
 동명(東溟)이라 했고 성(姓)은 황씨(黃氏)로서 해월선생(海月先生) 휘(諱)  동명(東溟)이라 했고 성(姓)은 황씨(黃氏)로서 해월선생(海月先生) 휘(諱) 
 여일(汝一)의 아드님이다.\\ 여일(汝一)의 아드님이다.\\
  
-\_조부의 휘(諱)는 응징(應澄)이요 호(號)를 창주(滄州)라하며 판결사(判事)+\_조부의 휘(諱)는 응징(應澄)이요 호(號)를 창주(滄州)라하며 판결사(判事)
 벼슬에 증직(贈職)되었고 증조(曾祖)의 휘(諱)는 우(瑀)이니 성주목사(星州牧使)를  벼슬에 증직(贈職)되었고 증조(曾祖)의 휘(諱)는 우(瑀)이니 성주목사(星州牧使)를 
 지냈으며 고조(高祖)의 휘(諱)는 보곤(輔坤)이니 생원(生員)이었으며 고려 지냈으며 고조(高祖)의 휘(諱)는 보곤(輔坤)이니 생원(生員)이었으며 고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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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_어머니는 의성김씨(義城金氏)로서 호(號)가 구봉(龜峯)이며 휘(諱) 수일(守一)의  \_어머니는 의성김씨(義城金氏)로서 호(號)가 구봉(龜峯)이며 휘(諱) 수일(守一)의 
-따님이며 둘째 어머니는 한양최씨(漢陽崔氏)이니 병사(兵使)벼슬을 지낸 원(垣)의 +따님이며 둘째 어머니는 한양최씨(漢陽崔氏)이니 병사(兵使) 벼슬을 지낸 원(垣)의 
 따님이요 계비(繼妣)는 완산이씨(完山李氏)로서 덕원군(德原君)인 추(樞)의  따님이요 계비(繼妣)는 완산이씨(完山李氏)로서 덕원군(德原君)인 추(樞)의 
 따님이며 성종대왕(成宗大王)의 4세손(四世孫)인데 공(公)은 의성김씨(義城金氏)의  따님이며 성종대왕(成宗大王)의 4세손(四世孫)인데 공(公)은 의성김씨(義城金氏)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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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_조선(朝鮮) 선조(宣祖) 10(十)년 정축(丁丑)(서기 1577(一五七七)) 5(五)월 7(七)일에  \_조선(朝鮮) 선조(宣祖) 10(十)년 정축(丁丑)(서기 1577(一五七七)) 5(五)월 7(七)일에 
-천전(川前)(: 내앞)의 외가(外家)에서 출생하시니 골상(骨相)이 범상한 아이들과 달랐으며 +천전(川前)(: 내앞)((내앞: 경상북도 안동시 임하면 천전리에 있는 의성 김씨 집성촌. 마을 앞으로 반변천이 흘러 천전(川前, 일명 내앞)이라고 하였다. 입향조 김만근(金萬謹)이 당시 임하현의 대지주인 해주오씨 오계동(吳季童)의 사위가 되어 임하현에 정착한 뒤로 김예범(金禮範)이 천전리에 정착함으로써 의성김씨 집성촌의 기틀을 마련하였다. 이후 후손들이 신덕·임하·망천·추월·지례·국란·내급 등 임하현 일대에 의성김씨 집성촌을 형성하였다. 김예범의 아들 김진(金璡)은 청송과 강원도 일대에 농장을 개척하여 경제적 기반을 다졌다. 김진의 아들 5형제 중 김극일(金克一)·김성일(金誠一)·김복일(金復一)은 대과에 급제하였고, 김수일(金守一)·김명일(金明一)은 소과에 합격하여 가문의 위상을 높였다. 세간에서는 5형제를 천전오룡(川前五龍) 또는 김씨오룡(金氏五龍)이라 일컬었고, 의성김씨 가문을 오자등과댁(五子登科宅) 등으로 칭하였다. 김수일의 아들 김용(金涌)도 크게 이름을 떨쳤다.))의 외가(外家)에서 출생하시니 골상(骨相)이 범상한 아이들과 달랐으며 
 말을 잠깐 들어도 곧 잊어버리지 않으니 조부이신 창주공(滄州公)이 기뻐서 말을 잠깐 들어도 곧 잊어버리지 않으니 조부이신 창주공(滄州公)이 기뻐서
 말하기를 “우리 집이 글의 씨앗이 끊어지지 않았다”고 했다. 나이 15~6(十五、六)세가 말하기를 “우리 집이 글의 씨앗이 끊어지지 않았다”고 했다. 나이 15~6(十五、六)세가
줄 86: 줄 86:
  
