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09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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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092 [2025/05/26 19:29] – ssio2 | b-092 [2025/06/03 08:42] (현재) – ssio2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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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훈도공위연묘갈명(訓導公諱璉墓碣銘) | + | ===훈도공휘연묘갈명(訓導公諱璉墓碣銘)=== |
- | + | <WRAP 37em justify>< | |
- | 訓導公諱璉墓碣銘 | + | <typo ff:' |
- | 直郡之南舘谷洞辛坐之原昔我傍先祖處士公諱璉衣鳥之藏舊砖坐苔有 | + | \_**訓導公諱璉墓碣銘**\\ |
- | 泐無徵可考麗億杲孫感發以改堅之意使余屬麗牲之文生晚蔑學安敢摭 | + | 直郡之南舘谷洞辛坐之原昔我傍先祖處士公諱璉衣<fc # |
+ | 泐無徵可考麗億晜孫感發以改堅之意使余屬麗牲之文生晩蔑學安敢摭 | ||
其要領哉然而此吾門之事無奈窮思粗述遠祖漢學士諱洛新羅文武王朝 | 其要領哉然而此吾門之事無奈窮思粗述遠祖漢學士諱洛新羅文武王朝 | ||
入于本國居於平海月松子孫因貫焉中世派祖諱瑞金紫光祿大夫以翊戴 | 入于本國居於平海月松子孫因貫焉中世派祖諱瑞金紫光祿大夫以翊戴 | ||
- | 功陞縣爲郡謚文節高祖諱有甫中郞將曾祖諱厚禮賓判官祖諱玉崇漢城 | + | 功陞縣爲郡諡文節高祖諱有甫中郞將曾祖諱厚禮賓判官祖諱玉崇漢城 |
判尹考諱輔坤生員妣宜人殷豊申氏護軍文繡女公生于正明村兄弟有三 | 判尹考諱輔坤生員妣宜人殷豊申氏護軍文繡女公生于正明村兄弟有三 | ||
星州牧使公之弟大海先生之季父海月先生之從祖一生其無憂惟公乎况 | 星州牧使公之弟大海先生之季父海月先生之從祖一生其無憂惟公乎况 | ||
學文膽博行訓導職配黃氏公早退先廬卜居于蘇台村而安閒棲息生五男 | 學文膽博行訓導職配黃氏公早退先廬卜居于蘇台村而安閒棲息生五男 | ||
- | 一女長應辟次應舉應聘應涎應擢女適士人金鶴齡應辟子春一應挺子道 | + | 一女長應辟次應擧應聘應涎應擢女適士人金鶴齡應辟子春一應挺子道 |
一應擢子承一餘外曾玄甚夥而煩不錄長曾孫彦南生汝龍生石俊生信正 | 一應擢子承一餘外曾玄甚夥而煩不錄長曾孫彦南生汝龍生石俊生信正 | ||
- | 生世淑下至八世孫鎭燮其世嫡也配墓在乾位墓上各雲仍同心另力極彈 | + | 生世淑下至八世孫鎭燮其世嫡也配墓在乾位墓上各雲仍同心另力極殫 |
- | 其誠我觀感而遂叙次爲之銘曰郡南大川館西靈岳俯仰美門有封三尺三 | + | 其誠我觀感而遂敍次爲之銘曰郡南大川館西靈岳俯仰羡門有封三尺三 |
- | 棣聯芳淵源文學餘蔭綿椒聊蕃蘊殖積卷遺史明載玄石我銘一片百世信墨 | + | 棣聯芳淵源文學餘蔭綿椒聊蕃蘊殖積卷遺史明載玄石我銘一片百世信 |
- | + | 墨\\ | |
- | 檀紀四千三百十一年戊午八月日十五世孫鎭燮謹豎 | + | \_\_檀紀四千三百十一年戊午八月日十五世孫鎭燮謹豎竪\\ |
- | 從後孫炳龍謹撰 | + | \_\_從後孫炳龍謹撰\\ |
- | 月城孫晋弘謹書 | + | \_\_月城孫晋弘謹書 |
- | 훈도공(訓導公) 휘(諱)련(璉)의 묘갈명(墓碣銘) | + | </ |
