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09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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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091 [2025/05/31 19:16] – ssio2 | b-091 [2025/06/03 08:30] (현재) – ssio2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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厚禮賓判官配牙山蔣氏有三子長曰玉崇漢城判官季曰玉崗習讀公其仲 | 厚禮賓判官配牙山蔣氏有三子長曰玉崇漢城判官季曰玉崗習讀公其仲 | ||
也諱玉山官禮賓寺正燕山即祚之初見時事將非炳幾高蹈一棹滄浪歸臥 | 也諱玉山官禮賓寺正燕山即祚之初見時事將非炳幾高蹈一棹滄浪歸臥 | ||
- | 鄕山而遂没世名不稱配安東權氏允儀之女生二男麟碩龜碩麟碩生四男 | + | 鄕山而遂沒世名不稱配安東權氏允儀之女生二男麟碩龜碩麟碩生四男 |
- | 漢佐進士漢弼漢佑漢昌一女金弼從此是公世系履歷之大縣也於乎公生 | + | 漢佐進士漢弼漢佑漢昌一女金弼從此是公世系履歷之大<fc # |
忠節家世去古未遠餘澤尙存有意進取拔茅彙征則必將朝暮巖廊寥寥薄 | 忠節家世去古未遠餘澤尙存有意進取拔茅彙征則必將朝暮巖廊寥寥薄 | ||
- | 宦不但止禮賓一命而際時蹇屯歸保名節視軒冕如泥塗嚶嚶然以一區飛 | + | 宦不但止禮賓一命而際時蹇屯歸保名節視軒冕如泥塗嘐嘐然以一區飛 |
良古人富春者其視甲子諸賢之一網掃盡先見果何如哉如公者可謂知幾 | 良古人富春者其視甲子諸賢之一網掃盡先見果何如哉如公者可謂知幾 | ||
其神不竢終日而百世之下惟可像想來志氣之高尙也却緣後孫零贊散逸 | 其神不竢終日而百世之下惟可像想來志氣之高尙也却緣後孫零贊散逸 | ||
- | 井與家獻而失諸融風適去適來飄然若雪鴻之無跡今雖欲揄揚其萬一人 | + | 幷與家獻而失諸瀜風適去適來飄然若雪鴻之無跡今雖欲揄揚其萬一人 |
孰能信之乎栗樹之谷有封而崇尺者即公之壽藏孱孫錦延殆今保守而族 | 孰能信之乎栗樹之谷有封而崇尺者即公之壽藏孱孫錦延殆今保守而族 | ||
- | 君球英周英璧英璧竭誠力方謀隊碣請余識其陰因瞿然興感作而謂諸君 | + | 君珷英周英璧英璧竭誠力方謀隊碣請余識其陰因瞿然興感作而謂諸君 |
曰公即我十四代從先祖也後俗漸疎服盡而親盡然視我祖先則俱是同室 | 曰公即我十四代從先祖也後俗漸疎服盡而親盡然視我祖先則俱是同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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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ypo ff:' | <typo ff:' | ||
- | \_**禮賓寺正黃玉山墓碣銘**\\ | + | \_**예빈시정(禮賓寺正) 황옥산(黃玉山) 묘갈명(墓碣銘)**\\ |
\_신라(新羅) 문무왕(文武王) 때에 한학사(黃學士) 휘(諱) 낙(洛)이라 하시는 어른이 중국(中國)으로부터 배를 타시고 | \_신라(新羅) 문무왕(文武王) 때에 한학사(黃學士) 휘(諱) 낙(洛)이라 하시는 어른이 중국(中國)으로부터 배를 타시고 | ||
우리나라 동해안(東海岸) 평해(平海)에 상륙(上陸)하시어 월송(月松)에 살으셨는데 이로 인(因)하여 그 자손(子孫)들이 | 우리나라 동해안(東海岸) 평해(平海)에 상륙(上陸)하시어 월송(月松)에 살으셨는데 이로 인(因)하여 그 자손(子孫)들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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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대(四代)를 지나서 중랑장(中郞將) 휘(諱) 유보(有甫)라는 어른이 휘(諱) 후(厚)라는 어른을 낳으시니 예빈판관(禮賓判官)이요 | 4대(四代)를 지나서 중랑장(中郞將) 휘(諱) 유보(有甫)라는 어른이 휘(諱) 후(厚)라는 어른을 낳으시니 예빈판관(禮賓判官)이요 | ||