 \_경자년(庚子年)에 한강(寒岡) 정선생(鄭先生)을 가서 뵈옵고 여러 달 강론을 \_경자년(庚子年)에 한강(寒岡) 정선생(鄭先生)을 가서 뵈옵고 여러 달 강론을
-듣고 질의(質疑)를 했는데 선생께 많은 격려(激勵)와 칭찬을 들었다.\\+듣고 질의(質疑)를 했는데 선생께서 많은 격려(激勵)와 칭찬을 하셨다.\\
  
 \_임인년(壬寅年)에 모부인(母夫人)의 상(喪)을 당하여 예제(禮制)에 지나칠  \_임인년(壬寅年)에 모부인(母夫人)의 상(喪)을 당하여 예제(禮制)에 지나칠 
줄 94: 줄 94:
 \_정미년(서기 1607(一六〇七))에 아버지이신 해월공(海月公)의 임지(任地)인  \_정미년(서기 1607(一六〇七))에 아버지이신 해월공(海月公)의 임지(任地)인 
 영천(永川)에 가서 모시고 살았는데 여헌(旅軒) 장선생(張先生)이 지나가는 길에 들러서 영천(永川)에 가서 모시고 살았는데 여헌(旅軒) 장선생(張先生)이 지나가는 길에 들러서
-해월공(海月公)과 여러날 강론(講論)하고 토론(討論)했으며 공(公)도 많은 질 +해월공(海月公)과 여러날 강론(講論)하고 토론(討論)했으며 공(公)도 많은 질문을  
-문을 하여 어려움을 풀었다.\\+하여 어려움을 풀었다.\\
  
 \_경술년(서기 1610(一六一〇))에 요사한 정인홍(鄭仁弘)이 이회재(李晦齋)  \_경술년(서기 1610(一六一〇))에 요사한 정인홍(鄭仁弘)이 이회재(李晦齋) 
줄 125: 줄 125:
 제수했으나 모두 부임하지 않았다.\\ 제수했으나 모두 부임하지 않았다.\\
  
-\_기미년(서기 1619(一六一九))에 전직(前職)인 헌납(獻納)벼슬에 부임하라고 +\_기미년(서기 1619(一六一九))에 전직(前職)인 헌납(獻納) 벼슬에 부임하라고 
 재촉하였는데 그 때에 북방의 변경(邊境)이 소란하여 명(明)나라에서 군대를 징발하므로 재촉하였는데 그 때에 북방의 변경(邊境)이 소란하여 명(明)나라에서 군대를 징발하므로
-공이 말하기를 “이 때는 사직서(職書)나 올리고 자신의 편리만을 취할 때가+공이 말하기를 “이 때는 사직서(職書)나 올리고 자신의 편리만을 취할 때가
 아니라” 하고 드디어 5(五)월에 뢰자관(賚資官)에 취임하여 요동(遼東)에 나아갔다가  아니라” 하고 드디어 5(五)월에 뢰자관(賚資官)에 취임하여 요동(遼東)에 나아갔다가 
 7(七)월에 돌아와 복명(復命)했으며 9(九)월에 지평(持平)벼슬에 배명되었다.\\ 7(七)월에 돌아와 복명(復命)했으며 9(九)월에 지평(持平)벼슬에 배명되었다.\\
  
-\_경신년(서기 1620(一六二○))에 통정대부(通政大夫)의 품계(品偕)로 첨추(僉樞)벼슬에+\_경신년(서기 1620(一六二○))에 통정대부(通政大夫)의 품계(品偕)로 첨추(僉樞) 벼슬에
 올랐는데 얼마 안되어 동부승지(同副承旨)를 배명받고 4(四)월에 명(明)나라에  올랐는데 얼마 안되어 동부승지(同副承旨)를 배명받고 4(四)월에 명(明)나라에 
 주문특사(奏聞特使)로 뽑혀가서 5(五)월에 명나라 도성(都城)에 다다르니 마침 명나라 주문특사(奏聞特使)로 뽑혀가서 5(五)월에 명나라 도성(都城)에 다다르니 마침 명나라
줄 148: 줄 148:
 \_공이 한(漢)나라와 당(唐)나라의 사실(史實)을 인용하여 아뢰니 도승지(都承旨)가  \_공이 한(漢)나라와 당(唐)나라의 사실(史實)을 인용하여 아뢰니 도승지(都承旨)가 
 큰 소리로 부르짖기를 “황(黃)아무개는 화친을 주장하는가”라고 했다. 큰 소리로 부르짖기를 “황(黃)아무개는 화친을 주장하는가”라고 했다.
-공은 곧 사직(職)을 하고 고향에 돌아갔다.\\+공은 곧 사직(職)을 하고 고향에 돌아갔다.\\
  