- | 곧 군(郡)의 남쪽 관곡동(舘谷洞) 신좌(辛坐)의 둔덕에 옛날 우리 傍先祖이신 | + | </ |
- | 처사공(處士公) 휘(諱)련(璉)의 묘(墓)가 있는데 세운 비(碑)에는 이끼가 끼이고 | + | \\ |
+ | <typo ff:' | ||
+ | \_**훈도공(訓導公) 휘(諱) 련(璉)의 묘갈명(墓碣銘)**\\ | ||
+ | \_곧 군(郡)의 남쪽 관곡동(館谷洞) 신좌(辛坐)의 둔덕에 옛날 우리 | ||
+ | 처사공(處士公) 휘(諱) | ||
돌이 갈라져서 비문(碑文)을 상고(詳考)할 방도가 없게 되니 수많은 후손들이 | 돌이 갈라져서 비문(碑文)을 상고(詳考)할 방도가 없게 되니 수많은 후손들이 | ||
개갈(改碣)해야 한다는 의사(意思)가 느껴져서 나로 하여금 묘갈명(墓碣銘)을 | 개갈(改碣)해야 한다는 의사(意思)가 느껴져서 나로 하여금 묘갈명(墓碣銘)을 | ||
- | 지어달라고 부탁하는자라。 | + | 지어달라고 부탁하는자라.\\ |
- | 배움이 용렬한 나같은 만생(晚生)이 어찌 감히 그 요령(要領)을 찾아 글을 지을 | + | |
- | 수 있겠는가 그러나 이 일은 우리 문중(門中)의 일이니 어쩔 수 없어서 생각을 | + | |
- | 다하여 서술(敍述)하노니 먼 옛날 시조는 한(漢)나라 때에 벼슬이 학사(學士)였던 | + | |
- | 휘(諱)락(洛)이 신라(新羅) 문무왕(文武王) 때에 우리나라에 들어와서 평해 | + | |
- | (平海)의 월송리(月松里)에 살았기 때문에 자손들이 거기를 관향(貫鄕)으로 했 | + | |
- | 다. 증세(中世)에 우리 파조(波祖)이신 휘(諱) 서(瑞)는 벼슬이 금자광록대 | + | |
- | 부(金紫光祿大夫)이며 익대공신(翊戴功臣)이 되어 평해현(平海縣)을 군(郡)으로 | + | \_배움이 용렬한 나 같은 만생(晩生)이 어찌 감히 그 요령(要領)을 찾아 글을 지을 |
- | 승격(陞格)시켰으며 시호(諡號)는 문절공(文節公)이다. 高祖의 諱는 유보(有 | + | 수 있겠는가. 그러나 이 일은 우리 문중(門中)의 일이니 어쩔 수 없어서 생각을 |
- | 甫)이니 벼슬이 중랑장(中郞將)이었고 증조(曾祖)의 휘(諱)는 후(厚)이니 | + | 다하여 서술(敍述)하노니. 먼 옛날 시조는 한(漢)나라 때에 벼슬이 학사(學士)였던 |
- | 빈시(禮賓寺)의 판관(判官)이었으며 조부(祖父)의 휘(諱)는 옥승(玉崇)이니 한 | + | 휘(諱) 낙(洛)이 신라(新羅) 문무왕(文武王) 때에 우리나라에 들어와서 평해(平海)의 |
- | 성판윤(漢城判尹)을 지냈으며 아버지의 휘(諱)는 보곤(輔坤)이니 생원(生員) | + | 월송리(月松里)에 살았기 때문에 자손들이 거기를 관향(貫鄕)으로 했다. |
- | 이었고 어머니는 의인(宜人)으로 은풍신씨(殷豊申氏)이니 벼슬이 호군(護軍) | + | 중세(中世)에 우리 파조(派祖)이신 휘(諱) 서(瑞)는 벼슬이 금자광록대부(金紫光祿大夫)이며 |
- | 이었던 문수(紋繡)의 따님이다. | + | 익대공신(翊戴功臣)이 되어 평해현(平海縣)을 군(郡)으로 |
- | 공(公)의 정명촌(正明村)에서 출생하시니 삼형제(三兄弟)가 있었는데 성주목 | + | 승격(陞格)시켰으며 시호(諡號)는 문절공(文節公)이다. |
- | 사(星州牧使)는 공(公)의 동생이요 대해선생(大海先生)의 계부(李父)이며 | + | 유보(有甫)이니 벼슬이 중랑장(中郞將)이었고 증조(曾祖)의 휘(諱)는 후(厚)이니 |
