훈도공휘연묘갈명(訓導公諱璉墓碣銘)
훈도공(訓導公) 휘(諱) 련(璉)의 묘갈명(墓碣銘)
곧 군(郡)의 남쪽 관곡동(館谷洞) 신좌(辛坐)의 둔덕에 옛날 우리 방선조(傍先祖)이신
처사공(處士公) 휘(諱) 연(璉)의 묘(墓)가 있는데 세운 비(碑)에는 이끼가 끼고
돌이 갈라져서 비문(碑文)을 상고(詳考)할 방도가 없게 되니 수많은 후손들이
개갈(改碣)해야 한다는 의사(意思)가 느껴져서 나로 하여금 묘갈명(墓碣銘)을
지어달라고 부탁하는자라.
배움이 용렬한 나 같은 만생(晩生)이 어찌 감히 그 요령(要領)을 찾아 글을 지을
수 있겠는가. 그러나 이 일은 우리 문중(門中)의 일이니 어쩔 수 없어서 생각을
다하여 서술(敍述)하노니. 먼 옛날 시조는 한(漢)나라 때에 벼슬이 학사(學士)였던
휘(諱) 낙(洛)이 신라(新羅) 문무왕(文武王) 때에 우리나라에 들어와서 평해(平海)의
월송리(月松里)에 살았기 때문에 자손들이 거기를 관향(貫鄕)으로 했다.
중세(中世)에 우리 파조(派祖)이신 휘(諱) 서(瑞)는 벼슬이 금자광록대부(金紫光祿大夫)이며
익대공신(翊戴功臣)이 되어 평해현(平海縣)을 군(郡)으로
승격(陞格)시켰으며 시호(諡號)는 문절공(文節公)이다. 고조(高祖)의 휘(諱)는
유보(有甫)이니 벼슬이 중랑장(中郞將)이었고 증조(曾祖)의 휘(諱)는 후(厚)이니
예빈시(禮賓寺)의 판관(判官)이었으며 조부(祖父)의 휘(諱)는 옥숭(玉崇)이니
한성판윤(漢城判尹)을 지냈으며 아버지의 휘(諱)는 보곤(輔坤)이니 생원(生員)이었고
어머니는 의인(宜人)으로 은풍신씨(殷豊申氏)이니 벼슬이 호군(護軍)이었던
문수(文繡)의 따님이다.
공(公)은 정명촌(正明村)에서 출생하시니 삼형제(三兄弟)가 있었는데
성주목사(星州牧使)는 공(公)의 동생이요 대해선생(大海先生)의 계부(李父)이며
해월선생(海月先生)의 종조부(從祖父)가 되신다. 오직 공(公)은 일생동안
근심없이 살았으며 하물며 학문(學問)이 넉넉하게 넓어서 훈도(訓導) 벼슬을
행직(行職)했고 배위(配位)는 황씨(黃氏)이다. 공(公)이 일찍이 선대(先代)부터
살던 집을 물러나와 소대촌(蘇台村)에 살 곳을 잡아서 편안하고 한가롭게 살았다.
5남1녀(五男一女)를 두었으니 맏이는 응벽(應辟)이요 다음은 응거(應擧)와
응빙(應聘)과 응정(應挺)과 응탁(應擢)이며 딸은 선비인 김학령(金鶴齡)에게
출가했으며 응벽(應辟)의 아들은 춘일(春一)이요 응정(應挺)의 아들은 도일(道一)이며
그 밖에 증손(曾孫)과 현손(玄孫)이 대단히 많지만 번거로워 기록하지
않는다.
맏집 증손(曾孫)은 언남(彦南)이요 그 아들은 여룡(汝龍)이며 그 아들은 석준
(石俊)이요 그 아들은 신정(信正)이며 그 아들은 세숙(世淑)이니 8세손(八世孫)에
이르러 진섭(鎭燮)이 그 적사손(適嗣孫)이다.
배위(配位)의 묘는 공(公)의 묘 위쪽에 있으며 각 후손들이 마음을 함께하고
특별한 노력을 기울여 정성을 다함을 보고 내가 느낌이 있어서 드디어 서술하고
명(銘)을 말하노니
郡南大川 군(郡)의 남쪽 대천(大川)이 있는 곳은
館西靈岳 관서(館西)의 영험(靈驗)있는 산(山)이로다.
俯仰羨門 묘소(墓所)를 위아래로 우러러 보니
有封三尺 삼척(三尺)의 봉분(封墳)이 높이 있었네.
三棣聯芳 삼형제(三兄弟)가 나란히 방명(芳名)을 날리니
淵源文學 연원(淵源)있는 학문의 힘이었도다.
餘蔭綿椒 남기신 음덕(陰德)이 연면(連綿)하여서
聊蕃蘊殖 애오라지 번창하고 재력(財力)도 쌓았다.
積卷遺史 유사(遺史)의 책 속에서 행적(行蹟)을 찾아
明載玄石 현석(玄石)(: 검은 돌)의 비석 위에 밝게 실었네.
我銘一片 내가 명(銘)을 지은 한 조각 비문이
百世信墨 백세(百世)토록 믿을 수 있는 글이 되리라.
단기(檀紀) 4211(四千二百十一)년 무오 8(八)월 15(十五)일에 15(十五)세손 진섭(鎭燮) 삼가 세우다.
종후손(從後孫) 병룡(炳龍) 삼가 짓고
월성(月城) 손진홍(孫晋弘) 삼가 쓰다.