 \_임술년(서기 1622(一六二二))에 부친의 상(喪)을 당하여 예제(禮制)를 전과 같이  \_임술년(서기 1622(一六二二))에 부친의 상(喪)을 당하여 예제(禮制)를 전과 같이 
줄 159: 줄 159:
 보호하라고 당부했다. 적소(謫所)에 도착하여서는 독서(讀書)로 일삼았으니 보호하라고 당부했다. 적소(謫所)에 도착하여서는 독서(讀書)로 일삼았으니
 고산(孤山) 윤선도(尹善道)공이 상시로 찾아와서 토론하다가 그의 종제(從弟)인 고산(孤山) 윤선도(尹善道)공이 상시로 찾아와서 토론하다가 그의 종제(從弟)인
-선진(善進)과 선일(善一)을 보내어서 공에게 배움을 받게했다.\\+선진(善進)과 선일(善一)을 보내어서 공에게 배움을 받게 했다.\\
  
 \_을축년(서기 1625(一六二五))에 위에서 그의 억울한 사정을 살펴서 서산(瑞山)으로 \_을축년(서기 1625(一六二五))에 위에서 그의 억울한 사정을 살펴서 서산(瑞山)으로
 적소(謫所)를 옮기도록 배려했으며 경오년(서기 1630(一六三○))에 동계(桐溪)  적소(謫所)를 옮기도록 배려했으며 경오년(서기 1630(一六三○))에 동계(桐溪) 
-정온(鄭蘊)의 소청(疏請)으로 인하여 계유년(서기 1633(一六三三))에 비로서 면죄(免罪)를+정온(鄭蘊)의 소청(疏請)으로 인하여 계유년(서기 1633(一六三三))에 비로소 면죄(免罪)를
 받아 고향에 돌아왔다.\\ 받아 고향에 돌아왔다.\\
  
줄 173: 줄 173:
  
 슬프고 분한 마음을 이기지 못하여 드디어 산협(山峽)을 여기저기 우거(寓居)하여 슬프고 분한 마음을 이기지 못하여 드디어 산협(山峽)을 여기저기 우거(寓居)하여
-일정한 거처가 없이 살았으며 시(詩)를 지어 말하기를 “전국시대(戰國時代)의 +일정한 거처가 없이 살았으며 시(詩)를 지어 말하기를 “當日魯連眞可想 전국시대(戰國時代)의 
-노증련(魯仲連)을 참으로 생각케 하는구나 동쪽으로 숨은 그 대의(大義)는 헛말이+노증련(魯仲連)을 참으로 생각케 하는구나, 蹈東大義不虛言 동쪽으로 숨은 그 대의(大義)는 헛말이
 아니었네” 라고 하며 외종제(外從弟)인 표은(瓢隱) 김공(金公)과 더불어 틈만 아니었네” 라고 하며 외종제(外從弟)인 표은(瓢隱) 김공(金公)과 더불어 틈만
-있으면 회포를 풀다가 무자년(서기 1648(一六四八)) 3(三)월 29(二十九)일에 침방(房)에서+있으면 회포를 풀다가 무자년(서기 1648(一六四八)) 3(三)월 29(二十九)일에 침방(房)에서
 천명(天命)을 다하였으니 향년(享年)이 72(七十二)세였다.\\ 천명(天命)을 다하였으니 향년(享年)이 72(七十二)세였다.\\
  