- | 월선생(海月先生)의 종조부(從祖父)가 되신다. 오직 공(公)은 일생동안 근심 | + | 예빈시(禮賓寺)의 판관(判官)이었으며 조부(祖父)의 휘(諱)는 옥숭(玉崇)이니 |
- | 없이 살았으며 하물며 학문(學問)이 넉넉하게 넓어서 훈도(訓導) 벼슬을 행직 | + | 한성판윤(漢城判尹)을 지냈으며 아버지의 휘(諱)는 보곤(輔坤)이니 생원(生員)이었고 |
- | (行職)했고 배위(配位)는 황씨(黃氏)이다. 공(公)이 일찍이 선대(先代)부터 | + | 어머니는 의인(宜人)으로 은풍신씨(殷豊申氏)이니 벼슬이 호군(護軍)이었던 |
- | 살던 집을 물러나와 소대촌(蘇台村)에 살 곳을 잡아서 편안하고 한가롭게 살 | + | 문수(文繡)의 따님이다.\\ |
- | 았다. | + | |
- | 오남일녀(五男一女)를 두었으니 | + | \_공(公)은 정명촌(正明村)에서 출생하시니 삼형제(三兄弟)가 있었는데 |
+ | 성주목사(星州牧使)는 공(公)의 동생이요 대해선생(大海先生)의 계부(李父)이며 | ||
+ | 해월선생(海月先生)의 종조부(從祖父)가 되신다. 오직 공(公)은 일생동안 | ||
+ | 근심없이 살았으며 하물며 학문(學問)이 넉넉하게 넓어서 훈도(訓導) 벼슬을 | ||
+ | 행직(行職)했고 배위(配位)는 황씨(黃氏)이다. 공(公)이 일찍이 선대(先代)부터 | ||
+ | 살던 집을 물러나와 소대촌(蘇台村)에 살 곳을 잡아서 편안하고 한가롭게 살았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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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_5남1녀(五男一女)를 두었으니 | ||
응빙(應聘)과 응정(應挺)과 응탁(應擢)이며 딸은 선비인 김학령(金鶴齡)에게 | 응빙(應聘)과 응정(應挺)과 응탁(應擢)이며 딸은 선비인 김학령(金鶴齡)에게 | ||
- | 출가했으며 응벽(應辟)의 아들은 춘일(春一)이요 응정(應挺)의 아들은 도일(道 | + | 출가했으며 응벽(應辟)의 아들은 춘일(春一)이요 응정(應挺)의 아들은 도일(道一)이며 |
+ | 그 밖에 증손(曾孫)과 현손(玄孫)이 대단히 많지만 번거로워 기록하지 | ||
+ | 않는다.\\ | ||
- | 一)이며 그 밖에 증손(曾孫)과 현손(玄孫)이 대단히 많지만 번거로워 기록하지 | + | \_맏집 증손(曾孫)은 언남(彦南)이요 그 아들은 여룡(汝龍)이며 그 아들은 석준 |
- | 않는다. | + | (石俊)이요 그 아들은 신정(信正)이며 그 아들은 세숙(世淑)이니 |
- | 만집 증손(曾孫)은 언남(彦南)이요 그 아들은 여룡(汝龍)이며 그 아들은 석준 | + | 이르러 진섭(鎭燮)이 그 적사손(適嗣孫)이다.\\ |
- | (石俊)이요 그 아들은 신정(信正)이며 그 아들은 세수(世淑)이니 | + | |
- | 孫)에 이르러 진섭(鎭燮)이 그 적사손(適嗣孫)이다. | + | |
- | 배위(配位)의 묘는 공(公)의 묘 위쪽에 있으며 각 후손들이 마음을 함께하고 | + | |
- | 특별한 노력을 기울여 정성을 다함을 보고 내가 느낌이 있어서 드디어 서술하고 | + | |
- | 명(銘)을 말하노니 군(郡)의 남쪽 대천(大川)이 있는 곳은 관서(館西)의 영험) | + | |
- | 靈驗)있는 산(山)이로다. 묘소(墓所)를 위아래로 우러러 부니 삼척(三尺)의 | + | |