배(配)는 아산장씨(牙山蔣氏)라는 분이 3형제(三兄弟)를 두었는데 장자(長子)는 옥숭(玉崇)이니 한성판관(漢城判官)이요 계자(季子)는 | 배(配)는 아산장씨(牙山蔣氏)라는 분이 3형제(三兄弟)를 두었는데 장자(長子)는 옥숭(玉崇)이니 한성판관(漢城判官)이요 계자(季子)는 | ||
- | 옥강(玉崗)이니 습독(習讀)이요 공(公)은 그 중자(仲子)이다 휘(諱)는 옥산(玉山)이요 벼슬은 예빈시정(禮賓寺正)이었는데 | + | 옥강(玉崗)이니 습독(習讀)이다. 공(公)은 그 중자(仲子)이시고 |
연산주(燕山主)가 즉위(卽位)하면서 처음부터 정계(政界)가 혼탁(混濁)해질 것을 예견(豫見)하시고 그 밝게 보시는 | 연산주(燕山主)가 즉위(卽位)하면서 처음부터 정계(政界)가 혼탁(混濁)해질 것을 예견(豫見)하시고 그 밝게 보시는 | ||
줄 48: | 줄 48: | ||
공명(功名)을 폐리(弊履)와 같이 버리고 한 개 구구(區區)한 비랑(飛良)으로 부춘산(富春山)에서 절개(節介)를 지키던 | 공명(功名)을 폐리(弊履)와 같이 버리고 한 개 구구(區區)한 비랑(飛良)으로 부춘산(富春山)에서 절개(節介)를 지키던 | ||
엄자룡(嚴子龍)의 뜻을 따랐던 것이다. 그러나 그 후(後) 갑자사화(甲子士禍)로 제현(諸賢)이 일망소진(一網掃盡)되는 | 엄자룡(嚴子龍)의 뜻을 따랐던 것이다. 그러나 그 후(後) 갑자사화(甲子士禍)로 제현(諸賢)이 일망소진(一網掃盡)되는 | ||
- | 것을 보고 비로소 세인(世人)들이 공(公)의 선견지명(先見之明)을 깨닫고 더욱 공(公)을 존경(尊敬)하게 되었다. | + | 것을 보고 비로소 세인(世人)들이 공(公)의 선견지명(先見之明)을 깨닫고 더욱 공(公)을 존경(尊敬)하게 되었다.\\ |
- | 후손(後孫)이 가빈(家貧)하여 흩어져 산 것과 사회풍조(社會風潮)가 추선보본(追先報本)하기에 힘드는 방향(方向)으로 | + | |
+ | \_후손(後孫)이 가빈(家貧)하여 흩어져 산 것과 사회풍조(社會風潮)가 추선보본(追先報本)하기에 힘드는 방향(方向)으로 | ||
흐르는 편이어서 수백년(數百年) 동안을 묘도(墓道)를 닦지 못하고 왔었다. 그러나 매년(每年) 1차식(一次式) | 흐르는 편이어서 수백년(數百年) 동안을 묘도(墓道)를 닦지 못하고 왔었다. 그러나 매년(每年) 1차식(一次式) | ||
치루는 선산(先山)의 존소(尊掃)에는 멀리 사는 후손(後孫)들까지 궐(闕)함이 없었던 것으로 보아 그들 | 치루는 선산(先山)의 존소(尊掃)에는 멀리 사는 후손(後孫)들까지 궐(闕)함이 없었던 것으로 보아 그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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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도 응당(應當) 이 일에 협력(協力)하여야 할 것인데 어찌 즐겁다 않다하고 사양하겠는가? | 나도 응당(應當) 이 일에 협력(協力)하여야 할 것인데 어찌 즐겁다 않다하고 사양하겠는가? | ||
- | 이러한 일은 자손(子孫)들로 하여금 선영(先塋)에 향화(香火)의 자품(資禀)을 가까이 쌓도록 하며 | + | 이러한 일은 자손(子孫)들로 하여금 선영(先塋)에 향화(香火)의 자품(資禀)을 가까이 쌓도록 하며 |
족의(族誼)를 후손(後孫)들에게 물려주는 일이 되며 제군(諸君)과 제군(諸君)의 자손(子孫)들이 복(福) 받을 일인 즉 | 족의(族誼)를 후손(後孫)들에게 물려주는 일이 되며 제군(諸君)과 제군(諸君)의 자손(子孫)들이 복(福) 받을 일인 즉 | ||
- | 내 어찌 치하(致賀)하지 않겠으며 또 부족(不足)한 문필(文筆)을 면치 못하나 성의(誠意)를 다하지 않겠는가 | + | 내 어찌 치하(致賀)하지 않겠으며 또 부족(不足)한 문필(文筆)을 면치 못하나 성의(誠意)를 다하지 않겠는가. |
드디어 이 돌에 새기노니 \\ | 드디어 이 돌에 새기노니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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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091.1748686609.txt.gz · 마지막으로 수정됨: 2025/05/31 19:16 저자 ssio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