줄 182: 줄 182:
 배위(配位)인 숙부인(淑夫人) 밀양박씨(密陽朴氏)는 아들이 없어서 셋째 아우인 배위(配位)인 숙부인(淑夫人) 밀양박씨(密陽朴氏)는 아들이 없어서 셋째 아우인
 중헌(中憲)의 아들 석래(石來)를 계자(系子)로 삼았으며 두 딸은 군수를 지낸 중헌(中憲)의 아들 석래(石來)를 계자(系子)로 삼았으며 두 딸은 군수를 지낸
-조정(曹挺融)과 참봉(參奉)을 지낸 정기덕(鄭基德)에게 출가했다.\\+조정(曹挺融)과 참봉(參奉)을 지낸 정기덕(鄭基德)에게 출가했다.\\
  
 \_석래(石來)의 세 아들은 규(圭)와 기(基)와 근(墐)이며 네 딸은 호군(護軍)을 \_석래(石來)의 세 아들은 규(圭)와 기(基)와 근(墐)이며 네 딸은 호군(護軍)을
줄 190: 줄 190:
 기(基)의 두 아들은 세장(世鏘)과 세종(世鍾)이요 딸은 박시점(朴時漸)에게  기(基)의 두 아들은 세장(世鏘)과 세종(世鍾)이요 딸은 박시점(朴時漸)에게 
 출가했고 현손(玄孫)이 열세 사람이니 상하(相夏)와 헌하(憲夏)와 경하(景夏)와 출가했고 현손(玄孫)이 열세 사람이니 상하(相夏)와 헌하(憲夏)와 경하(景夏)와
-사하(師夏)와 정하(鼎夏)와 여하(呂夏)와 종하(鍾夏)와 우하(宇夏)와 주하(宙夏)이며 +사하(師夏)와 정하(鼎夏)와 여하(呂夏)와 종하(鍾夏)와 <fc #008080>윤하(胤夏)와 인하(仁夏)와 필하(弼夏)와</fc> 우하(宇夏)와 주하(宙夏)이며 
 이하는 다 기록하지 않는다.\\ 이하는 다 기록하지 않는다.\\
  
줄 200: 줄 200:
 깊이 궁구(窮究)하고 세밀히 분석(分析)하지 않음이 없었으니 스승과 학우(學友)들  깊이 궁구(窮究)하고 세밀히 분석(分析)하지 않음이 없었으니 스승과 학우(學友)들 
 사이에서 얻은 학문(學問)의 힘을 어떻게 속일 수 있겠는가. 아! 세상은 사이에서 얻은 학문(學問)의 힘을 어떻게 속일 수 있겠는가. 아! 세상은
-사람이 좋게 성취(成就)되는 것을 미워하는지라광해주(光海主)의 조정에 +사람이 좋게 성취(成就)되는 것을 미워하는지라광해주(光海主)의 조정에 
 소명(召命)되어 승정원(承政院)의 회의 때에 화친(和親)을 주장했다는 구실로  소명(召命)되어 승정원(承政院)의 회의 때에 화친(和親)을 주장했다는 구실로 
 번번이 공을 견제하니 아! 참 심한 일이로다. 그 당시 공으로 하여금 소명(召命)을 번번이 공을 견제하니 아! 참 심한 일이로다. 그 당시 공으로 하여금 소명(召命)을
줄 235: 줄 235:
 墨坊之峙 묵방(墨坊)의 언덕에 잠들었도다. \\ 墨坊之峙 묵방(墨坊)의 언덕에 잠들었도다. \\
 我銘茲石 내가 이 비석에 명(銘)을 말하여 \\ 我銘茲石 내가 이 비석에 명(銘)을 말하여 \\
-揭示公議 공평(公評)한 의논(議論)을 시(揭示)하노라.\\+揭示公議 공평(公評)한 의논(議論)을 시(揭示)하노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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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_\_척암(拓菴) 김도화(金道和) 지음\\ \_\_척암(拓菴) 김도화(金道和) 지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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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1. 한강(寒岡): 정구(鄭逑)의 호(號). 관직(官職)은 대사헌(大司憲). 조식(曹植)과 이황(李滉)에게 성리학(性理學). 선조(宣祖) 6년(六年)에 유일(遺逸)로 천거되어 대사헌(大司憲)에까지 올랐으며 명문장가(名文章家)로서 인조반정(仁祖反正) 후에 이조판서(吏曹判書)에 추증(追贈)되었다.\\+<WRAP subnote> 
 +주1. 한강(寒岡): 정구(鄭<fc #008080></fc>)의 호(號). 관직(官職)은 대사헌(大司憲). 조식(曹植)과 이황(李滉)에게 성리학(性理學). 선조(宣祖) 6년(六年)에 유일(遺逸)로 천거되어 대사헌(大司憲)에까지 올랐으며 명문장가(名文章家)로서 인조반정(仁祖反正) 후에 이조판서(吏曹判書)에 추증(追贈)되었다.\\
  