- | 봉분(封墳)이 높이 있었네. 삼형제(三兄弟)가 나란히 방명(芳名)을 날리니 연 | + | |
- | 원(淵源)있는 학문의 힘이었도다. 남기신 음덕(陰德)이 연면(連綿)하여서 애 | + | |
- | 오라지 번창하고 재력(財力)도 쌓았다. 유사(遺史)의 책 속에서 행적(行蹟)을 | + | |
- | 찾아 현석(玄石)의 비석 위에 밝게 실었네. 내가 명(銘)을 지은 한 조각 비문이 | + | |
- | 백세(百世)토록 믿을 수 있는 글이 되리라. 단기(檀紀 四千二百十一年 무오 | + | |
- | 八월 十五일에 十五세손 진섭(鎭燮) 삼가 세우다. | + | |
- | 증후손(從後孫 병룡(炳龍) 삼가 짓고 | + | |
- | 월성(月城) 손진홍(孫晋弘) 삼가 쓰다. | + | |
+ | \_배위(配位)의 묘는 공(公)의 묘 위쪽에 있으며 각 후손들이 마음을 함께하고 | ||
+ | 특별한 노력을 기울여 정성을 다함을 보고 내가 느낌이 있어서 드디어 서술하고 | ||
+ | 명(銘)을 말하노니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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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郡南大川 군(郡)의 남쪽 대천(大川)이 있는 곳은 \\ | ||
+ | 館西靈岳 관서(館西)의 영험(靈驗)있는 산(山)이로다. \\ | ||
+ | 俯仰羨門 묘소(墓所)를 위아래로 우러러 보니 \\ | ||
+ | 有封三尺 삼척(三尺)의 봉분(封墳)이 높이 있었네. \\ | ||
+ | 三棣聯芳 삼형제(三兄弟)가 나란히 방명(芳名)을 날리니\\ | ||
+ | 淵源文學 연원(淵源)있는 학문의 힘이었도다. \\ | ||
+ | 餘蔭綿椒 남기신 음덕(陰德)이 연면(連綿)하여서 \\ | ||
+ | 聊蕃蘊殖 애오라지 번창하고 재력(財力)도 쌓았다. \\ | ||
+ | 積卷遺史 유사(遺史)의 책 속에서 행적(行蹟)을 찾아 \\ | ||
+ | 明載玄石 현석(玄石)(: | ||
+ | 我銘一片 내가 명(銘)을 지은 한 조각 비문이\\ | ||
+ | 百世信墨 백세(百世)토록 믿을 수 있는 글이 되리라.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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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_\_단기(檀紀) 4211(四千二百十一)년 무오 8(八)월 15(十五)일에 15(十五)세손 진섭(鎭燮) 삼가 세우다.\\ | ||
+ | \_\_종후손(從後孫) 병룡(炳龍) 삼가 짓고\\ | ||
+ | \_\_월성(月城) 손진홍(孫晋弘) 삼가 쓰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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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092.1748255349.txt.gz · 마지막으로 수정됨: 2025/05/26 19:29 저자 ssio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