 주2. 여헌(旅軒): 장현광(張顯光)의 호(號). 선조(宣祖) 때에 학행(學行)으로 천거되어 현감(縣監) 좌랑(佐郞)등을 지냈으나 광해주(光海主) 때에 참판(參判), 대사헌(大司憲), 공조판서(工曹判書) 등에 임명되었으나 사퇴하고 학문(學問)에 전념했다.\\ 주2. 여헌(旅軒): 장현광(張顯光)의 호(號). 선조(宣祖) 때에 학행(學行)으로 천거되어 현감(縣監) 좌랑(佐郞)등을 지냈으나 광해주(光海主) 때에 참판(參判), 대사헌(大司憲), 공조판서(工曹判書) 등에 임명되었으나 사퇴하고 학문(學問)에 전념했다.\\
줄 255: 줄 256:
 주8. 인목대비(仁穆大妃): 선조(宣祖)의 계비(繼妃)로서 영창대군(永昌大君)의 어머니이며 광해군(光海君)에 의하여 서궁(西宮)에 유폐(幽廢)되기도 했다.\\ 주8. 인목대비(仁穆大妃): 선조(宣祖)의 계비(繼妃)로서 영창대군(永昌大君)의 어머니이며 광해군(光海君)에 의하여 서궁(西宮)에 유폐(幽廢)되기도 했다.\\
  
-주9. 윤선도(尹善道): 호(號)는 고산(孤山). 남해인( 海南)人이다. 광해군(光海君) 때에 성균관(成均館)의 유생(儒生)으로 권신(權臣) 이이첨 일당을 탄핵하는 상소를 올렸다가 유배(流配)되는 등 일생(一生)을 거의 유배생활(流配生活)로 일관(一貫)하고 그의 시조(時調)는 정철(鄭澈)의 가사(歌辭)와 더불어 조선(朝鮮) 시가(詩歌)의 쌍벽(雙璧)을 이루고 있다.\\+주9. 윤선도(尹善道): 호(號)는 고산(孤山). 남해인( 海南人)이다. 광해군(光海君) 때에 성균관(成均館)의 유생(儒生)으로 권신(權臣) 이이첨 일당을 탄핵하는 상소를 올렸다가 유배(流配)되는 등 일생(一生)을 거의 유배생활(流配生活)로 일관(一貫)하고 그의 시조(時調)는 정철(鄭澈)의 가사(歌辭)와 더불어 조선(朝鮮) 시가(詩歌)의 쌍벽(雙璧)을 이루고 있다.\\
  
 주10. 정동계(鄭桐溪): 정온(鄭蘊)의 호(號). 영창대군(永昌大君)의 처형이 인륜(人倫)에 어긋남을 상소(上疏)함. 강화부사(江華府使)를 참수하라고 주장하여 10년간(十年間) 제주의 대정(大靜)에서 귀양살이를 했다. 인조반정(仁祖反正) 후 석방되어 대사간(大司諫), 경상도관찰사를 역임했다.\\ 주10. 정동계(鄭桐溪): 정온(鄭蘊)의 호(號). 영창대군(永昌大君)의 처형이 인륜(人倫)에 어긋남을 상소(上疏)함. 강화부사(江華府使)를 참수하라고 주장하여 10년간(十年間) 제주의 대정(大靜)에서 귀양살이를 했다. 인조반정(仁祖反正) 후 석방되어 대사간(大司諫), 경상도관찰사를 역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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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주12. 김도화(金道和): 호(號)는 척암(拓菴)이며 의성인(義城人)이다. 학문(學問)에 정통했고 유일(遺逸)로 천거되어 의금부도사(義禁府都事)를 지냈으며 의병장(義兵將)으로 공훈(功勳)이 많았다. 주12. 김도화(金道和): 호(號)는 척암(拓菴)이며 의성인(義城人)이다. 학문(學問)에 정통했고 유일(遺逸)로 천거되어 의금부도사(義禁府都事)를 지냈으며 의병장(義兵將)으로 공훈(功勳)이 많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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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086.1748606083.txt.gz · 마지막으로 수정됨: 2025/05/30 20:54 저자 ssio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